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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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를 간질이는 숨결 때문에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간신히 이성을 붙든 클로드는 다행히도 그녀의 지시를 금방 알아들었다. 

문제의 병을 찾을 때까지 리치의 시선을 딴 길로 빼며 시간을 끌어 줘야 한다는 것.

‘알겠습니다.’

턱을 얕게 당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그는 기사단을 향해 곧 그들만의 수신호를 내렸다.

척척척!

명령이 떨어지자 성기사들은 즉각 훈련받은 대로 움직이더니 삽시간에 완벽한 유기체와도 같은 대열을 갖췄다.

모두가 그 일사불란함에 감탄을 터트리는 순간, 그것이 단순 보여 주기식 행동이 아니었음을 표출하듯 그들에게서 일제히 신성 정화가 펼쳐졌다. 빛 무리가 모여 눈을 감은 여신의 자애로운 얼굴을 만들 내더니 그로부터 눈부심을 동반한 어마어마한 신성력의 파장이 생성되었다.

사제 스물 이상이 모여 진열을 갖춰야만 완성할 수 있는 광역 기도로,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악한 물질을 신의 숨결로 태울 수 있는 극강의 공격술이었다.

성스러움을 좇는 신의 힘은 죽음의 영역에 속한 언데드에게는 최악의 상성. 기도문이 완성되자 즉각 리치의 흑색 연기를 노린 정화 의식이 발동되었다.

대폭발이 터진 것처럼 환한 빛과 함께 귀에 이명이 스쳐 지나가고, 겨우 다시 사위를 알아볼 만한 시야가 되었을 때에는 놀랍게도 리치의 몸 반쪽이 지워져 있는 상태였다.

시작부터 피해를 반이나 입은 채로 맞붙게 되는 일대다 전투. 격노해도 모자라지 않았을 테지만 왕은 절반만 남은 입술로 제자리에서 표표히 웃고 있었다.

“아아, 너무 아프군.”

반쪽짜리 몸에서 검은 연기가 웃음소리를 따라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뭐, 그래도 괜찮았다. 제법 쓸 만한 재주야. 먼저 친다는 자신감도 좋았고. 허술했으면 짜증만 났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아.”

도전을 기껍게 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기세를 바꿔 손을 편하게 앞으로 뻗었다.

무슨 반격을 시도하려는 거지? 의심이 들기 무섭게 나머지 스물여섯 개의 석관 속에서 알 수 없는 힘들이 뽑혀 나와 리치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흡수된다.

송장도 아니요, 뼈다귀도 아니었던 애매모호한 리치의 몸에 서서히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연기가 뭉쳐서 뼈가 생기고 그 위에 살이 붙고, 깨끗한 피부로 뒤덮이더니 점점 사람의 모습을 갖춰 나간다.

잘려 나갔던 절반의 몸도 모두 회복되었다.

사람들은 입은 벌린 채 기적과도 같은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짧은 곱슬머리 금발이 찰랑거리고, 별빛과 같은 눈동자에 오렌지색 빛깔이 또렷한 초점을 맞출 때까지.

“와, 왕이 돌아왔다……!”

누군가의 입에서 터진 탄식 그대로였다.

그곳에 왕의 재림이 있었다.

최고의 전성기 시절 같은 젊고 푸르른 모습으로.

정신이 얼얼해질 정도의 변화를 마주하며 태리는 왕의 외모에 절로 시선이 강렬하게 사로잡혔다.

‘나랑…… 굉장히 닮았어.’

하지만 리치가 보여 준 찬란한 모습과는 다르게 왕묘 내부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불길한 어둠으로 진하게 물들어 버렸다. 언데드의 기운이 신성력을 밀어내자 성기사들이 제일 먼저 영향을 받았다.

“갑자기 머리가 이상해. 어지럽고 정신력이 흐트러진다.”

“나도 기도문이 생각나지 않아.”

흑마법의 정수에 가까운 의식을 코앞에서 목격한 대가로 사제로서의 믿음이 절벽처럼 뚝뚝 꺾여 나가고 있었다. 한동안은 검술을 펼친다 해도 거기에 신성력을 가미할 수 없다.

그나마 극복해 낸 자들이 서둘러 전과 비슷한 시도를 다시 감행했지만, 육신을 얻은 왕은 제 몸을 투명한 구로 감싸 방어함으로써 신의 힘을 간단히 떨쳐 냈다.

“돌아가길 제안했건만 명백한 거절이로군. 그렇다면 앞으로의 결과는 두 가지뿐이다, 도전자들이여. 내가 너희 모두를 전멸시켜 나의 새 위업을 달성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너희들이 이 몸을 갈가리 찢어 용사로서의 명망을 떨치거나.”

침입자들의 도전을 놀이로 받아들이는 듯한 여유로운 선전 포고. 그가 가장 먼저 없애야 할 대상으로 손가락을 들어 기사단을 지목했다.

“기꺼이 상대가 되어 주마. 하찮은 실력으로 덤벼든 걸 후회하게 될 거다.”

말과 함께 그의 손끝에 작은 소용돌이가 맺혔다.

그것이 주문어 없이 마법을 불러내는 고위 캐스팅, 동작 발현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단단한 불덩어리가 공기 밖으로 빠져나온 뒤였다.

파이어 블래스트!

클로드는 인식한 즉시 마법을 막기 위해 귀신같은 반응 속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왕은 거기까지 짐작하고 있었던 건지 순간적으로 팔을 틀어 블래스트의 방향을 바꿔 버린다. 마스터 경지의 검사라면 검 한 자루를 가지고도 원소 마법을 튕겨 내거나 비껴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후, 막아 낼 수 없을 거다. 보고 뒤쫓기엔 너무 늦지.’

도중에 방향을 틀었으므로 튕겨 내기 기술은 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다. 경로를 바꾼 그조차도 솔직히 자신의 화염이 어느 곳에 가 꽂힐지 알 수가 없어졌으니까.

그러나 클로드는 망설임 없이 신속하게 방향 전환을 하더니 불덩어리가 떨어질 정확한 위치에 가서 검을 강하게 내려쳤다.

‘저게 된다고?’

게다가 그가 내보인 행동은 방어가 아닌 공격이었다. 보통은 검날이나 등으로 비껴서 날려 버리는데, 겁도 없이 불 속으로 칼을 쑥 밀어 넣더니 손잡이를 움켜잡은 채 있는 힘껏 갈라서 마법을 소멸시켜 버렸다. 얼토당토않게 강한 힘과 그를 뛰어넘는 축적된 연습량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다.

“내 파이어 블래스트를 검으로 받아쳐서 깼단 말인가.”

물론 3성급에 해당되는 비교적 단순하고 약한 화염 마법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칼끝으로 마법의 핵을 정확하게 찔러 관통시키다니.

‘이건 마검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저놈은 성기사라고 하지 않았나?’

왕으로선 어째서 성기사가 저런 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지 의문이겠으나, 그동안 태리의 무자비한 지옥 강행군 아래에서 클로드는 숱한 밤 전투를 치르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하고 강해져 왔다. 검술이 아닌 마법에 대해서도 직관적인 통찰이 생겼을 만큼 경험과 안목이 넓어진 건 말할 것도 없었고.

그 일련의 사건을 전혀 모르는 왕은 흥분으로 인해 동작이 매우 부산스러워졌다.

“검성이로군. 검성이야!”

“그렇게 대단한 경지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 공격의 방향을 예측한 건가?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일 터.”

“어깨의 움직임을 보았습니다.”

지나간 후에 뒤쫓아 가는 건 소용이 없다. 그것을 앞지르기 위해 클로드는 왕의 어깨에 집중했다. 어깨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으면 불이 쏘아져 나가는 것보다 먼저 나갈 수 있고, 그것이 터지기 전에 도착한다.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묵묵히 성실한 대꾸를 하는 그를 향해 왕이 짧게 웃었다.

애교나 붙임성도 없고 낯도 가리며 말수도 적어 누가 봐도 과묵해 보였는데 의외로 말을 시키면 꼬박꼬박 전부 대답해 주는 청년.

뭔갈 요구해도 왠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줄 것 같아서 이건 또 무슨 우스운 조화인가 싶었다.

그가 양팔을 넓게 펼치며 호승심이 넘치는 입 끝을 올렸다.

“경이로운 관찰력인데 몇 번이나 실수 없이 들어맞을지 시험해 보고 싶군. 계산하기 편하도록 횟수는 펼쳐져 있는 손가락의 개수만큼으로 하겠다. 막지 못하면 자네 부하들이 봉변을 당하겠지.”

자랑하듯 양팔을 들어 보인 그의 손가락에는 소용돌이가 열 곳 모두에 맺혀 있었다. 동일한 마법이라곤 해도 그것을 농담 몇 번 하는 새에 열 번을 복사해 낸 것이다.

열 개를 동시에 발현해 단숨에 끝낼 수도 있을 듯했지만 왕은 피아노 치듯 그것을 하나, 하나 세심히 조준해서 클로드에게로 쏘았다.

목표를 눈에 담은 클로드는 덤벼들어 오는 마법을 침착하게 차례대로 분쇄해 나갔다. 월등한 높이로 도약해 위에서 아래로 찍기도 했고, 깔끔한 동작으로 날려 버리기도 한다.

무엇보다 검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초승달 모양의 검기의 위력이 대단해서 기력을 모아 두 개의 불을 한꺼번에 꺼트리기도 했다.

이건 또 색다른 장관이로군. 감상하듯 바라보는 왕의 머릿속엔 감탄과 함께 의구심이 다시 피어올랐다.

길고 강인한 두 다리에 힘이 넘쳐흐르는 팔. 칼끝에는 기품이 있고 자세에는 흔들림이 없다. 갑옷과 망토를 걸치고도 유연하고 고요하게 움직이는 법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을 보니 청년은 이미 까마득한 수준의 고위 기사였다.

유년기부터 이와 같은 훈련을 수없이 반복하며 성장한 기사의 정석이라는 것.

그런데 어째서 드문드문 마검사와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건지 아리송하다.

‘누군가 가르치기라도 한 건가?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행동으로 성격을 대변하듯 가식 없는 검술로 마지막 열 번째 공격까지 방어해 낸 그가 조용히 대각선으로 칼을 내렸다.

“하하, 이것 참 재미있군. 젊은 친구가 솜씨가 아주 좋아.”

“…….”

클로드는 말없이 목을 숙였지만 내색하지 않는 표정 아래로 들썩이는 호흡을 감췄다.

쉽지가 않다. 적당히 방어하는 것으로는 결코 막아 낼 수 없는 인물이라는 걸 오른팔의 뻐근함이 전달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상대는 그를 봐주고 있기까지 했다. 더 강한 마법을 더 빠르고 더 많이 쓸 수 있음에도 그의 실력을 확인해 보듯 일부러 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힘들다고 빼면 왕의 공격은 기사단의 중심부로 향할 게 자명하고 그렇게 하나둘씩 아군이 무너지다가는 시간을 벌 수가 없었다. 왕의 눈을 피해 빠져나간 태리가 열심히 리치의 생명력이 담긴 라이프 베슬을 찾고 있을 테니까.

“에잉, 너무 잘하니까 좀 그런데. 수준을 살짝 더 올려 볼까.”

왕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보곤 클로드는 하던 생각을 끊고 즉각 검을 들어 올렸다.

태리가 일러 주길, 마법이란 건 누르면 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주문을 영창하고 마나를 구동시키는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그러므로 아주 쉬운 마법만을 골라 쓰는 게 아니라면 한 명의 마법사가 연속 공격을 가하는 일은 힘들다고.

그러니 마법사를 상대할 일이 있다면 이전 주문과 다음 주문이 이어지는 그 사이를 노려야 한다……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그 틈이 안 보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배우지 못했는데.’

왕이 선보이는 마법에는 그 어떠한 지체나 지연도 존재하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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