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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다 같이 한뜻으로 모인 거야. 서로 협동해서 헤쳐 나가기로 약속도 끝난 거고. 그런데 너 혼자 자꾸 이렇게 분란을 만들면 난 널 돌려보낼 수밖에 없어.”
“치잇.”
다른 사람이 얘기할 땐 콧방귀도 안 뀌더니 그래도 공주님이 타이르니 말이 귓등에라도 살짝 닿은 듯싶었다.
태리가 대충이라도 사과하라고 눈짓을 주자 못난이 같은 입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그걸 다시 ‘빨리!’ 하는 입 모양으로 재촉하니 브리짓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으으, 나이를 스물넷이나 먹고 사과 안 하는 것도 좀스럽고!”
“그래. 잘 알고 있네, 어서.”
“알았어, 알았다고.”
마지못해 등 떠밀려 하는 사과.
“미, 미, 미, 미!”
그러나 그 한 글자에서 그녀는 무려 5분을 더듬거렸다.
대체 얼마나 하기 싫으면 저러는 건지. 미안해, 세 글자만 던지고 끝내면 될걸. 입술에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말을 잇지를 못 한다.
“미, 미, 미이……!”
“됐으니 그만두지.”
“그래, 너 그냥 하지 마라. 이건 받아도 기분이 더러워. 어금니를 그렇게 씹고 있는데 그다음 소리가 나오겠냐. 이빨 다 깨지겠네, 다 깨지겠어.”
“미!”
“됐다고.”
“하지 말라고.”
“미…… 미, 미친놈들아 너네가 빨랑 안 죽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됐다. 서로가 서로를 인격 장애로 여기며 저걸 빨리 죽여 없애야 하는데…… 하고 눈싸움을 벌이는 평소의 원상태로 회귀.
이즈는 달군 꼬챙이로 푹푹 브리짓을 쑤셨고, 브리는 그걸 요리조리 피하면서 들고 온 주스에 절인 살무사 독을 콰르르 따라 부었다. 클로드는 행여나 그것이 튀길까 팔로 태리의 몸 쪽을 막아 주며 점잖은 척을 했지만 발로는 불씨를 야무지게 차고 있었다.
내일은 진짜 셋이서 힘을 합쳐야 할 텐데. 이렇게 사이가 안 좋아서 될지 모르겠다. 태리가 피곤한 눈꺼풀을 감으며 엉덩이를 뒤로 쭉 밀어 그 틈에서 빠졌다.
그런데 왁자지껄함으로부터 멀어졌던 그 짧은 순간 가시 같은 말 한마디가 어둠 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공주만 신나셨군. 아니, 애초에 망치긴 자기 부모가 다 망쳐 놓고 왜 수습은 애먼 사람들이랑 같이 하는 거야? 젠장, 마법 군단인지 기사단인지 양쪽한테 다 밀려서 난 오늘 수확도 별로 못 올렸다고.”
“……!”
세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누군지도 모른다. 멀리 타국에서 와 참가하게 된 모험가나 용병들 중의 하나인 것 같았다. 애초에 태리에게 티끌만 한 애정조차 있을 리가 없는.
아마도 시끄러운 말싸움에 묻혀 안 들릴 거라고 여기고 맘대로 떠들었겠지만, 그 속에서 잠깐 빠져나온 순간 그만 원치 않게도 들어 버렸다.
불가 앞에서 뭉근하게 풀렸던 마음이 단번에 차게 식었다.
그래, 아무리 애를 써도 모든 사람들이 내게 호의적일 수는 없겠지. 정의감과 명예욕에 참여했다가도 막상 몸으로 겪은 고단함에 도리어 분함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이해해야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일도 있는 거다.
그걸 아는데도, 순간적으로 두 손을 꽉 모아 쥐게 되고 눈썹이 내려앉고, 어깨가 처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동시에 세 사람의 드잡이질도 멈췄다. 청력이 압도적인 이즈 또한 들었으니까. 제 귀에 잡힌 그것을 나머지 둘에게 전한 그는 심지어 그 출처를 정확하게 눈으로 지목하기까지 했다.
클로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그 분노를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긴 건 브리짓이었다.
들소처럼 우다다닥 튕겨 나간 그녀는 독이 든 주스를 그대로 들고 가 놈들이 조리하던 음식에 콱 부어 버렸다. 보글보글 끓고 있던 항아리 안의 내용물이 시꺼먼 색이 되었다.
“으악! 이게 무슨 짓이냐!”
“그거 다 처먹고 너희들도 신나는지 안 신나는지 잘 살펴봐라, 아침저녁으로! 그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다면 말이지!”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한결같이 돌격적일 수가.
평생 거리낄 것 없이 하고픈 대로 다 하고 살았다 자부했던 이즈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한낱 미미한 찻집 주인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클로드의 대우도 다르지 않았다. 금의환향하듯 귀환한 브리짓의 자리를 손수 먼지를 털어 깨끗이 정돈해 준다.
그 위풍당당한 여자사나이의 기백이 너무나 높고 푸르러서. 배신당했던 기억조차도 망각하게 되었다.
브리짓은 돌아오자마자 움츠려 있는 태리의 등을 철썩 때려 허리를 펴게 했다.
“보기 싫게 뭘 그러고 있어. 저깟 얘기에 휘둘리지 말고 뻔뻔해지란 말이야.”
“아, 아야. 아파.”
“그래, 인마. 난 너처럼 욕먹을 부모도 없는데.”
위로에 서투른 이즈도 은근슬쩍 얹어 가듯 거들었다. 하지만 그 말에 태리의 눈은 다시금 갈쌍해졌다.
“나도…… 혼자야.”
엄마는 자신을 구하려다가 뒤집어진 자동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아빠는 원체 몸이 아팠던 사람이라 오래 살지를 못했다. 일찍 여의게 된 부모 대신 할머니가 키워 주긴 했지만 홀로 남겨진 손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건 생각하지 않고 살려고 무던히 발버둥 치면서 살았는데. 하지만 때때로 그런 것들이 불쑥불쑥 치미는 순간들이 있다.
꼭 지금처럼. 시려진 코끝을 비비며 태리가 약간 뜨거워진 눈시울을 끔뻑거렸다.
‘……아, 실수했다. 잘못 얘기했네. 이게 아닌데.’
‘야, 이 엘프 놈아????’
졸지에 양심통에 시달리게 된 이즈와 브리짓은 이제 어쩔 거냐며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다가 허겁지겁 뒷수습에 나섰다.
“나, 나, 난 부모님이랑 사이 되게 안 좋아! 연락도 잘 안 하고! 그래서 너도 알지? 안시 이모랑 더 친한 거!”
“내 부모는 숙부의 손에 목이 날아가서 없다.”
그러더니 동시에 클로드를 쳐다본다. 손 놓고 있지 말고 너도 뭐라도 해 보라는 압박이었지만 클로드는 태리의 작은 어깨를 토닥토닥하다가 당황했다.
아니, 실수는 지들이 하고 내가 뭐라고 말해야 되는 건데.
“내 부모님은 모두…… 잘 살아 계시는데.”
“아후.”
“눈치가 아주 다 나가 뒤지셨네.”
아니, 그럼 멀쩡히 잘 계시는 분들을 죽은 걸로 위장이라도 하라는 소린가. 얼마나 건강하고 금슬도 좋은 부부이신데.
차마 거짓으로도 부모를 죽일 수가 없어서 그는 더듬더듬 자신만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래도……. 그래도 난 좋아합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공주님이 어떻대도…….”
“고백 중독에 걸렸나. 이제 뻑하면 이러네.”
“상황에 좀 맞는 말을 하면 안 될까?”
이런 개자식들이 다 있나. 도우라고 압박을 넣을 땐 언제고.
훼방을 놓는 방해꾼들 때문에 주먹이 쥐어졌지만 촉촉하게 젖어 가던 예쁜 별빛 눈동자는 어느새 그를 향해 있었다.
햇빛에 사르르 녹는 얼음처럼 주먹 안에 힘이 풀렸다. 그러면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이루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그녀에게 제일 많이, 제일 크게 고백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영원히.
“나는 당신이 좋은데요.”
“나도.”
“나도!”
“……끼어들지 마라.”
“나도야.”
“나도라고!”
“나도 나도.”
“나도!”
“이 망할 자식들이…….”
클로드가 하지 말라고, 그거 내 거라고. 내 거 뺏지 말라고 불씨를 발로 차고 짜증을 내고 성질을 부렸지만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잡은 두 사람은 ‘나도 나도’를 울부짖는 앵무새가 되었다.
서로 경쟁처럼 나불대던 도중에 브리짓이 문득 태리의 두 손을 잡았다.
“과거는 망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네 손에 있어. 그리고 지금의 넌 우리의 공주님으로 그 과거를 수습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불행한 과거란 건 진짜 평범한 거야. 남들도 하나씩은 다 있는 거야. 굴곡 없이 탄탄대로를 밟아 온 저 총독이 재수 없는 거지.”
“나도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몇 번을 말했나.”
“웃기지 마, 이 매국노야!”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인데 내가 왜 매국, 아니, 그리고 그것보다 그 손 좀 적당히 조물닥대!”
그만 만져!
파리 쫓아내듯 떼어 대는 클로드의 가쁜 방해에 브리짓이 별꼴이라며 꽥꽥거리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게 어찌나 소란스러운지 더 이상 주변의 말소리라곤 조금도 들리지 않을 만큼 컸다. 그럼에도 태리는 시끄럽기보다는 다정함을 느낀다.
젖었던 눈가조차 불 앞에 바싹 말라 가는 이 밤에, 친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다정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는 동료들 때문에 울적했던 기분은 말끔히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팔짱을 끼고 있던 이즈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머리를 털며 쾌청한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어떻게든 아껴 주지 못 해서 안달 난 모습이라니. 보는 재미가 있어서 죽겠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그 틈에 껴 있자니 까닭 없이 즐거운 기분도 들고. 무엇보다 가슴 안쪽이 두근두근해서 흥분이 된다.
‘이거 뭔데 이렇게 좋냐. 오늘 미쳤네.’
계속 쭉 느끼고 있었지만 이 공주, 정말 모두에게 끔찍이도 사랑받고 있지 않은가.
어떠한 존재를 이토록 사랑하는 기분이라. 시원스러운 미소를 그린 그가 태리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거 봐, 공주. 내가 아까 했던 말 말이야. 그거 수정한다.”
“뭘?”
“친해지는 거 그거 하지 말자. 보니까 지금 대세가 이런데 그딴 애들 소꿉장난 같은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
너와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지. 하지만 이제 보니 고민할 거리도 아니다. 애초에 그쪽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다.
태리가 갸웃하기 무섭게 흐드러지게 피는 꽃가지처럼 눈가가 곱게 휘어지더니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나도 같이 너 사랑해줄까?”
황홀하게 깊어진 입꼬리 앞에서 태리는 얼굴이 희게 질려서 끅! 하고 딸꾹질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양옆에 있던 두 사람의 불주먹이 이즈의 머리통을 한 대씩 쥐어박는다.
인간에게 맞고 지랄을 떠는 고귀한 엘프의 목소리가 묘지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내가 누굴 사랑해 주든 말든!”
너희들도 다 하는 걸 왜 나는 못 해?!
* * *
하나둘 잠자리에 들어 불빛이 잦아들 무렵, 묘지에서의 그 밤에는 나이트메어가 토벌대의 꿈자리에 찾아들었다.
머리맡을 빙글빙글 돌며 장난을 치는 유령들은 언데드라 부를 정도로 강하지도 해롭지도 않았지만, 잠든 사람의 꿈자리를 사납게 만들 수는 있었다. 그렇다 해도 정신력이 강한 사람의 꿈속엔 파고들 수 없어서 사람들은 적당히 무시하고 취침에 든다.
그럼에도 클로드는 굳이 자리를 떨치고 나가 검 한 자루를 팔 안에 낀 채 공주의 텐트 입구 앞에 기대앉았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면서도 불침번을 서던 다른 기사들까지 그를 따라와 주변 경계를 서자, 번잡함을 알아챈 공주가 텐트 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가 늑대처럼 커다란 남자의 등을 발견하곤 찰싹 손바닥을 내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