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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는 태리를 빼내 주기 위해 몇 번이나 이쪽으로 오려고 했다가 한 차례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거대한 골렘의 발등이 그가 접근하려고 할 때마다 길목을 가로막으며 방해를 했기 때문이다. 매번 몸을 굴러 잘 피해 나왔지만 머뭇거렸던 단 한 번, 돌로 이루어진 발길질에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태리는 아직도 심장이 철렁거렸다.
단순히 충돌한 것만으로도 철제 아머를 으스러뜨리는 압력이 들어갔다. 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며 찌그러진 어깨 보호구를 떼어 내던 그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저 돌덩어리가 성가시게!”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즈가 함께 싸워 주고 있다는 것.
물론 그도 상황이 좋지는 못했다. 왕을 노려 정확히 조준하고 싶은데 집중할 만하면 골렘이 가슴을 펼쳐 시야를 가로막았고, 그도 아니면 마법의 발동이 더 빨랐으니 저격수로서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정말로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어.’
서늘한 예감이 등골에 고인다. 태리는 다시 한번 상체를 뒤틀어 총이나 도끼라도 어떻게든 손끝에 걸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죽어도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에 호흡만 가빠지다가 급기야 탈진까지 오고 말았다.
“하아, 하아.”
빙의한 이후 처음으로 벽이란 게 무엇인지 실감하게 된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결박에 저항하기 위해 억지로 마나를 회전시켰다가 두 번이나 혼절을 겪었다. 이미 완성된 대마법사의 속박을 기력만으로 해체시키는 것은 그녀의 어리숙한 실력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
지금도 식은땀이 흘러내려 전신이 냉골 같았지만 태리는 눈을 감고 담담하게 호흡을 골라 내는 데 집중했다. 자신의 상태로 인해 다른 이들이 동요하지 않기를. 그리하여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기를 바랐다.
토벌대의 체력은 이런 와중에도 쑥쑥 빠지고 있었으니까. 비단 클로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왕은 이들을 전멸시키겠다고 했지만 이렇게 가면 굳이 그가 손을 쓰지 않아도 결국엔 지쳐서 모두가 말라 죽고 말 것이다.
“깨져! 제발 깨지라고! 왜 안 깨지는 거야!”
태리는 힘겨운 호흡을 감추고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밑에는 아까부터 내내 주먹으로 그녀가 갇힌 벽을 쾅쾅 치고 있는 브리짓이 있었다.
있는 힘껏 온 힘을 다해 부수려 애쓰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브리짓 역시 지금은 그냥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 여자의 두드리는 힘으로는 단단한 벽에 실금조차 낼 수 없었다.
“그만해, 브리. 그리다가 손 다쳐.”
“이게 왜…… 안 부서지냐고! 흐윽……!”
팔이 묶여 있어서 눈물을 닦아 주지도 못한다는 게 너무나 미안하고 안타깝다. 흐느껴 우는 브리짓의 모습은 검은숲에 재앙이 닥쳤던 그날, 그때의 그 아이처럼 불안정해 보였다.
주변이 다 그러하다. 과거의 악몽에 사로잡힌 것처럼 마법사들은 어두운 환상과 이곳의 현실을 겹쳐 보고 있었다. 무력하게 쓰러지고 나약하게 무너지던 그날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법을 봉인당하는 일이란 한 번도 겪어 본 적도 없었기에 어쩌면 더 절망적인지도 몰랐다. 겪어 보지 못했기에 대응하지도 못한다.
태리를 입술을 꽉 깨물어 통증으로 의식을 깨웠다.
‘뭐라도 해야 돼. 전부 다 나를 믿고 온 사람들이잖아. 나를 위해…… 여기까지 와 준 사람들이잖아.’
은둔하고 싶어 했음에도 만사를 제치고 자신 때문에 거리 밖으로 나온 이들이다. 제 고향을 침범한 기사들과는 한사코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았음에도 마찬가지로 자신 때문에 고집을 접고 힘을 보태 준 사람들이었다.
이유란 오직 하나. 공주님을 위해서.
자신들의 공주가 그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러니 그런 사람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해서는 안 된다.
태리는 다시 한번 팔다리를 움찔거렸다가 포박되어 있는 힘을 느끼곤 크게 호흡을 들이쉬었다. 몇 번이나 확인하게 되지만 이런 곳에 갇혀 있는 지금의 자신으로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어떻게든 버티는 것.
악착같이 버텨 내는 것.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낸다면 그때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생기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 당장을 버티기 위해서는…….
‘기사들을 반드시 살려야만 해.’
태리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울고 있는 브리짓을 차분히 제게로 불렀다.
“브리, 울지 말고 이리 와. 나한테 가까이 와.”
뺨이 흠뻑 젖을 정도로 엉엉 울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브리짓은 그녀가 부르는 작은 목소리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브리, 있잖아. 혹시 다친 기사들을 치료할 수 있겠어?”
“뭐? 지금은 나도 마법을 쓸 수가 없……”
“넌 마법이 없어도 할 수 있잖아.”
“내가 어떻게…… 나, 난 못해. 내 치료술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단 말이야.”
치유 마법사로 태어나긴 했지만 독이나 물약 연구에 열을 올렸을 만큼 브리짓은 그쪽에 소질이 없었다. 재능도 없는데 흥미도 안 생기니 더더욱 깊이 공부하지도 않았고.
왜 하필이면 치유술이 필요한 거람. 손톱을 앞니로 깨물던 그녀가 급히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
“그런 거라면 나보다 루나 아줌마가 더 전문이야. 금방 데려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 봐.”
“아니야, 브리. 가지 마! 난 네가 필요한 거야.”
버둥거리는 팔로 태리는 힘겹게 브리짓의 손가락 하나를 겨우 잡았다. 자신이 없어 보이는 친구의 손끝을 꼭 쥔 채로 놓지 않았다.
“잘 들어, 브리. 넌 할 수 있어. 이건 너만이 할 수 있다고.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넌 그때도 도망치지 않았고 끝까지 남아서 싸웠잖아. 그때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해?”
“그때 나는…… 내가 만든 물약으로……”
“그래, 브리. 그거야. 마법 같은 거 조금 못 쓰면 어때. 그런 거 없어도 넌 네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잖아. 너만이 할 수 있다고. 지금도 그때도 너뿐이야.”
아……. 머리가 찡해진 것처럼 브리짓은 로브 안에 한가득 실려 있는 자신의 물약들을 떠올렸다.
“이걸로?”
“부탁해. 기사들을 돌봐 줘. 그리고…… 클로드를 살려 줘.”
그가 죽어선 안 돼. 정말로, 정말로 안 돼. 속삭이듯 덧붙이는 태리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은 것처럼 축축하게 들려왔다.
브리짓은 떨리는 눈으로 초토화되기 일보 직전인 싸움터를 돌아보았다.
리치의 선전 포고가 있던 뒤로 줄곧 밀리기 시작해 토벌대는 이제 거의 붕괴의 턱끝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그나마 마법사에겐 되도록 사정을 두어 건드리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에겐 가차 없었고, 특히 성기사들의 희생이 매우 컸다. 그들은 사실상 전멸을 앞두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첫 줄에 서서 죽음을 각오하고 공격을 막아 내고 있는 인물 역시 클로드였으니까.
‘이대로 놔두면…….’
부상자들은 어렵지 않게 시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왕묘에 내려오기까지 해치우고 왔던 그 망령들처럼 이곳에 묶여 언데드가 된다, 영원히.
토벌 실패는 물론이고 또 하나의 끔찍한 비극이었다.
‘비극. 그래, 비극이지.’
하지만 동시에 그런 생각이 스친다.
‘근데 기사들이 다 죽어서 사라져 버리면…… 사실 그건, 그거야말로 우리 마법사들이 늘 바라 왔던 소원이잖아?’
다 함께 수세에 몰린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제국의 기사들만 없다면, 클로드만 사라진다면, 이자리스가 온전히 마법사들의 영토로 되돌아올 것이란 유혹은 떨치기가 어려웠다.
무력해진 마법사들을 어떻게든 지켜 주려는 피투성이 기사들의 모습에 그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저놈들이 오늘따라 왜 저렇게 열심히 싸우는 거야…….”
목숨이 달렸으니 필사의 의지로 싸우는 게 당연하나 저것들을 죽여, 살려를 고민하는 덕분에 수천, 수만 번의 고뇌를 겪게 되었다.
기로에 놓인 수행자가 된 기분. 그것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태리가 웃음기를 담아 말했다.
“마법사라면 억압에 저항해야지.”
“……!”
“끝장내도 우리가 끝장낸다.”
“……!”
“이거, 인생 신조로 삼고 있는 줄로 알았는데.”
다른 이의 손에 적들의 최후를 맡기기엔 아쉽지 않냐는 공주의 다정한 이야기. 그 소리에 브리짓은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사람처럼 복잡했던 머릿속이 뻥 뚫렸다.
“그래…… 맞아. 그랬지.”
그렇게 살기로 스스로에게 다짐했었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지루한 마법사로서의 삶이 아닌 불꽃같은 길을 걸으면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 거라고. 침략자들에게 계란도 던지고 토마토 던지면서.
“그리고…… 그게 널 이 빌어먹을 벽 속에서 꺼낼 수 있는 길이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럴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힘겨운 와중에도 태리가 애써 입술을 올려 미소 짓자 브리짓이 그녀가 갇힌 벽을 두 손으로 짚으며 맹세하듯이 약속했다.
“구해 줄게. 내가 여기서 널 꼭 꺼내 줄게.”
“꼭 기사 같은 말을 하네.”
“마법사한테 어디 그런 재수 없는 소리야. 아무튼 정신 놓지 말고 거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 사자왕은 무슨. 독의 여왕 브리지테의 힘이 뭔지 보여 주겠어.”
고여 있던 눈물까지 말끔히 떨쳐 낸 브리짓은 등짐처럼 메고 있던 탱크 통을 벗은 뒤 그 안에 담겨 있던 독을 비우고, 가지고 있는 모든 힐링 포션을 꺼내 새로운 물약을 탱크 속으로 콸콸 붓기 시작했다.
물약 역시 마법의 일환이지만 그것은 말이 아닌 물건이기에 리치가 걸어 놓은 침묵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게 된다.
양이 한정적인 게 아쉽긴 하지만 그녀가 만든 물약은 애초에 언제나, 늘 최고의 상황이 아닌 한계에 다다른 최악의 상황에서 사용되어 왔었다.
나라에 재앙이 몰아닥쳤을 때도, 다 함께 전멸을 목전에 둔 지금 이 순간에도.
다 채우지 못하고 반 정도 차오른 지점에서 출렁거리는 물약의 양을 내려다본 뒤 브리짓이 조용히 뚜껑을 돌려 잠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