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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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식욕과 살인 욕구만이 남는 언데드에게 자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감당하기가 어려운데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생전에 마법사의 예법이 어떠했는지조차 전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 부분에서 리치가 튀어나오는 거야? 왜 멋대로 스토리가 엇나가는 거냐고.’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을 담아 눈에 힘을 팍 준 순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리치의 흉악한 안광과 마주쳤다.

태리는 반사적으로 작동하는 방어 기제처럼 옆구리에 걸린 도끼 자루를 콱 움켜쥐었지만 그에 반해 리치는 오묘한 실웃음을 흘려보낸다.

야만과 지혜, 포학과 자애가 번갈아 가며 드러나는 모습에 그녀는 찔끔 한 발을 물러섰다.

왕이 깨어난 순간 태리의 몸을 안고 멀리로 피했던 클로드는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을 느끼자마자, 뒤에서 한 팔로 어깨를 감싸 제게로 끌어당겼다.

누가 봐도 왕으로부터 공주를 보호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왕의 호기심은 꺾이지 않고 태리를 향해 직진해 왔다.

“나의 후손이여.”

짧게 연 서두에서부터 숨길 수 없는 흥분과 고양감이 느껴졌다.

“너는…… 공주인가? 그래, 틀림없이 공주겠지?”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구분이 중요한 건가? 내가 공주면 어떻고 왕자면 어떻다고?

하지만 거기서 뭔 상관이요, 하고 반항할 만한 자신감은 없다. 솔직히 심장이 달달 떨리고 무서워서 클로드가 없었다면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태리는 도끼 자루를 쥔 손가락을 꼼질대며 소심하게 끄덕여 긍정했다.

“예, 제가 공주 맞는데요…….”

“오오오!”

그러자 즉시 환호성을 터트린 왕이 두 손으로 양 뺨을 감싸며 어쩔 줄 모르다시피 상체를 흔들었다.

“공주라니, 공주라니! 이런 왕실의 경사가 다 있나!”

“어…… 그게 어째서 그렇게 되죠?”

“어째서라니? 우리는 딸이 귀해! 늘 귀했지! 시꺼먼 사내놈들만 태어나는 것이 왕실의 깊은 우환이었건만. 내가 이 두 눈으로 공주를 보다니! 이리 기쁠 때가 있나! 아하하하하!”

본인도 딸을 갖고 싶었는데 이루지 못했다면서. 그런데 이렇게라도 숙원을 이루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태리는 다시 한번 그 앞에서 ‘여한이 있어도 뭐…… 그쪽은 이미 죽었는데요’라고 대담히 대꾸하고 싶은 충동을 강렬하게 느꼈지만 자신감이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태이기에 목구멍 뒤로 꿀떡 삼켜 냈다.

“나도 딸을! 딸을 낳고 싶었는데!”

남들은 다 얼어붙어 있는데 분위기 파악 못 하고 혼자서 즐겁게도 웃는다. 그런데도 민망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왕이 슬슬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그가 태리에게 바삐 손짓했다.

“이리 오라, 이리 가까이 와 보라! 공주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고 싶구나!”

살아 있는 시체가 내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발언을 하다니.

으으으으응! 으으응! 싫어. 절대 싫어!

듣자마자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태리는 격한 도리질로 거부감을 드러냈고,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던 클로드의 팔에는 그 즉시 강한 힘이 실렸다. 절대 내주지 않겠다는 독기가 닿아 있는 살갗에 바짝바짝 느껴졌다.

왕은 그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노려보더니 더 강요하는 법 없이 본인이 스스로 움직였다.

태리가 즉각 총에 장전을 갈기고 클로드가 검을 뽑아 들었지만 쏠 테면 쏘고, 베려면 베라는 듯 칼끝 앞까지 다가와선 태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턱 끝을 손으로 매만지며 감상하던 그에게서 한참의 침묵 끝에 고심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정말로 귀엽구나!”

……이게 무슨 일인지. 이 상황에 저런 말이 가당키나 하는 어울림인지.

하지만 술렁거리는 분위기 사이로 제법 동감하는 듯한 후렴이 이어졌다.

“그, 그, 그렇지. 우리 공주님이 귀엽지.”

“아, 그건 인정이지. 솔직히 쟤가 되게 귀엽게 생기긴 했어.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저 정도로 귀여운 공주는 여기밖에 없을걸?”

“브리짓, 공주님께 멋대로 반말하지 마라!”

“뽀얗고 올망졸망하잖아.”

“엘프, 네놈도!”

“나, 뭐? 나 아무 말도 안 했거든? 기사 놈들이 떠든 소리 아냐. 방정맞은 것들.”

“우리가 아니다! 다른 모험가 놈이 뒤에서 중얼거리지 않았나.”

“우리는 그저 끄덕임으로 응했을 뿐.”

주절거렸든 끄덕거렸든 간에 그냥 다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했으면 좋겠다. 민망해서 죽을 것 같으니까. 태리는 빨갛게 물들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걸 활짝 핀 미소로 바라보며 리치가 준엄한 목소리를 깔았다.

“공주여, 그렇다면 이제 답하라. 죽음으로부터 까마득한 네가 어째서 왕들의 잠자리에 왔는가.”

“그건…….”

“시간의 흐름을 감안해 보아도 이곳에 들어와야 할 다음 소네티는 공주가 아닐 텐데.”

측면에 가지런히 늘어선 관의 개수를 눈으로 세어 보는 것 같더라니, 그것으로 대략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를 가늠한 것 같았다.

죽은 왕에게 올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대답이 무엇일까. 태리는 신중하게 생각해 보았다.

‘집에 돌아가려고?’

아니, 근본적이긴 해도 납득이 안 가는 대답이다.

‘그렇다면 드래곤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그럴싸해 보였지만 빌의 존재를 대놓고 알려도 될지 확신이 없으니 이것 역시 땡.

‘그럼 남은 건 저주를 풀기 위해 왔다는 형식적인 답안뿐인데…….’

당신께서 돌아가신 이후 나라가 그만 쫄딱 망해 버렸다는 사실을 상처 주지 않고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이것 참.

“뉘신지 잘 모르겠지만.”

“소개했는데.”

“죄송해요. 들어도 제가 잘 몰라요.”

“허어, 왕실 교육이 어찌 되어 가고 있는가. 말세로군.”

“네, 아마도 말세가 맞아요…….”

나라가 기와집에서 초가집으로 기울었는데 당연히 말세지.

“바깥세상이 많이 변했거든요.”

“그런가.”

“네, 근데 좀 많이 안 좋게 변했는데요.”

“저런, 딱한지고.”

“그래서 제가 구해 보려고 노력 중인데. 그게 이자리스를 통째로 다 복구하겠다,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요.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부서진 부분을 조금이라도 붙여 놓고, 그리고……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너무 횡설수설하고 장황했나. 이런 말로 왕의 이해를 기대할 수 있을까.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갈 곳을 잃은 손가락이 소맷자락을 말아 쥐어 꼼지락거렸다.

“그렇군.”

연기로 이루어진 신체 탓에 섬세한 표정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왕의 눈썹이 있는 부위가 재미있게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나라를 구하러 왔느냐고는 질문하지 않았다.

일행의 목적이 이곳을 지나감에 있다는 것까지 전부 듣고 난 후에야 그가 다시 중후한 음성을 뽑아냈다.

“공주의 뜻 분명히 알아들었다. 뒤를 따라온 저들도 보물이나 털러 온 골 빈 놈들은 아니라는 것이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나 역시 그에 맞는 대답을 해 줘야겠지. 사자(死者)가 된 이 몸으로선 내 조국이 말세라한들 그것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 나의 시대는 이미 끝났으니. 단, 이 방 안에서만큼은 권한을 가지지. 그러니 나는 공주가 요청하는 그 통과, 불허하겠다.”

“네?”

“불허.”

“뭐라고요?”

“불허한다고.”

“아니, 왜요?!”

끝까지 잘 들어 놓고는 불합격이요? 하는 말마다 깊이 공감해 놓고는 냅다 탈락이요?

반항적인 시선을 부글부글 끓였음에도 왕은 어림도 없다는 듯 한 손가락을 세워 짤짤 흔들어 보였다.

“벽시계의 초침은 본래 한 쌍. 이곳, 죽은 왕의 관 속에 하나. 이 너머의 살아 있는 왕에게 또 하나가 있지. 그런데 공주에게는 없다. 그것은 공주가 아직 이 방에 출입이 허락된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허락되지 않은 존개가 여기를 지나는 경우는 오직 죽음을 통해서일 뿐. 죽어서 와야 할 자리를 살아서 지나가게 두진 않겠네. 이건 다 공주가 귀엽기 때문이야.”

세상에, 이런 답답한 경우가. 태리는 연기로 이루어진 리치의 머리칼을 당장에라도 모조리 쥐어뜯고 싶었지만 어금니를 꾹 씹으며 차분하게 반박했다.

“세상이 변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어허, 젊은이들이란.”

“초침 좀 빌려주세요.”

“안 된다니까.”

“그럼 뺏겨 주실래요?”

“아아, 정말이지 요즘 것들은 맹랑하기가 그지없구먼.”

혀를 차며 온화하게 바라보는 분위기가 대강 이랬다. 얘야, 넌 정말 건방지고 무척이나 귀엽고 깜찍하구나.

“몇 번을 말하지만 허락할 수 없다, 귀여운 공주여.”

계속 듣고 있다 보니 은근히 사람의 열을 올리는 화법이다. 태리는 찔끔찔끔 뒷걸음질로 물러나면서 우선 그와의 거리부터 벌렸다.

그러면서도 주변 환경을 빠르게 훑어보았고 탈출로와 장애물의 위치가 어떤지, 시야가 트였는지 좁혔는지를 확인한 뒤 고개를 위로 꺾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뺏자.’

우리 저거 뺏자.

‘뺏자? 뺏자고?’

눈을 좁히고 그녀의 입 모양에 집중했던 클로드는 소리 없는 말을 읽기 위해 몇 번이나 그걸 따라 하며 붕어처럼 벙긋댔다가 급격히 눈이 커졌다.

안쓰럽게 흔들거리는 동공을 보아 하니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인데 태리는 걱정 말라고, 내가 다 계획이 있다고 제 어깨를 든든히 감싸고 있는 그의 팔뚝을 토닥토닥 진정시켰다.

‘보니까 저거 본인도 자기가 왜, 어떻게 움직이게 됐는지 모르는 모양인데. 하지만 난 리치를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살아 있을 때나 왕이지 죽어서도 왕인가. 어차피 이제는 한낱 언데드. 좀 강해도 언데드다.

‘리치는 라이프 베슬을 깨트리면 즉사잖아.’

경로를 벗어난 스토리에 당황해서 뻘뻘거렸던 과거는 금세 잊었다. 여기 와서 어이없는 일을 하도 많이 당했어야지. 어이없음에도 면역이 생겼다 이 말이다.

일반적으로 판타지 세계관에서 고위 언데드인 리치는 여간한 신성력으로는 정화가 불가능한 몬스터로 등장한다.

리치에게는 생명의 근원을 별도로 보관하는 라이프 포스 베슬(life force vessel)이라는 병이 있어서, 육신이 파괴될 위기에 처하면 그곳으로 들어가 다시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부활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힘들게 쓰러트려도 그 병을 파괴하지 못하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존재.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만 깨트리면 손쉽게 처리도 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물론 그게 어디 숨겨져 있는지 찾아야 하고, 들키지 않고 병을 깨뜨리는 일도 쉽진 않겠지만 그나마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승률이 아주 없진 않다고 판단했다.

태리가 클로드의 망토를 잡아 끌어 그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곤 속닥거렸다.

“생명의 병만 찾으면 돼요. 내 생각엔 관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아까 열었을 때 그 안에 수상한 부장품들이 엄청 많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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