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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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잠시 둘 사이에 실랑이가 있는 것 같았다. 살짝씩 들리는 말이 그랬다. 왜 여기 있냐 가서 편히 자라, 안 졸리니까 당신이야말로 들어가라, 싫다 못 들어간다, 나도 싫다 절대 안 갈 거다……. 

꿍얼꿍얼 주고받던 끝에 두 남녀가 내린 결정은 그럼 먼저 버티지 못하고 졸려하는 사람이 들어가기로 한 것이었다. 담요를 애벌레처럼 두른 공주가 꾸물대며 기어 나와 클로드의 옆에 붙어 앉았다.

눈싸움을 하며 서로 빨리 네가 먼저 자라고 다투던 둘은 시간이 지나니 적당히 포기하곤, 담요를 어깨 위로 나눠 덮은 채 도란도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기사는 공주를 지키고, 공주는 자신을 지키는 그 기사의 옆에 기대앉는 방식으로.

그 사이엔 도무지 끼어들 자리란 게 없어서,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그런 둘을 구경하던 기사들이 저들끼리 재미있다며 속닥거렸다.

“봐, 우리 단장은 또 우릴 잊었지. 내 말 맞지?”

“즐기시게 놔둬. 저렇게 좋아하시는 모습 다들 처음 보는 거잖아.”

“요즘 들어 제가 모셔 왔던 단장이 맞나 싶어요. 술 먹고 후줄근한 차림으로 돌아오질 않나, 몸을 던져서 공주님을 구하는 참된 기사가 되질 않나. 전 진짜 여자를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신께서 천상의 능력을 하사하신 대신 그런 부분을 제거하셨구나 싶었는데…….”

“그건 그래. 그런 쪽으로는 도통 관심이 없었지, 우리 단장이. 남성으로서의 기능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다들 얼마나 걱정을 했다고.”

“그런데 그냥 관심을 쏟을 만한 분을 만나지 못해서 그랬던 거네요.”

한마디씩 꺼내 놓으니 대강 의견이 그랬다. 단장이 지금 저렇게 남자다운데 뭐가 대수냐. 버려진 게 서운해도 이건 우리가 이해해 줘야 한다. 우리가 힘내 줘야 한다. 단장에게 찾아온 평생의 애틋함을 엘프에게 뺏기도록 놔둘 수도 없으니 나름 기사단의 사활이 걸린 일이었다.

다만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

“손은 잡았잖아?”

“당연하지.”

“안아 주기도 할 거고.”

“호텔에서 자고 오신 거 모르냐!”

“선물도 할 거고.”

“수시로 할걸. 수시로.”

“자주 만나잖아?”

“뭐, 거의 매일?”

“마음도 전하셨겠지?”

“아까 우리 단장 목소리 세상에서 제일 크던데.”

“그런데 연인인가?”

“어어…… 글쎄?”

막힘없었던 질문이 끊기며 다 같이 물음표가 동동동 떴다.

왜지, 대체 왜지. 안아 주기도 하고, 같이 자기도(?) 하고, 매일 만나고, 애틋해서 죽으려고 하고 막 할 거 다 했는데 어째서 연인이 아닌 거지.

기사들은 의문이 물방울처럼 박힌 눈으로 다시금 텐트 앞을 바라보았다. 뭘 그리 할 말이 많은지 한참이나 소곤거리던 두 사람 사이에 어느새 말소리가 사그라져 있었다. 하품을 하면서도 그리 버티고, 버티더니 하루가 고되었던 공주의 머리가 먼저 톡 떨어져 클로드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게 보였다.

한쪽 어깨를 내준 상태로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굳어 있는 얼간이의 등짝을 보곤 모두가 소리 없이 배꼽을 잡는다. 저렇게 뚜렷하게 티가 나서야. 두고두고 놀려 먹을 거리를 얻은 기사들이 쉬쉬하며 약속이라도 한 듯 반경에서 한 발, 두 발 물러나 주었다.

희끄무레한 유령들이 뱅글뱅글 도는 텐트 앞에는 그리하여 오롯이 공주와 기사만이 남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굵은 목울대가 소리 없이 출렁거렸다.

‘간지러워…….’

말썽꾸러기 유령들이 일으킨 바람에 태리의 긴 머리칼이 클로드의 어깨를 타고 가슴 앞으로 흘러내려 살랑거린다. 실 가닥 같은 금발이 살결을 간질이는 감각에 그는 입술을 깨물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긴장할 만한 일인가 싶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잡아서 치우면 될 텐데.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기까지 머릿속에는 많은 번민과 고뇌가 스친다. 감히 손을 대도 되는지, 내가 그래도 되는지, 그러다가 깨우기라도 하면 어쩌나.

“…….”

떨리는 손끝으로 홀로 허공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지며 연습을 거친 뒤에야 그는 겨우 가느다란 머리카락의 끝을 조심히 쥐어 보게 되었다.

무심코 결을 따라 매만지다가 녹을 듯이 부드러운 감촉에 몸을 떨고 만다.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꽂아 넘겨 줄 때에는 뺨을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에 오랫동안 숨 쉬는 것을 잊었다.

그마저도 오래 머무르진 못해서 별빛이 고인 긴 속눈썹과 투명한 피부까지만을 훔쳐보고는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왔다. 심장이 요동을 쳐서 다른 걸 훔쳐볼 수도 없다. 떨림이 남은 손은 재빨리 아래로 숨겨 감췄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거는 병이 아닐까. 그녀를 조금씩 만질 때마다 피가 바싹 졸아들 거 같은데 그런 감정이 지나치게 황홀하면서도 가슴 안쪽이 떨려 죽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호흡이 제대로 되지를 않아 자꾸만 짐승처럼 숨을 쉬게 되는 게 너무 고통스럽다.

경험이 없어서 무지하다고 하기엔 이건 정도가 과한 것 같았다.

그는 고르게 오르내리는 숨결에 맞춰 어깨의 높이를 맞춰 주고 담요의 전부를 양보하며 살뜰히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이미 깊은 잠속에 떨어진 공주는 풀 냄새에 섞인 그의 익숙한 향기를 맡으며 갓난아이처럼 더운 숨을 색색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클로드의 눈빛이 다시금 탁해졌지만 또 한 번 손을 댈 엄두는 차마 내지 못하고 까만 하늘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뜬눈으로 지새울 것이 분명한 밤이었다.

* * *

왕가의 정원 중앙에 위치한 마법사 왕들의 묘지는 겉보기엔 매우 작고 아담한 편이었다. 만약 그것을 왕묘라고 사전에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그저 대리석으로 빚어진 예쁜 육각 정자라고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보기에만 그러할 뿐 실제로 그것은 지하 묘지로 통하는 포털의 입구로, 출입하는 순간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몸이 추락하는 소름 끼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대대손손 던전식 구조를 좋아하는 마법사들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었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겐 이 첫 단계부터가 난관이라, 어두컴컴한 공간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수십 명의 비명 소리가 지하 공동에 울려 퍼졌다.

아직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갑작스러운 추락과 사라져 버린 빛만으로도 군중에 공포가 덮쳤다. 지하 묘지, 그것도 마법사 왕들의 던전 무덤이란 단순한 흉가 체험 정도가 아닌 것. 그걸 버티지 못한 이들이 들어오길 거부하면서 토벌대의 인원도 상당수 줄어 버렸다.

“귀신이고 뭐고 간에 청소는 제대로 된 거냐? 더러워서 싫다!”

거기에 정리란 게 뭔지 모르는 이즈마저도 학을 뗐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쌓인 돌 부스러기와 먼지, 거미줄이 수북해서 애써 들어온 사람들마저도 질색하게 만들었다.

이러다가 다 도망가 버리면 어쩌나 싶어 태리는 마법사들을 불러 모아 서둘러 어둠부터 몰아내도록 지시했다.

“우선 빛을 크게 밝혀요. 언데드에게 어둠으로 힘을 실어 줘선 안 되니까요.”

악령들에게 빛은 가장 기본에 가까운 초식 방어다. 빛이 가까이에 없으면 그들은 사람에게 혼란이나, 공포 같은 각종 심리적인 디버프 스킬을 건다. 그걸 모르고 횃불에 쓸 돈을 아꼈다가 여러 번 죽은 전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당장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명의 마법사가 주문과 함께 지팡이를 움직이자 소환된 빛 덩어리들이 범위 내의 공간을 훤히 밝혔다.

기름과 같은 연료 없이 마나로만 소진되는 힘. 그 신비로움 앞에 대다수가 감탄하는 사이 클로드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이렇게 환하게 밝혀도 되겠습니까. 방어막이라곤 해도 적들에게 위치를 노출하는 일이 될 겁니다.”

“그렇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쉽게 알아차리고 공격하러 올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편하고 좋잖아요. 알아서 올 테니 귀찮게 찾아다닐 필요 없어요.”

“또, 또.”

“왜에, 뭐가.”

“또 그런다, 또.”

클로드가 구부러진 눈썹으로 잔소리를 왕창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태리는 그것보단 저기에 집중하라며 통로 저편의 어둠 속을 콕콕 가리켰다.

위치를 드러내기 무섭게 돌바닥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귓전을 강타하더니, 마법사들의 빛을 일부분 잡아먹으며 죽음의 기사들이 반대편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설마 데스나이트?”

“벌써?”

첫 시작부터 암흑의 오러를 두른 데스나이트의 등장. 토벌단은 급하게 전열을 갖추면서도 상당수가 겁을 먹었다.

‘과연. 이 부분도 똑같네.’

초입부터 언데드계 최상위 몬스터를 보내 ‘자, 힘내서 한번 해 볼까?’ 하는 도전자의 희망을 가차 없이 짓밟는 배치 설정. 결코 호락호락하게 지름길을 뚫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개발진의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라고 게임을 할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검은 연기로 빚어진 입술 사이로 망자의 숨이 뿜어져 나오자 담력이 약한 사람들은 한순간에 팔다리가 얼어붙었다. 성기사들이 나서서 급하게 성역을 선포하는 기도를 시도했지만 일단 망령의 공포에 사로잡혔으면 얼마간은 움직일 수 없다. 전투 불능의 상태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데스나이트의 공격 패턴은 망자의 숨을 뱉은 뒤 검은 회오리로 포박하는 기술이다. 공포에 이어서 포박까지 연이어 당하면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곧바로 YOU DIED. 그러니 다른 이들이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면 먼저 쳐야 했다.

‘정면으로 둘. 벽 쪽에서 잠복하고 있는 게 셋. 계단 밑에서 올라올 무리가 다섯. 점점 더 많이 나올 거야.’

그나마 다행인 점은 등장에 시간 차를 둔다는 점이다. 때문에 정면에서 기다리고 있는 저 두 마리는 반드시 급습으로 때려 눕혀야 했다.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숫자가 될 테니까.

‘옆을 잡으면 무조건 크리티컬이야.’

‘마법사는 전략 병기, 마법사는 전략 병기’를 속으로 외치며 태리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홀로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급해서 먼저 갈게요, 돌격!”

“아니, 기다려! 누가 당신 혼자 돌격이야!”

클로드의 창백한 절규가 한발 늦게 뒤따라왔지만 블링크를 사용해 짧은 거리를 점멸하며 돌진하는 공주의 움직임은 그조차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신출귀몰했다. 거기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니 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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