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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눈에 소형 돋보기를 낀 채 이끼에 젖은 기호들을 살피던 남자가 기호를 하나하나씩 조합해 가며 짧지 않은 문장을 낭독했다.
“경이로운 말의 권위자, 그들은 마력의 우물이로다. 금역에 육신을 봉하니 이는 산 자의 홀림을 막기 위함이라. 온기가 없는 가슴에 손을 대면 피를 갈구하며 대가를 물을지니, 물러서라. 그들은 이승을 지키는 사신이니.”
오, 보기보다 더 심오한 경구였는데? 태리가 신기해하며 그가 낭독한 순서대로 커다란 기호들을 하나씩 꼭꼭 눌렀다.
우르르―
울림 소리와 함께 약진이 일며 돌문이 팽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천장이 무너질 것처럼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오르자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엎드려 몸을 피했다.
무서워하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는 건 오직 태리뿐.
원래 이렇게 열린다는 걸 알고 있었던 그녀는 감개무량한 기분에 젖어 겁도 없이 제일 먼저 성큼성큼 안으로 진입했다. 폐성으로 가는 지름길을 열었으면 이제 게임의 중반부 능선을 넘은 것이다 다름없었으니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으로 점차 들어갈수록 서늘한 한기가 얼굴로 끼쳐 왔다.
대대로 이자리스의 왕과 왕비의 유골이 안치되는 장소답게 공기 중에 고여 있던 마력이 살갗으로 찌릿찌릿하게 느껴진다. 대마법사의 시신은 사후에도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다 하더니 새삼 이들이 얼마나 독특한 존재인지가 실감이 났다.
그냥 평범한 인간 같은데. 어디에 그런 특별함이 숨어 있는 건지 태리는 제 팔뚝을 더듬더듬 만져 봤다가 멈칫했다.
‘내 몸……은 아니었지, 참.’
요즘 들어 간혹 본래의 자신과 이 공주와의 경계가 흐릿해질 때가 있어서 당황스럽다. 이따금 거울을 볼 때면 예전의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기도 한다. 그냥 지금의 모습이 본래의 자신처럼 딱 알맞게 느껴졌다.
나는 나고. 공주는 공주일 뿐인데.
우리는 서로 다른데.
“여기가 끝입니까.”
어깨를 타고 넘어온 클로드의 목소리에 그녀가 작게 놀라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가 끝. 왕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죠.”
클로드는 숨을 죽이고 들어와 조심스러운 눈길로 거대한 공동과도 같은 석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방은 안으로 깊숙이 파여 있는 긴 타원형의 형태였고, 벽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살아생전의 모습과 똑같은 크기의 왕의 동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동상의 발아래에 그들의 관이 놓여 있다.
관들은 하나같이 소네티 왕실을 상징하는 커다란 문양의 천으로 덮여 있어, 그 모습이 꼭 국가를 수호하다가 전사한 영웅들의 단체 장례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문득 이곳이 그 어떤 성소보다도 더욱 고귀하고 성스럽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저곳이 출구예요.”
태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향했다.
방을 비추는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곳. 그들이 들어온 입구의 정반대 편. 석실의 막다른 벽에 멈춰 있는 거대한 벽시계가 보였다. 벽 하나를 통째로 차지할 만큼 크고 정교해 보이는 장치였다.
“초침이 비워져 있는 상태라 움직이지 않지만, 찾아서 끼워 넣으면 시계가 돌아가면서 밀릴 거예요. 성의 지하 수로로 직행하는 비밀 통로죠.”
“그럼 여긴 성 밖으로 대피하는 왕의 탈출로였군요.”
“아마도요.”
그래, 아마도 초기의 목적은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지금은 거꾸로 침입하는 데에 쓰이고 있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떡하긴요. 이 중에서 초침을 가지고 있는 왕의 시신을 찾아야 하는 거죠.”
“왕의 시신을…… 뒤진단 말입니까……?”
진심이냐는 그의 예의 바른 얼굴에 태리는 태연한 표정으로 쉽게 끄덕였다. 그러면서 천장을 턱으로 가리켰다.
“잘못 고르면 공격당할 거예요.”
그곳에는 곰팡이처럼 번져 있는 거뭇거뭇한 얼룩들이 있었다. 무엇인지 정체를 규정지을 수 없음에도 침입자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역력한 께름칙한 기운들. 허튼짓을 하면 당장에라도 형체화되어 덤벼들 것 같았다.
“잠깐만, 공주님 그렇게 막 만지면……!”
“자, 조심조심 열어 봐요. 이것부터―”
말은 조심이라고 했지만 정확한 한 곳을 짚어 만지는 태리의 손길에는 조심성이 전혀 없었다. 천을 펄럭대며 걷어 내고 관을 봉하고 있던 나사를 홀홀홀 빼더니 뚜껑도 홀라당 까 버렸다.
입구를 열 때도 그랬지만 마지막 방은 단순 무력으로는 깰 수 없는 몇 가지 지점들이 있다.
내부에 보관된 관은 총 스물일곱 개. 왕비들의 것을 제외해도 선택지는 열셋. 그 열세 개의 관을 하나하나 열어 초침을 가진 왕의 시신을 찾는 설정이다.
잘못 골라서 열쇠가 없는 시신을 만지게 되면 천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신들이 그 즉시 내려와 공격한다. 그럼 그들을 상태로 전투. 사신의 체력을 0으로 깎아 쫓아내면 다시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패배하면 ‘YOU DIED’의 문구를 본 뒤 가장 최근의 저장 지점에서 도로 태어나게 된다.
지금은 게임도 아니니 사신에게 당하면 그대로 사망.
그러나 다행히도 태리는 이미 수십 번의 사전 죽음을 통해 어디에 초침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여기가 확실해. 알고 있는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있게 연 행동과는 달리 흰 천으로 덮인 사람의 굴곡을 보니 쉽사리 손이 나가지 않기는 했다.
으, 이런 변태 같은 게임 같으니라고.
고개를 돌리고 팔을 집어넣는 과정이 조금도 달갑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다른 이의 손엔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을 했어야 하는 사람은 본래 클로드지만 침략국의 기사로 하여금 죽은 왕의 몸을 뒤지도록 하는 일은 도대체가 얼마나 무례한 일이었나.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장면이었다곤 해도 그것은 모욕에 가까웠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해.’
그나마 이것이 최선의 도리겠지. 태리는 ‘죄송합니다’와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도 당신과 같은 소네티이지 말입니다. 이해해 주시겠죠?’ 이 세 가지를 수십 번씩 되뇌며 미라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는 가슴팍을 더듬어 가며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딱딱하면서도 뾰족한 금속 막대기가 만져지는 것을 확인하고 얼굴이 환해졌다.
찾았다, 내가 찾았다고.
드디어 여기서 나간다. 역시 치트키가 최고다. 무엇보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더니. 맞다, 그것이 힘이다. 역시 사람은 알고 살아야 한다.
고생 하나 없이 보스 방 탈출이라니. 너무 기뻐서 그녀는 천을 걷고 초침을 가져가기 전에 허리를 직각으로 푹 숙여 인사를 올렸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상님. 제가 가져가서 유용하게 잘 쓰겠습니다.”
신나서 조잘대는 사이 바닥에 그려진 자신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변화를 보았지만, 정답을 찾은 보상으로 사신이 물러가는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변화 이후에 또 다른 변화가 올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빨리 고개를 들지 않았을 텐데.
당장 몸을 돌려 이 방을 뛰쳐나갔을 텐데.
흰 천을 걷고 초침을 수거해 가려 팔을 뻗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손끝이 닿기도 천이 조금씩 출렁거리는가 싶더니 전에 없던 무언가가 그녀에게 상냥히 말을 걸었다.
“무엇이 감사한가?”
작지만 굵고 힘 있는 물음. 그것이 귓속을 파고든 순간 가뭄 난 땅처럼 경직이 사지로 퍼져 나갔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여기서 무언가가 내게 말을 걸 리가. 그럴 수 있을 리가.
그러나 이미 들어 버렸다. 아주 똑똑히 듣고야 말았다.
“답하거라, 후손이여.”
썩은 것의 목소리를.
* * *
본인도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시체는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제 몸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검은 연기로 빚어진 듯한 인간의 형태이기에 골격이나 피부, 그 어떠한 것도 만져지지 않는다.
“나 원 참, 이 황당한 육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도 곧 그 점을 깨달았는지 기가 막힌 듯한 한숨을 깊게 내쉬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내부의 온도를 떨어트리는 찬기가 물안개처럼 훅 퍼졌다.
본인의 관을 덮고 있던 천을 옷처럼 삼아 두르고 시체는 스스로 그곳에서 걸어 나와 두 다리로 섰다.
죽은 자가 전달하는 소름 끼치는 거북스러움이 사람들의 눈 속에 공포로 박혔다.
모른 척, 못 본 척, 현실이 아닌 척 더 이상 부정하려야 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광경. 그제야 눈앞의 현상이 현실임을 깨달은 사람들의 경악스러운 외침이 한 박자 늦게 들불처럼 번졌다.
“시체가 일어났다…….”
“리치야. 저건 리치라고!”
마법사가 살아 돌아오면 사람들은 그것을 좀비라고 하지 않고 리치라고 일컫는다. 그렇게 따로 구분 짓는 이유는 그것이 가히 언데드 중의 최강자이자 마법을 사용하는 강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제오늘 언데드란 언데드는 물릴 정도로 봐 왔다곤 해도 관에서 되살아나 걸어 나오는 리치의 모습을 생생하게 목도한 순간 심적인 경계과 적개심은 이미 배가 되었다.
토벌대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리치에게서 물러나 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한곳으로 겨냥했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긴장감과 미세하게 떨리는 금속의 울림으로 사방으로 도배되었다.
“리치라니. 무엄한지고.”
그러나 흘러내리는 천을 어깨너머로 휙 넘기는 시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못마땅함이었다. 연기로 이루어진 얼굴에서 볼을 씰룩거리는 변화가 전달될 정도로 그는 그 단어를 몹시 기분 나빠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신비로움의 왕. 무훈이 넘치는 마법사들의 으뜸. 마나의 법칙을 꿰뚫은 현자이자 마법왕국 이자리스의 군주인 준 발데마르 소네티다.”
연극을 구연하듯 화려하고 우아한 말투로 소개를 마친 리치는 손짓마저도 예사롭지 않아 두른 천 자락의 뒷부분을 마치 로브처럼 팔로 펄럭이는 시늉까지 더했다.
질량이 없는 몸이었기에 천이 그 물리력에 반응하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보는 이들에게, 특히 마법사들에게 또 한 번의 거대한 충격을 가져다주는 데에는 성공했다.
“정말 왕이시라고?”
“발데마르면…… 사자왕이신가?”
대다수의 나라가 그러하듯 이자리스에도 임금의 살아생전의 특징을 담아 사후에 칭호를 붙여 주는 관례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1대 선조의 경우에는 별과 함께 태어났다 하여 성위왕이라는 칭호를, 태리의 아버지로 되어 있는 실리안은 그 용모가 전설처럼 아름다웠다 하여 미려왕이라 칭하는 방식이다.
저 시체를 가리켜 사자왕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싸움을 즐기고 호전적이며 무훈을 가까이하는 호방한 성격의 군주였던 모양. 마법사들의 수군거림에서 리치의 정체를 파악하게 된 태리는 시나리오에 없는 예상 밖의 전개에 점점 더 커다란 혼돈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