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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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던 게 그 인물이 자신의 접근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기 때문. 감추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도 본인의 존재감을 마구마구 뽐내서 태리의 반가움은 배가 되었다. 

‘아, 왔다!’

클로드다. 못 올 줄 알았기에 그의 방문은 더더욱 깜짝 선물처럼 느껴졌다. 입을 가렸던 손을 떼고 그녀가 반갑게 붕붕 흔들자 일자로 고정되어 있던 입술이 슬그머니 말려 올려갔다.

잠깐 이즈와 눈이 마주쳤을 때 ‘배신자2’라는 글자가 섬뜩하게 맺히는 것도 같았지만 금방 사라졌고, 맡겨 놓은 자리를 찾아가듯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선 들고 온 빵 바구니를 품 안에 안겨 주기에 더 바빴다.

버터와 소시지, 토마토소스를 넣어 구운 향긋한 빵 냄새가 전해졌다.

“조금 늦었습니다. 몇 가지 정리를 하고 오느라.”

“늦긴. 난 당연히 못 올 줄 알았는데.”

“못 오긴. 내가 와야지.”

못 오긴 내가 왜 못 오냐며, 못 갈 데가 어디 있냐며, 전혀 배고프지 않은 태리의 속사정도 모르고 클로드는 따끈따끈한 빵을 입에 물려 준다. 태리는 망설이다가 거절하지 못하고 베어 먹었다.

“근데 어떻게 들어왔어요? 우리 마법사들이 막 방해하고 그러지 않아요?”

총독에 대한 무한한 적개심을 가진 마법사들이 쉬이 출입을 허용할 리가 없었을 터. 아니나 다를까, 좁혀지는 미간 속에 이곳에 오기까지의 수난이 살짝 엿보이는가 싶더니 그가 빵 바구니를 턱짓했다.

“만날 때마다 이걸 하나씩 뺏겼습니다. 통행료로. 맛이 괜찮아서 다행이긴 했는데…….”

“원래는 얼마만큼 있었는데요?”

“이만큼.”

한참 높은 위치까지 손을 들어 보이는 게 많이도 뺏겼다는 생각과 함께 뭘 저렇게 수북하게도 쌓아 왔는가 하는 웃음마저 났다.

입맛에 맞는지 눈으로 묻는 질문에 태리는 냠냠 씹으며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걸 물끄러미 지켜보는 클로드는 그녀가 흘린 소스나 부스러기 같은 것들을 옆에서 손수건으로 닦아 주고 훔쳐 준다.

한 사람은 야금야금 먹어 치우고 다른 사람은 그걸 빤히 쳐다보는 관계.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코앞에서 그걸 관찰한 이즈는 한입거리의 파랑새를 애지중지 돌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늑대 같은 모습에 헛웃음을 쳤다.

저 새끼, 아까 낮에도 공주가 위험할 것 같으니까 저 끝에서부터 득달같이 달려왔었지.

둘 사이는 상당히 친밀해 보인다. 챙기는 데 거리낌도 없고 챙김을 받는 데도 어색함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는 이제 좀 친해져 볼까 막 걸음마를 떼는 단계인데. 그 점이 묘하게 분했다.

“어이, 총독. 너 얘 안 좋아한다며?”

“……!”

“……?!”

그래서 그랬다.

마치 ‘안녕? 오늘은 날씨가 좋네?’ 하고 인사하듯이 꺼내기 힘든 말을 쉽고 가볍게 꺼내선 이즈는 클로드의 면상을 향해 강속구로 집어 던졌다.

육식주의자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맞아 흠칫한 손이 제일 먼저 들고 있던 손수건을 떨어트리고, 냠냠 바쁘게 움직이던 태리의 턱 관절도 얼음처럼 굳는다.

입 안에 있던 것을 꿀꺽 삼킨 태리가 고개를 홱 돌리며 클로드를 째려보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러려고 의도한 것도 아니었는데 진실을 캐묻는 말투 또한 뾰족하게 서 버렸다.

“뭐야, 그랬어요?”

“아, 아, 아, 아니, 아니…….”

“나 안 좋아한다고 그랬냐구.”

“그런, 적 없…….”

“어, 그랬어. 분명히 그랬다니까. 내가 두 번이나 물어봤는데 두 번 다 절대 아니라고 했어. 엘프는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한다.”

“진짜예요?”

“그런 게 아니라……! 그게 그러니까 예전에! 아주아주 오래전의 일인데……!”

“뭘 오래전이야. 그 정도로 오래 안 됐잖아. 너랑 나랑 같이 호텔 식당 쳐부쉈던 그날이라고. 기억 안 나?”

“기억…….”

난다.

잘 난다, 빌어먹을.

저 인생의 해충 같은 귀쟁이 새끼. 머리카락을 자를 게 아니라 혓바닥을 잘라 줬어야 했다. 클로드는 이를 악물고 이즈를 노려보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의 100을 쏟아서 노력해도 될까 말까 한 짝사랑에 방금 전 귀쟁이가 -500의 치명타를 넣었다.

한껏 통쾌함을 즐기고 있는 예쁘장한 눈 코 입을 향해 클로드는 참지 않고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는 너도 그날―”

그날 두 남자는 서로를 향해 공주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었고 거기에 ‘아니요’를 대답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알려야 한다. 엘프 놈은 분명 인간과 엮이면 내 삶이 얼마나 골치 아파지는지 아느냐, 라며 강하게 호감을 부정했었다.

하지만 신속함은 곧 엘프의 특기라, 클로드가 말을 떼자마자 이즈는 태리의 손목을 확 잡아당기더니 더 커다란 공을 던졌다.

“야, 존나 좋아해.”

그리고 뒤통수를 후려치는 그 신속한 고백에 클로드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무수한 끈들이 한꺼번에 우두두둑 끊어져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건 내가. 내가 먼저…….

욕심이 적었던 삶이라 평생 질투라는 감정을 키우지 않았던 그의 마음속에서 최초로 그 감정이 괴물이 되어 태어난다.

거대한 몸집이 생기고 팔다리가 자라나 주먹을 쥐고 발길질을 시작하자, 질투로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는 기분이 무엇인지 그는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이즈가 앗아 간 손목을 뺏어 온 클로드가 타오르는 눈앞의 불처럼 정제되지 못한 말들을 거칠게 쏟아 냈다.

“그 말은 내가 먼저 했다. 너보다 훨씬 더 전에! 내가 먼저 말했다고!”

좋아한다고. 진짜 좋아한다고. 하면 안 되는 말인 줄 알면서도 했다.

그것이 어렵게 쌓아 온 관계를 망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을 불편해하며 멀리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음에도 차마 기억나지 않는다고 놓을 수도 없었던 말이다.

“네가 뭘 알아. 내가 그때 얼마나……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끼어들어서…… 꺼져라.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말했다!”

때 아닌 언쟁과 불화에 주변에 퍼져 있던 소음이 잦아들고 휘둥그레진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보는 사람들은 저 둘이 왜 싸우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마지막 한 방의 목소리가 정말 정말 커서 그걸 듣고는 다들 앞뒤 사정 없이 아아, 하고 납득을 한다.

‘좋아한다고 말했다, 말했다, 말했다……’가 들판의 메아리가 되어 사방팔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이쯤이면 번화가 한복판에서 목 놓아 우렁차게 소리친 공개 고백 수준. 태리는 얼굴이며 몸까지 새빨개져선 무릎 사이에 얼굴을 쑤셔 박았다.

“이거 진짜 어마어마한 별종 아니야. 그거 좀 뺏겼다고 소문을 동네방네에…… 짝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이런 식으로 치사한 수법 쓰기 있냐? 이런 건 무효야. 무효라고.”

“닥쳐라. 그 목 뜯어 버리기 전에.”

“아오, 목소리도 존나 크네, 진짜.”

활활 뿜어낸 고백의 기세에 이즈가 얼얼한 귀를 누르며 털어 냈다.

주위 상황은 딱 그의 말대로였다. 누가 누구 좋아한다는 얘기는 부채질하지 않아도 알아서 삽시간에 퍼져 나가서 벌써부터 ‘저 파렴치한 자식이!’ 하고 욕을 하는 마법사들의 울화가 섞이고, ‘내 저럴 줄 알았다’며 탄식하는 기사들의 한숨이 자욱하다.

하지만 대다수가 대륙 각지에서 모인 모험가들이라 소문은 이미 그들의 입을 타고 대륙 방방곡곡으로 뻗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 총독이 어느 나라 공주님을 무진장 끔찍하게도 좋아하더라고 전 대륙적으로 박제를 당한 것이다.

못 살아. 내가 못 살아. 얼레리꼴레리 같은 분위기 속에서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는 태리를 구하기 위해 단 한 명의 마법사가 나섰다.

“너희 둘이 문제야. 사건 사고는 늘 남자 놈들이 원인이라고! 둘 다 당장 내 친구 옆에서 나와!”

친구가 몹쓸 짓을 당했을 땐 만사를 제치고라도 나서 줘야 한다는 것이 브리짓의 원칙이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태리에게 줄 생과일주스를 컵에 담아 자리로 찾아왔던 그녀는 살벌한 분위기를 보고도 본인의 짜증을 거침없이 표출했다.

“도대체 얘들은 왜 항상 여기에 있는 거야. 한가하니? 어디로든 좀 사라져. 여기에 네들 자리는 없다는 거 모르나. 내 자리만 있어, 내 자리만!”

그러자 마주 보고 으르렁대던 고개가 동시에 그녀를 향해 돌아가며 비슷한 복수의 눈동자가 타올랐다.

마치 ‘오, 그래. 너 마침 잘 나타났다?’ 같은 의미다. 아까 전에 이들을 미끼로 팔아서 룰루랄라 전쟁터에서 도망을 갔으니 당연한 결과이긴 했지만.

물론 그럼에도 브리짓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뭐, 왜, 뭐. 그런 눈빛으로 배짱 장사를 행했다.

“찻집 자식, 안 그래도 벼르고 있었다. 너 이리 와서 앉아 봐. 아까 무지 잘 도망가더라?”

“쏜살같이 뛰는 모습이 딱 가다가 죽을 팔자였는데. 아쉽게도 무사히 살아서 나가더군. 그리고 또다시 나타나서 날 팼고.”

“그건 네가 바보같이 넋 놓고 있으니까 정신 차리라고 때려 준 거 아니야. 그리고 그건 도망간 게 아니라 전술이라고 하는 거야. 머리 나쁜 녀석들이 영 흐름을 파악할 줄 모르네. 뇌가 쥐똥만 하니?”

적으로 하여금 적을 다스리게 하는 전법이다.

당시의 브리짓은 계획이 다 있었다.

저놈들이 언데드와 피 터지게 싸우다가 사망하면 수고를 덜어서 좋고, 혹 살아남더라도 필히 탈진 상태일 것이므로 그때 놈들의 목숨을 취해 잇속을 챙기면 간단한 작전이란 소리였다.

“여기로 가나, 저기로 가나 결국 최후의 승자는 내가 되는 거지. 셋이서 힘들게 살기보단 둘 희생하고 한 명 편하게 가자 이거야.”

독이 특기인 마법사답게 브리짓의 뻔뻔함은 지독한 수준이었다. 당한 사람이 열 받아서 발열을 일으키고, 혼란을 겪고, 사고가 마비되는 맹독 그 자체. 온갖 악이란 악은 다 묻어 있는데 반성과 자숙을 모른다.

“이런 독초 같은 새끼가 다 있나.”

“인간 말종이로군, 독방구.”

불길에 꼬챙이를 달구는 이즈와 고요히 눈빛을 태우는 클로드를 보곤 태리는 서둘러 하나뿐인 친구를 살리기 위해 나섰다.

클로드라면 몰라도 이즈는 성격상 무엇이라도 실행에 옮길 의지가 다분한 인물이라서. 지금도 내장을 발라 준다느니 뭐니 하며 살벌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브리, 왜 그랬어. 아까는 나도 화내려고 했어.”

“쟤들은 죽어도 마음 안 아프니까. 내 눈엔 다 나쁜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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