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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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다 월등히 수준이 올라간 파이어 블레이드. 땅바닥을 일자로 내달리며 제게로 달려오는 긴 불길 앞에서 클로드는 눈을 한번 끔뻑이다가 이번 것은 최대한 회피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설프게 막다간 죽는다. 진짜로.

바닥을 밀듯이 그가 뛰어올랐고 동시에 수십 개의 얼음 고리가 뒤편에서 부메랑처럼 날아왔다.

밀집된 얼음 고리가 불길 위를 휩쓸고 지나갈 때 터지는 진압 장면이 장관이었다. 서로 완력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두 개의 마법은 부딪친 순간 엄청난 양의 수증기를 만들어 내며 한꺼번에 상쇄되었다.

그건 클로드가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방어였다. 불덩어리가 터지기 전에 깨트린 게 아니라 이미 터진 불길 위에 물을 끼얹어 끈 것에 가깝다.

“어찌 이런……. 마법사들이 나를 막아서다니? 나는 너희의 왕이다, 아 아니, 왕이었다! 좀 오래됐지만!”

그리고 적지 않은 충격으로 음성이 삐끗한 것처럼 보이는 왕의 말대로 이번에 행동한 것은 이자리스의 마법사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옛날 얘기가 다 무슨 쓸모래. 그리고 좀이 아니고 많이 오래잖아?”

적국의 기사마저도 존댓말을 하는 와중에 과감히 반말을 날리는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 간덩이, 브리짓이 앞으로 빠져나오며 말대꾸했다.

“네 감히! 맹랑한 것! 몇 살인고!”

“스물넷. 그리고 이건 나이랑 상관없어. 저 등신 같은 게 당하면 우리도 불리해지니까 모른 척할 수 없다고.”

왕묘 토벌단은 언데드를 몰살해 이 지역을 말끔히 청소하기 위해 집결했다. 이 기회에 힘을 떨쳐 입지를 다지고, 정적을 함께 제거하는 전략도 노리긴 했지만 그것도 상황을 봐 가면서 하는 거다. 적어도 브리짓은 사리 판단이란 걸 할 줄 알았다.

“지금 여기서 쟤가 죽으면 몸빵은 누가 해? 마법사들은 몸 쓰는 일은 못 한다고. 우리는 말이야, 운동 같은 건 일절 하질 않는단 말이야.”

우리 마법사들에겐 인간 방패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건 안 키우니까. 그런 떳떳한 주장 뒤로 로브를 입고 옹기종기 모인 이들이 단결된 지팡이 끝으로 호응했다.

“암, 마법사가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운동을 하나! 큰일 날 소리!”

“으으, 운동 싫어. 운동 혐오.”

“머리가 있는데 어째서 몸을 움직여야 한단 말이야?”

우리 단장한테 무슨 막말이냐, 사람을 뭘로 취급하는 거냐. 얘기를 들은 기사들이 으르렁거리긴 했으나 어쨌거나 다시 한번 두 집단 사이의 단결의 의지를 확인할 순 있었다.

“선제공격이 아닌 대응 공격 위주로 마법을 구성해! 저 바보 고자에게는 방어를 증폭시키는 신체 강화를 걸어 주고! 냉법사들은 가장 뒤로 가서 상쇄에 집중! 최대한 반대되는 상성으로 맞서야 돼! 그리고 무엇보다 최우선은 마나 관리니까 다들 초반부터 무리하지 마!”

화염이 특기인 왕을 막기 위해 냉기 계열이 주력인 마법사들이 후다닥 후방으로 위치를 변경했다.

“그래그래, 올바른 대응이다.”

저들 중 지략가가 있다. 지켜보던 왕은 매우 기쁜 모습이 되었다. 심지어 브리짓이 사람들을 통솔하고 충분히 전체를 장악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기까지 한다. 역시 마법사라며 칭찬 또한 아끼지 않았다.

핑!

하지만 그런 그를 적수로 삼은 것은 기사나 마법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을 날카롭게 울리는 바람소리가 꼴 보기 싫은 왕의 여유 만만함을 단숨에 끊어 냈다. 찰나에 위험을 감지한 왕은 본능적으로 마력을 끌어 올려 보호막을 만들었다.

“망령의 철갑옷!”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좀처럼 하지 않는 시전어까지 외쳤을 정도다. 그만큼 암살적인 느낌이 짙은 공격이었고 반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크게 다칠 뻔했다.

파삭! 망령들로 뭉쳐져 있던 보호막이 정중앙에서 꿰뚫려 산산조각이 났다. 발밑으로 희미한 파편들이 흩어져 내리자 그 사이로 박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살깃을 가늘게 떨고 있는 화살 한 촉이었다.

고작 이 작은 화살 하나가 그만한 피해량을 입힐 수 있다니. 왕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날카로움과는 정반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거칠게 다가왔다.

“어이, 마법사 왕. 혼자 왜 그렇게 신나 있냐? 이쪽은 진지한데 너 혼자만 즐거워하니까 약 오르잖아.”

“엘프?!”

“그래, 엘프다. 설마 나한테까지 몇 살이냐고 물으려는 건 아니겠지. 여기서 나보다 어린 놈은 없다.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 까불지 마라.”

“오오, 달처럼 고아하며 매처럼 날렵한 정령의 종족!”

“도대체 인간 놈들은 엘프한테 뭔 환상을 품는 건지. 난 그냥 고기 좋아한다.”

꽃으로 빚은 듯한 미남이 이빨을 드러내며 성질을 부렸지만, 왕은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것처럼 또 양손으로 두 뺨을 감싸 쥐었다.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기 공주에, 마검사의 분위기를 풍기는 성기사에, 왕에게 대적하길 주저하지 않는 용맹무쌍한 백성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행복해 죽겠는데 거기에 더해 엘프까지 있다고? 그는 더욱더 신이 나서 입이 크게 벌어졌다. 생전에도 누려 보지 못한 영웅담을 이곳에서 기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몸이 죽기 전에 엘프와 겨뤄 보게 되다니!”

“죽었어, 이미. 확실히 죽었다고. 한 번 더 죽여 줄 예정이긴 하지만.”

“아름다운 이가 어찌 그리 입이 험한고.”

“첫 만남에 이 정도면 굉장히 살살 말하고 있다.”

이즈는 신경질을 팍팍 내며 제 성질대로 속사포로 연사를 해 댔지만, 그때마다 왕은 ‘하하하! 세상에 이런 일이!’ 하고 웃으면서 환영 분신을 수십 개씩 만들어 돌아다니며 잘도 피해 냈다.

“뭐야, 저거 왜 저렇게 정신 사납게 돌아다녀. 열받게 계속 웃어?! 말도 안 돼. 내가 저걸 하나 못 맞힌다고?!”

폭발한 이즈가 살벌한 욕지거리를 퍼부어 댔지만 리치는 그냥 이 모든 것들이 깜짝 선물처럼 너무나도 즐겁다.

전방위로 합공을 받으며 난전과도 같은 전투를 즐기던 그는 어느 순간엔가 부서진 돌무더기로 사뿐히 내려오더니 단체로 몰려온 젊은이들을 상냥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큼큼, 즐겁긴 하나 아무래도 이 몸이 다소 불리할 듯하니 잠시 머릿수의 균형을 맞추겠노라.”

그러면서 그들을 맞이할 새로운 살인 병기를 친절히 꺼내 놓았다.

토도독 돌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더니 큰 바위와 작은 돌멩이들이 회오리를 타며 돌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점점 더 크게 뭉쳐져 크기를 키워 갔다.

기사들은 영문을 몰라 주춤했지만, 마법사들은 돌들이 합쳐져 서서히 갖춰지는 거인의 형상을 보곤 단번에 의도를 알아차렸다.

너 나 할 것 없이 그들의 입에서 우르르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악! 여기서 저런 사기 능력을 쓰시다니!”

“왕이시여, 치사하십니다. 너무도 치사하십니다!”

“양심, 어디……?”

그랬다. 이건 너무 치사한 마법이었다. 머릿수가 밀린다고 저런 식으로 지원군을 불러내다니.

돌을 먹고 쑥쑥 자란 거대한 스톤 골렘들이 천장에 머리를 박으며 쿵 하고 육중한 발을 뗐다.

* * *

이크!

구석에 붙어서 수그려 앉아 걷던 태리는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는 섬광을 피해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뭔가가 아슬아슬하게 정수리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마법과 검이 작렬하는 북새통 같은 현장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골렘이 왼팔을 휘두르자 막 달려오던 모험가 셋이 나뒹굴어 떨어진다. 반 바퀴를 쿵쿵거리며 돌아 다시 오른팔을 휘적이니 이번엔 또 다섯이 우르르 밀쳐져 쓰러졌다.

골렘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그런 식이었다. 일일이 상대하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단단한 주먹으로 쳐 날려 버린다. 그물이나 밧줄을 걸어서 제어해 보려고도 했지만 힘으로 손쉽게 끊어 내서 통제가 안 됐다.

“내 돌 맛이 어떤가! 하하하!”

태리는 홀로 어린아이처럼 신난 왕을 노려보았다. 그가 돌격을 지시할 때마다 골렘은 무서움을 모르는 병사처럼 쿵쿵쿵 뛰어나갔다.

‘재료만 있으면 저런 거 몇 개씩 만들어 낸다 이거 아니야.’

대마법사쯤 되었으니 본인 소유의 골렘이나 사역마를 부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저렇게 자연 형태에서 바로 골렘으로 진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다. 보통은 인형의 형태로 미리 만들어 둔 뒤에, 그곳에 핵을 심고 각인을 시켜 마력을 주입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왕은 그 모든 중간 과정을 생략했다. 마도학에 대한 깊이와 활용이 모두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하다.

리치이기 때문에 다룰 수 있는 흑마법도 까다롭고, 기교의 수준도 상당해서 같은 마법을 사용했다 해도 번번이 아군의 패배로 끝나고 만다. 비등하게 겨뤄 승리를 꿈꾸기엔 차이가 너무도 큰 상대였다.

‘이상해. 왕묘 코스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보스급이야. 애초에 등장하지도 않았어야 하는 건데. 이건 뭔가가 잘못됐어.’

치트키를 쓴 것에 대한 부작용인가. 클로드 혼자 와서 뚫었어야 하는 길을 떼거리로 밀고 들어와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생명의 병을 찾아 이 사고를 무마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나마 왕이 전투 놀이에 신경이 팔려 자신을 찾지 않는 것이 불행 중의 다행. 태리는 일어나지 않고 바닥에 무릎을 댄 채 기어서 움직였다. 블링크 같은 순간 이동기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돌다리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려 건너려는 극도의 조심성이었다.

엉금엉금 기어서 처음 열었던 석관까지 무사히 도착한 뒤 주변을 샤샤샥 살핀다. 공간 전체가 아비규환이 따로 없어서인지 아무도 이쪽에는 관심이 없었다. 재빨리 일어난 그녀는 욕심 많은 도굴꾼처럼 두 팔로 허겁지겁 안을 뒤지며 조사에 나섰다.

루비가 박힌 왕홀, 만년을 산 고목지팡이, 전설의 투명 망토, 황혼의 아뮬렛, 신속의 반지, 인어의 거울……. 왕의 석관답게 안에는 화려한 부장품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정확하게 감정을 해 봐야 알겠지만 능력치가 최소 열 몇 개씩은 붙어 있을 것 같은 희귀 등급 아이템의 천국이다.

“미쳤다. 전부 다 훔쳐 가고 싶다.”

도굴꾼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갔다. 현실적인 욕구를 이겨 내고 태리는 리치의 라이프 베슬 찾기에 집중했다.

그런데 골라내고 보니 병이 너무 많아서 한 가지로 특정 지을 수가 없었다. 향수병, 꽃병, 장식용 물병, 무슨 알라딘의 요술 주전자처럼 생긴 것들도 있고.

하나씩 들어서 흔들어 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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