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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가 재빨리 음파 화살을 쏘아 추적하자 어둠 속에서부터 갖가지 소리들이 전달되어 나왔다. 즉시 칼을 뽑아 쫓아 들어가며 클로드는 소리로 난투의 흐름을 읽었다.
휘리릭! 카캉!
태리가 로프를 휘감아 빠른 이동을 하고 바로 첫 격돌을 시도했다.
들리는 소리로 예상해 보건대 쳐 내기(parrying) 기술을 쓴 것 같다고 클로드는 짐작했다. 적의 공격이 들어오는 정확한 순간에 맞춰 도끼를 올려치는 치면 흐름이 끊기면서 상대의 자세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치명상을 가한다면 이때가 적격인데―’
탕! 타앙!
그가 머릿속으로 생각을 한 것과 동시에 격발 소리가 연쇄되어 울려 퍼졌다. 작은 뼈가 뚝뚝 끊기는 듯한 파괴음이 덧달아 끌려오는 걸 보면 아마도 총으로 갈빗대를 하나씩 날려 버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대체 어떻게…….’
데스나이트를 처음 상대해 보는 게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공주는 터무니없이 숙달된 솜씨를 타고났다. 그럼에도 어둠을 헤쳐 뛰는 그의 다리에는 속도가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달리면 된다. 싸움이 벌어지는 한복판까지 거의 도달했을 무렵이었다. 별안간 그로부터 장대한 마나가 방출되더니 해일 같은 충격파가 사방으로 훅 퍼져 나갔다.
“으아! 빛이 꺼진다!”
“모두 마나 반동에 대비해!”
그게 얼마나 가공할 만한 수준의 파동이었냐면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빛 덩어리들을 모조리 꺼트려 버렸을 정도였다. 공간이 마법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현상이었는데 주로 마법사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꺼내 쓰면 이런 일이 발생하곤 한다.
전형적으로 자신의 힘 조절을 못 하는 태리의 부작용이었으므로 그로 인해 적어도 클로드는 그녀의 무사함만은 완전히 확인받을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심경을 증명하듯 다시 빛을 만들어 냈을 때엔 사람들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공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클로드가 제일 먼저 달려왔고 뒤이어 이즈가 벽을 튕기며 날아왔다.
“이제 없어요, 전멸.”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며 하는 말은 평온함과 더불어 엉뚱하고 귀엽기까기 하다. 클로드가 어질어질해져 이마를 짚자 이즈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사실을 확인했다.
“혼자 다 때려잡았냐?”
“둘밖에 없어서. 근데 앞으로 더 많이 나오고 더 세질 거야.”
“하. 이게 무예의 신비인가 뭔가 그런 거냐? 몸이 좋으면 머리가 편하구만?”
“사람들도 이제 다 회복됐겠지. 서두르자고 해. 이쪽부터 먼저 밀고 빨리 다른 곳도 다 닦으러 가야 되거든.”
그러거나 말거나. 목표가 분명한 공주는 살벌한 말을 또 아무렇게 않게 하며 일행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짚었다. 심경이 복잡하고 애가 타는 건 그런 그녀를 보는 클로드 하나였다. 다시는 먼저 튀어 나가지 않도록 그가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 * *
최대한 전선을 좁혀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좁아지는 길목에서 본격적인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목표는 달라진 바 없이 전원 척살.
상급 언데드답게 데스나이트는 망자의 언어까지 구사해 가며 침입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창을 찔러 넣었지만 토벌대는 그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고 팽팽한 공방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압도적인 기량을 보이며 영웅처럼 전장을 날아다니는 공주와 기사단장 때문에 도저히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서다.
숱한 밤 사냥의 역사를 거쳐 이미 수없이 합을 맞춰 본 그들이었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사전 연습 한 번 없이 서로의 생각을 읽는 신이 내린 파트너처럼 비쳤다.
거기에 기사단장이 공주의 말을 어찌나 잘 듣는지 그녀가 전략을 명령하는 즉시 그 방법을 학습하는 것 같았다.
“선제공격으로 놀라게 해요! 데스나이트는 대장이 없기 때문에 자신보다 강한 전투력을 보이는 자에게 주춤하는 습성이 있어요. 그걸 이용하는 게 핵심! 좋아요, 아주 잘했어요! 내가 엄호해 줄 테니까 좌측에 있는 놈부터 물어요! 말을 탄 기사는―”
“측면이 약하죠.”
태리의 총알이 데스나이트의 창끝을 밀어 찌르기 공격을 무용지물로 만든 순간, 옆으로 돈 클로드가 단 한 번의 베기로 말과 죽음의 기사를 동시에 갈랐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장면을 목도한 전부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전쟁터에서 얼마나 뒹굴고 오면 저렇게 강해질 수가 있지? 한 번의 참격으로 말과 기수를 동시에 벤다고? 저거 인간 맞나?
심지어 언데드의 몸이 부서질 때 생기는 파편 하나 만들지 않고 완벽하게 단면으로 잘라 내 참수시켰다.
뒤에 있을 태리에게 불결한 뭔가가 튀는 것이 싫었던 모양인데, 그런 배려가 무색하게도 그녀는 그의 뒤를 비슷한 속도로 따라오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머리통을 시원스럽게 터트려 그가 남긴 작업을 최종 마무리했다.
“왜…….”
“마무리!”
뒤처리를 확실하게 했다며 기뻐하는 모습이 세상 해맑았다.
말의 목과 기수의 목. 둘 다 급소를 꿰뚫려 사망한 것을 확인하곤 태리가 물었다.
“이거 더 큰 몸집을 상대로도 가능해요?”
“더 크다면 얼마나?”
“드래곤 정도.”
드래곤이라. 클로드는 짧은 침묵에 들었다가 깔끔한 문장으로 답했다.
“닿는 게 가능하다면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게 된다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아마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든든하다는 미소로 망토 자락을 꼭 쥐는 손길에는 버티지 못하고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검 좀 쓴다고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강제로 주어지는 자리와 역할 때문에 오히려 귀찮은 재능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이 순간 처음으로 그래 왔던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느껴졌다. 사실은 썩 괜찮게 살아온 게 아닌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요.”
“그만 가죠. 제 뒤에 붙어서 오십시오.”
살짝 스치는 일에도 어쩜 저렇게 부끄러워하는지. 태리는 붙어서 오라는 말에 진짜로 옆까지 바짝 따라붙으며 쑥스러워 죽으려고 하는 남자의 얼굴을 고개를 꺾어 빤히 들여다보았다. 이것저것 경험 많은 능숙한 짐승처럼 생겨서는 사실은 접촉에 서툰 사람이라니, 왜인지 그 간격이 재미있어서였다.
그 후부터는 치고 나가는 속도가 날듯이 빨라졌다. 저런 걸 다 어찌 아는가 싶을 정도로 상황과 특성에 맞춰 명확하게 떨어지는 지시와, 그것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히 소화해 내는 전투력의 결합물 때문이었다.
피해가 뒤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방어적인 검술로 막으면서도, 커다란 한 방을 날리는 순간이 오면 손바닥 뒤집히듯 순식간에 공격 일변도로 변하는 클로드의 검술. 그 사이사이에 적의 집중력을 흔들고 자잘한 피해를 중첩시켜 쌓는 태리의 예리한 마탄 사격. 수십 년간의 협력이 몸에 밴 사람들처럼 능숙하다.
간혹 매복 중이던 데스나이트에게 당할 뻔하는 순간이 오면 클로드는 태리를 감싸며 과감히 자신의 등을 내주기도 했다. 그야말로 잘생긴 인간 방패가 되는 것.
다행히도 그때마다 정도를 모르는 태리의 도끼질에 실제로 그의 등이 터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대신 맞아 줄 생각이 만만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크악! 저놈이 자꾸 공주님 옆에 딱 붙어 있어서 우리 자리가 없잖아!”
그리하여 오로지 공주님을 보필하기 위해 토벌에 나선 마법사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게 됐다. 그렇다고 무작정 떼어 내자니 검을 들고 서슬 퍼렇게 설치는 클로드의 기세는 그들에게도 너무나 위압적이다. 물리 공격에 몹시 취약한 이들로서는 섣불리 접근하기가 어려운 존재였다.
“저놈의 개독은 원래 성기사가 아닌가, 성기사! 성직자는 얌전히 주변에서 아군 보호에나 힘쓸 것이지 왜 전방에서 저렇게 설쳐!”
“그러니까 정확하게 적군을 개박살 내서 아군을 보호하고 계시지 않은가. 우리 단장은 원래 저런 사람이니 불만 가지지 마라.”
“뭣이!”
비난을 내비치는 건 마법사들이었고 그걸 받아치듯 변호하는 쪽은 기사들이다. 그들은 서로가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같은 편이 되어 활약하고 있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어색한 협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직업적 특성과 훈련에 따라 앞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공격들을 막으며 몸이 약한 마법사들을 지켜 낸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더라도 몸에 밴 기사도 정신 때문에 도망치지도 않았고 필요한 때마다 대규모 신성 기적마저 펼쳐 냈다.
“악의 무리를 빛으로 인도하라!”
그러면 욕을 하면서도 마법사들은 그들의 방어에 맞춰 쉬지 않고 뒤에서 적재적소의 마법을 퍼부었다. 칼날 바람이 날아오고 땅에서 불이 솟고 주변이 얼며 때때로 적을 재우거나 나무나 돌 따위로 변이시켜 버리는 화려한 마법들이 작렬하며 적을 섬멸해 갔다.
한 기사가 위험에 빠져 고립되었을 때에는 그를 구출하기 위해 수십 명의 언데드를 모조리 공중으로 띄워 버리는 대형 에어본(airbone) 마법을 사용해 주기도 했다.
“이번 것은 진심으로 고맙……”
“필요 없다. 딱히 너흴 위해서 그런 게 아니니.”
“그래도 감사 인사는 받아라. 목숨을 빚진 전우에게 기사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
“닭살 돋게 뭔 놈의 전우야. 구할 만했으니 구한 거지. 득이 없었다면 버렸어.”
함께 싸우고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간격이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법사들은 기사라는 족속을 ‘무언가 가망성이 있는 존재’로 아주 약간 생각을 전환하기는 한 상태였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친구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지나가는 아군 병사 1, 2, 3 정도로 여겨 줄 수는 있는 정도로. 지나가는 악당에서 지나가는 행인을 거쳐 지나가는 아군 병사까지 왔으면 장족의 발전이다.
그도 그럴 게 기사들과 함께하면 모든 부담을 혼자 지지 않아도 되었다. 수비에 불필요한 마나를 소모하지 않아도 되고 급습당할 걱정을 할 필요도 없다. 공격에만 집중하며 긴 시간을 주문을 외는 데에 소비해도 되니 전투력은 자연스럽게 증강되었다.
기사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라 자기들끼리 무리하게 결정타를 넣는 대신 후방의 마법 지원을 믿고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 체급 차이가 나는 데스나이트를 상대로도 싸움이 너끈한 이유였다.
그리고 태리와 클로드가 그랬던 것처럼 손발을 맞춰 나갈수록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효율은 향상된다. 옥신거리느라 기어가듯 출발했던 속도는 점차 탄력을 받아 종내엔 내달리는 수준이 되었다.
그쯤 되니 이제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앙숙으로 태어났다는 게 아까울 정도로 마법사와 기사의 조합은 끝내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