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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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한 놈도 아니고 두 놈이 다 똑같은 수법으로 모든 것을 그에게 다 떠넘기고 도주했다. 여기 아주 배신자들이 넘쳐 난다. 나만 아니면 된다 이건가.

“이런 배신자들이.”

그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걸을 때마다 달그락대는 스켈레톤의 뼈 소리가 들리고, 부패된 살점을 떨어트리며 다가오는 구울들이 깔렸으며, 피를 맛보고 싶어 하는 레드캡이 땅을 긴다.

“전쟁 같은 삶이로군.”

믿고 함께 싸울 수 있는 아군이 한 명도 없다니.

하지만 잠시만 기다리면 곧 기사단이 온다. 그때까지 버티는 건 할 수 있다. 끝을 볼 때까지 진창으로 싸워 대는 일이야 어차피 능숙한 일이다. 위기 속에서 돋보이는 침착함을 빛내며 그가 다시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내가 애초에 신성력만 쓸 수 있었어도.’

다만 뼈아픈 실책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점이었다. 그럴 수만 있었어도 이렇게 고군분투할 이유도 없고, 태리에게는 더 큰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

평생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치부였지만 그 사실이 오늘만큼 안타까웠던 적은 없었는데.

그런 거친 마음의 발로였는지 클로드는 지금껏 기사로서 할 수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경지를 꺼내 들었다. 검을 감싸고 아지랑이처럼 발산되던 오러가 뭉쳐져 날을 코팅하듯이 감쌌다.

오러 블레이드다!

주변에서 목도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감탄과 경악이 퍼져 나갔다. 그것은 곧 그가 소드 마스터까지 고작 한 걸음만을 남겨 놨을 뿐이라는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클로드는 선망 어린 시선에 우쭐하기는커녕 앞으로 퍼질 소문에 의한 귀찮음만을 걱정했다. 이래서 숨기고 산 건데, 하지만 신성력이 한 톨도 없는 그로선 지금은 힘을 감추며 적당히 싸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전쟁터에선 태어난 투신처럼 그는 맹렬하게 뛰는 심장을 뒤로 밀려드는 적을 베어 넘겼다. 예리함을 담은 공격들이 눈으로 인지하기도 전에 겨냥해 들어갔다.

먼저 중심을 갈라 언데드의 집단 돌격을 깨 버리고,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손톱을 피한 뒤 곧바로 몸을 회전해 전방으로 빠르게 검을 두 번 베어 올린다.

그러면 초승달 형태의 얇은 검기가 날아가면서 경로에 걸리는 모든 적들을 쓸어 넘겼다. 상당한 기력을 소모하는 일일 텐데도 그는 힘과 속도를 유지하며 일격 필살에 가까운 그 공격을 숨 가쁘게 뱉어 냈다.

힘에 부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따로따로 적을 분산시켜 두면 한 번에 덤벼드는 인원을 제한시킬 수 있었다. 운만 따라 준다면 혼자서도 철벽의 수비를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사가 아닌 전사 같은 모습으로 적을 부수고 나아가는 그의 패기에 도와주던 사람들이 도리어 질겁해 물러섰을 때였다.

투견처럼 달리던 그가 어떤 작은 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탕, 탕.

다시 감각을 감고 집중해도 박자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똑같은 탕, 탕, 탕…… 하는 총소리.

그러고 보니 전투가 전보다 수월해졌다. 단순히 느낌만 그런 게 아니라 적의 숫자가 굉장히 빠르게 줄고 있었다.

익숙한 소리, 설마 하는 우려감. 클로드는 고개를 들어 파동의 진원지를 찾아 헤맸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총으로 튕겨 내고 도끼로 찍어 내는 견제와 사냥을 동시에 소화해 내고 있는 공주.

지원을 기다리고 있던 기사에게 그 지옥 같은 길을 뚫고 나타난 건 가냘프고 씩씩한 공주였다.

끊이지 않고 울렸던 총성은 다수를 상대하면서도 절대 거리를 내주지 않기 위한 그녀의 견제술이었다.

클로드의 얼어 있는 눈과 마주치자 곧 ‘구해 줄게!’라고 외치는 예쁜 입 모양이 벙긋거렸다.

어, 어떻게…… 이 적진 한복판까지. 아니, 위험하게 대체 왜…….

‘날 위해서?’

걱정과 설렘이 동시에 교차한 순간 부패한 손톱이 그의 팔뚝 보호대를 스친다. 그것을 회피하며 물러나자 뒤를 노리고 있던 구울 한 마리가 그의 어깨를 물기 위해 달려들었다.

‘클로드!’

태리는 그 즉시 로프 런처를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까지 쏘아 올려 공중으로 한계까지 뛰어오른 뒤, 있는 힘껏 도끼를 그 방향으로 집어 던졌다.

빠각!

간발의 차로 이빨이 닿기 직전에 구울의 머리가 먼저 터졌다. 막강한 힘을 싣고 날아간 도끼는 괴물의 머리통을 부순 뒤 멀리 있는 바위까지 날아가 박혔다.

힘을 숨기고 사는 성기사와 힘을 숨기지 않는 마법사의 경악스러운 조화였다.

하지만 그녀의 체력은 그에 비하면 반의반도 못 미치는 수준. 게다가 타고난 몸에 의해 마력은 금방 채워지지만 바닥난 체력은 쉽사리 복구가 안 된다.

그러니 태리의 착지는 당연히 매끄럽지 못했다. 흙바닥으로 심하게 굴러떨어지며 온몸을 두들기는 통증과 함께 근육이 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너무 아파. 두 번은 못 할 것 같은데.’

뛰어오는 클로드를 보며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지만 턱 끝까지 찬 숨 때문에 호흡이 꼴딱꼴딱 넘어간다.

하지만 그를 구하게 돼서 너무 기뻤다. 저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제게 달려오는 그를 보니 후회 같은 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얗게 탈색된 얼굴로 클로드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손을 벌벌 떨었다.

“침착해요. 난 괜찮으니까.”

얼빠진 표정과 땀 때문에 흐트러진 머리가 이 와중에도 귀엽게 느껴져서 뺨을 콕 찔러 보게 된다. 그러자 뒤늦게 정신이 든 것처럼 그가 서서히 눈동자에 초점을 찾으며 화를 냈다.

“뭐 하는 겁니까. 전장에서 무기를 버려? 그건 최후의 순간에나 하는 짓이야! 죽고 싶어?!”

이렇게 화낼 줄 알았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걸. 많이 놀랐을 거야 알지만…….

“나한테는 당신을 살리는 게 언제나 최후의 순간일 거야.”

널 살려야…… 그래야만, 나는 그래야만 돼.

네가 주인공이니까, 네가 이 세계를 구해 줄 거니까, 네가 엔딩을 이루어 줄 거고, 그래서 난……

‘그렇지 않아도 구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아도 뛰어들었을 거야. 두서없이 섞이는 마음속의 이야기들을 말하지 못하고 태리는 다시금 밀려드는 언데드의 파도를 향해 총을 쏴 주저앉혔다.

빈손 대신 굵은 나뭇가지를 뚝 분질러 도끼 대용으로 들고 일어섰고, 잠시 가까워졌던 둘 사이는 그렇게 순식간에 몰려든 언데드로 인해 가로막혔다.

클로드 역시 기계처럼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전과 달리 팔에 기세가 사라졌다.

싸우고 있는데도 헤픈 웃음을 실실 흘리고 불에 덴 것처럼 양쪽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심지어는 무슨 망상까지 하는 건지 혼잣말도 중얼거렸다.

희망이 있는 거 아닐까, 아니면 그냥 내 착각인가, 날 조금은 좋아해 주는 것 같은데, 아니면 혹시 동정? 내가 약해 보여서?

아니, 동정이라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날…… 싫어하지 않아.”

그녀는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왜 다들 안 된다고 하는지. 어째서 그녀가 제게 마음을 주기 쉽지 않은지 그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침략국의 총독과 마지막 공주가 이어진다는 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

태리가 거부하고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관계였다. 조르지도 못하고 매달리지도 못한다. 애초에 그녀가 제안한 계약이 아니었으면 이만큼 접근할 수 있는 길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더 진전된 관계를 원하는 건 저만을 위한 욕심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참아야 하는 거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하고 만족해야 하는 거라고.

그런데 욕심을 부려도 된다면? 조금이라도 그녀가 마음을 열어 준다면?

작은 불씨를 본 것만으로도 불판 위에 선 것처럼 전신이 달아올랐다. 동작이 흐트러져 헛방질을 했는데도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 조금이라도 허락해 준다면…….’

퍼억!

그러나 이곳은 전장의 한복판. 사방에서 위험이 몰아닥치고 비열한 수법으로 도망쳤던 배신자가 다시 등장하기도 하는 곳이다.

정신이 몽롱해 보이는 그를 발견한 브리짓이 기회를 노리고 돌아와 그의 명치에 시원한 펀치를 박아 넣었다.

“하, 어떠냐! 내가 이런 순간을 노렸지!”

철천지원수에게 죽빵을 날리는 꿈을 현실로 실현한 독립투사. 미쳤다, 난 최고다. 그녀는 입이 찢어지게 벌어져선 근육으로 다져진 복근에 신나게 주먹을 갈기며 웃었다.

“역시 이런 손맛은 마법은 가져다주질 못해! 어때, 아프지? 아파 죽겠지, 어?!”

그런데 어째선가. 무식하게 강한 놈은 감각이 마비된 바보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고 여전히 얼굴이 발그레하다.

“뭐야. 엄청 때렸는데 왜 안 죽어? 왜 안 아파하냐고!”

어째서지? 이게 안 아파? 이게 안 아프다고?

믿을 수가 없어서 때리고, 또 때려 보는데도 전혀 타격감이 없다. 아예 신경조차도 안 쓰는 듯한 느낌. 놈은 맞으면서도 하늘에 붕 뜬 솜사탕처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뭐야, 뭐지? 때리고 있는데 왜 점점 기분이 나빠지지?”

괴물 같은 자식. 좀 고분고분하게 아픈 시늉이라고 해라. 브리짓이 입술을 깨물고 이번에 얼굴 쪽으로 펀치를 날리려고 했을 때였다.

그것을 한 손아귀에 가볍게 쥐어 막으며 클로드가 딱 잘라 한마디로 경고했다.

“때리는 건 괜찮지만 꿈꾸는 건 방해하지 마라.”

“하?”

기가 막혀서 브리짓은 고개가 돌아간다. 말속에 스쳐 간 봄바람에 대한 행복함과 밝은 희망이 느껴져서 주먹질이 나가려던 길목에서 멈춰 버렸다.

뭔가 더 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무슨 헛꿈을 꾸는데 저래?”

짜증 나! 그녀가 멍청해 보이는 그의 뒤통수로 독 폭탄을 던졌다.

* * *

정원의 마지막 언데드까지 말끔히 소멸시키고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을 때 하늘은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은 뒤였다.

중도 포기해서 돌아간 사람들도 제법 되었지만 그래도 첫 단계를 무사히 해냈다는 개운하고 뿌듯한 기운이 생존자들 사이에서 넘쳐흘렀다.

앞으로 남은 것은 지하로 내려가는 왕묘 내부의 언데드뿐.

그곳마저 청소가 끝나면 묘지 토벌전은 완벽히 완수가 된다.

지상에서 상대한 것들보다 더 만만치 않은 존재들이 즐비할 테지만 내일을 위해 야영을 치고 저녁을 준비하며 허기진 배를 채우는 토벌대의 사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묘지에서 보내는 하룻밤이 으스스할 법도 한데 벌써부터 자리를 잡고 설치된 텐트가 빼곡하다.

태리는 사람들을 도와주러 총총대며 돌아다니다가 마법사들의 극성에 억지로 붙들려 앉았다. 자기들도 하루 종일 고단했을 거면서 그들은 공주님의 텐트를 경쟁적으로 나서서 만들고 알록달록하게 꾸미더니, 강풍이 와도 꺼지지 않을 모닥불마저 환하게 밝혀 주고 갔다.

‘따뜻해. 북적북적하고.’

불가에 손을 덥히는 태리의 얼굴이 불빛으로 노랗게 물들었다. 감자를 으깨 넣은 스프를 호로록 마시며 그녀가 반대쪽 야영지를 괜히 기웃거리며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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