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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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좌측에는 마법사들이, 우측에는 기사들이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다른 용사들이 섞여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일부러 이렇게 경계를 나눈 건 아니고 가까이 오기만 하면 눈을 부라리는 마법사들 때문에 기사들이 피하듯 도망친 결과물이다. 

다들 이 편이 싸우지 않고 좋다고 여기는 것 같았지만 덕분에 클로드가 있을 진영과는 멀찍이 떨어져 버렸다.

‘보기 어려우려나.’

건너오기 힘들 누군가를 앉아서 기다리며 그녀는 내일 있을 토벌에 대해 고심했다.

오늘은 적군의 머릿수가 많았던 게 난관이었다면 내일은 만만찮은 실력자들과 겨뤄야 한다는 게 장애물이다. 지하의 왕묘에는 왕의 안식을 지키는 데스나이트와 듀라한이 있고, 그들 모두 상급 언데드에 속한다.

지상에서 겪었던 피해의 그 몇 배 이상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뭇가지를 주워 묘지의 지도를 끼적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불쑥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어 태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클로드?”

“아닌데?”

“아, 이즈.”

“기다린 사람이 아니라서 실망했냐?”

“……어디 갔다 왔어? 중간에 갑자기 사라져서 찾았잖아.”

찾았다는 말에 보기 싫게 올라갔던 엘프의 한쪽 눈썹이 제자리로 내려왔다.

그녀가 멀쩡한지, 다친 데는 없는지 눈으로 휙휙 훑어보며 확인하더니 그가 어깨에 짊어지고 온 커다란 뭔가를 모닥불 위에 바비큐처럼 걸쳐 놓는다. 고기 익는 냄새가 지글지글 끓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이런 걸 잡아 온 거야?”

손질과 양념을 해 막대기에 매달아 놓은 멧돼지였다. 가죽도 벗기고 내장도 들어내서 정육점에서 파는 형태와 거의 흡사했다.

“이렇게 자꾸 육식해도 돼?”

“안 될 이유가 없지. 난 풀때기는 질색이야. 전투 중엔 더더욱.”

태리가 기름이 떨어지는 고기를 가리키며 말하자, 이즈가 뭐 어떠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곤 자기 자리인 듯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아선 고기가 익는 동안 본인의 활을 익숙하게 손질하기 시작했다.

건조해진 활줄에 왁스를 칠해 유연하게 하고, 빳빳한 새 천으로 활대를 촘촘히 감아 보강한다. 더 오래, 더 세게, 더 빠르게 당기기 위해 가죽으로 만든 활 골무를 손가락에 껴 보며 크기를 조절하기도 했다.

왠지 좀 생경한 기분이 들어 태리는 눈을 끔뻑대며 구경했다.

욕하지 않고 입을 꾹 닫은 채로 활을 만지작대는 걸 보니 어디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남신 같았다. 달빛 같은 백금발이 그랬고, 주렴처럼 내려앉은 속눈썹이 그랬으며, 그 사이로 살짝 비치는 초록빛 눈동자가 또 그렇다.

‘구미호 구슬을 넣어 놓은 것 같아.’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창백한 피부와 어울려서 새삼 병약 퇴폐미란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이해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마을에는 이즈의 팬을 자처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그 엉터리 진료소가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는 건 저 도덕책 같은 아름다움이 팔 할 이상은 차지하고 있을 터.

지금보다 욕을 조금만 줄이면 참 좋을 텐데.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며 태리는 불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 갔다.

팔다리가 점점 따뜻해지고 귓속에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백색 소음처럼 깔린 데다가 고기가 익어 가는 냄새까지 솔솔 나니 몸이 나른해졌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꾸벅꾸벅 졸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

활을 수리하고 있던 이즈가 그런 그녀를 힐끗 보더니, 다 익은 고기의 제일 큰 부분을 떼어 꼬챙이에 끼워 주었다.

“먹어. 먹고 자.”

“나 먹으라고 가져온 거야?”

내미는 얼굴이 웃음기 없이 진지해서 특별히 배가 고프지 않았음에도 그냥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본인은 입에 대지 않고 그녀가 조금씩 뜯어 먹는 걸 묵묵히 보더니 또 툭 말을 던졌다.

“잘 싸우더라, 너.”

“그야 언데드의 어디가 약점인지 난 다 아니까.”

그녀는 시작 전에 모두의 앞에서 공언했던 대로 물러서지 않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아서 끈질기게 싸웠다.

체력과 기력이 저하되면 근성과 지구력으로 버티면서 앞을 지켰고, 간혹 물러설 때가 있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눕히고 물러났으며, 자신이 손을 댄 것은 끝까지 책임지고 처치하는 독기를 보였다.

이즈는 솔직히 좀…… 놀랐다.

마물에 대한 지식이 해박해서였다고 말하지만 싸움이란 건 그런 게 아니란 걸 아니까. 그녀에겐 그런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악착같음’이 있었다. 마치 기를 쓰고 매달려서 높은 벽을 넘어가려고 하는 사람처럼.

뭘 위해 노력하는 거지?

빈털터리로 쫄딱 망한 공주가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그런데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그게 아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가장 지도자에 가까웠으며 모두의 신뢰를 한 몸에 지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공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정말 한 마리도 남김없이 쓸어버릴 줄은 몰랐지.”

“열심히 살려고 그러는 거야. 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딴에도 엄청 용쓰고 있는 거라고.”

“그래그래, 다 봤다니까. 광기에 물든 것처럼 열심히 사는 모습.”

“광기가 아니라 최선.”

“그래서 네 최선에 내가 좀 도움이 됐냐? 공주님.”

이마를 콩 때리며 피식하고 웃는 모습이 어쩐 일로 조금 선량해 보여서, 태리는 맞았다는 언짢음보단 웬일이래? 하는 의아함에 더 신경이 쏠렸다.

삐뚤게 살아와서 그렇지 사실 천성은 착하고 순한 엘프이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부탁한 것도 아닌데 오늘은 자원해서 나서 주기도 했지. 여전히 수수께끼투성이지만 전보다는 그를 대하는 게 편안해졌다.

“날 죽인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와서 도와주니까 조금 신기하긴 해.”

그 말에 이즈는 찌푸리며 눈알을 굴리더니 본인이 언제 그런 얘길 했는지 잠깐 더듬어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러곤 ‘아, 그러네, 이거 좀 웃기네.’ 하며 소소하게 공감했다.

“내 입으로 죽이겠다고 한 인간을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려 놓게 될 줄은 나도 몰랐지.”

애초에 네가 우는 걸 보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 시기가 정말 좋지 않았어. 그렇게 가슴 아프게 우는 녀석인 줄은 몰랐지. 아니, 진짜 그럴 줄 누가 알았겠냐고. 찌푸린 눈가 그대로 자조적인 웃음을 살짝 흘렀다.

“딱히 죽는 게 소원인 거 아니면 죽지 말고 그냥 잘 살아라.”

“그런 소원 빈 적도 없고. 네가 멋대로 죽인다고 위협한 거 아니야.”

“그럼 다행이고. 혹시라도 죽고 싶어지더라도…… 일단 살아 봐. 정 뭣하면 상황 봐서 내가 죽여 주든가 할 테니까 괜히 엉뚱한 데 가서 죽거나 하지 말라고. 죽여도 내가 죽여 줄 테니까 다른 것들이 네 몸에 손대게 하지 마.”

그으래…… 아주 끔찍이도 고오맙다. 이 살인마 엘프야…….

태리는 이글이글 눈동자를 태우며 고기를 꼭꼭 씹어 삼켰다. 하긴 애초에 동족 몰살을 목표로 검은숲에 걸려 있는 저주의 비법을 얻기 위해 찾아온 놈이 아니던가. 머릿속이 정상일 리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너 저번에 같이 있던…… 아, 아니다. 됐어.”

“저번에 언제? 누구?”

“됐다고. 나 혼자 더 쑤셔 보고 나중에 다시 말해 줄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말문을 열더니 왜인지 도로 과묵해진다. 다 먹고 남은 꼬챙이를 불쏘시개로 삼으며 태리가 조심히 물었다.

“저기, 있잖아, 숲의 엘프는 숲에 대해 잘 알지?”

“그렇지.”

“여긴 지금 일반적인 숲이랑 비교했을 때 어때? 아, 물론 아직도 황폐하다는 건 알아. 아는데 음…… 예전에 비해선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나…….”

“뭐. 어떤 희망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그냥. 이렇게 다들 애쓰고 있는데 조금이라도 회복이 되고 있긴 한 건가 싶어서.”

“회복이라.”

검은숲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찝찝함을 안기는 숲에 대해 이즈는 야트막하게 되짚어보다가 금세 현실 속으로 빠져나왔다.

좀 나아졌느냐고? 별로 고민할 필요도 없는 답이다.

엘프의 관점에선 여기는 애초에 숲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공간이다. 그냥 야수의 땅이지. 이전 모습이 어땠으리라곤 도무지 짐작도 안 간다.

하지만 그는 평소대로 ‘나아졌겠냐?’ 하는 지나치게 솔직한 답변을 하는 대신 말없이 공주의 동태를 살폈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굴뚝 청소부처럼 자그마하게 몸을 움츠려선 아주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 근심 어린 동그란 얼굴을 내려보다가, 그는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보란 듯이 밤의 숲 공기를 들이마셨다. 탁하고 쾌청하지 못한 기운이 폐부로 밀려들어 왔지만 반대로 입가는 길게 늘어졌다.

“글쎄. 그런 건 모르겠고 오늘 밤공기가 끝장나게 분위기 있다는 건 잘 알겠는데. 장담하는데 오늘 밤에 여러 명 불붙어서 사고 치겠어.”

“그런 거 말고!”

“그런 거 말고 뭐. 나쁘지 않단 얘기잖아. 몬스터 발자국 대신 옆 사람 얼굴을 쳐다볼 수 있을 정도면 살 만하다는 신호 아냐? 적당히 청소했는데도 이 정도면 여기 있는 것들까지 싹 밀고 나면 더 나아진다는 얘기고. 계속 열심히 해 봐. 지금 하는 대로 쭉 하면 뭐라도 될 거 아니야.”

“……그렇겠지?”

“거 믿기 싫으면 관두든가.”

“아니야. 응, 고마워.”

고맙다고 웅얼대는 태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가 금세 다시 힘을 내선 ‘그래, 싹 밀어 버리자!’ 라고 불끈 결심을 다지기에 이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 싶으면서도 낮에 보여 줬던 광전사의 탈을 쓴 마법사라면 왠지 가능할 것도 같았다.

날 좀 무서워하는 것만 아니면 좋겠는데. 불쑥 그런 충동이 치밀었다.

“야.”

“어?”

“너랑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날…… 왜?”

나를 왜? 나랑 왜? 갑자기 왜? 도대체 왜? 이즈에게는 별 뜻 없는 발언이었을지 모르지만 무방비 상태에 있던 태리는 놀라서 먹고 있던 것까지 떨어트릴 뻔했다.

너 같은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나를 왜……라는 한 줄기의 암흑이 뇌리를 스치려는데 순간 그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눈동자가 뒤로 빠지면서 썅, 이라는 굵고 짧은 욕을 중얼거린다.

혹시 내가 마음의 소리를 입으로 낸 건가 싶어서 태리는 읍! 하고 두 손으로 자체 입막음을 했다.

“늦게 나타났으면 하는 것들이 꼭 제일 먼저 온다니까. 그것도 맨날 중요한 순간에.”

앞담화를 던지자마자 태리도 곧 이쪽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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