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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똥찬 발상이 스치며 괄약근이 바짝 조여진다. 브리짓은 슬그머니 로브 깊숙한 곳으로 손을 넣어 안주머니를 더듬거렸다. 그 모습을 심상치 않게 지켜보던 태리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 불투명한 액체가 담긴 독극물 병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았다.
“피해야 돼요!”
깨진 유리병에서 나온 점액질이 빠르게 바닥으로 퍼지더니 순식간에 끈끈하게 굳어서 전투 중이던 두 남자의 발바닥에 달라붙었다. 접착제에 발이 붙은 것처럼 다리가 고정되었고, 어렵게 힘을 줘 떼어 내도 이미 주변에 잔뜩 깔려 있어서 내딛는 순간 또다시 붙어 버리고 말았다.
적의 이동 속도를 느리게 하는 독물학자의 둔화 스킬이었다.
“뭐야, 저게 진짜 미쳤냐?”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뭐 하는 거긴. 싸우는 거잖아. 언데드 사냥! 힘내서 같이 싸워 보자구, 응?”
그러다가 기회가 돼서 여기서 죽으면 더 좋고! 그 말이 뒤에 생략되어 있다. 이글이글하게 노려보는 두 남자의 시선에 브리짓은 세상 밝은 햇살처럼 활짝 웃었다. 악마가 혓바닥을 놀릴 때 웃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클로드를 향해 손끝을 까닥이는 태도에는 심술마저 그득했다.
“의도한 건 아니야, 그냥 우연이지. 누가 거기 있으랬나? 솔직히 이런 방식은 아무도 생각 못 했을 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이거는 네가 죽을 만하다 이거야. 호상이라고!”
고자 놈이 전쟁터에서 자신을 만난 건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것과도 같다. 그런데도 한심하게 날 견제하지 않았다니. 이건 눈치채지 못한 녀석이 멍청한 거지 자신에게는 죄가 없었다.
“내가 경고했었지? 고자는 우리 땅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고. 거기서 뒤져. 넌 절대로 우리 이자리스를 함락시키지 못한다, 알겠어? 그동안 쌓인 미운 정을 생각해서 네 시체는 잘난 너희 황제 앞으로 배달해 줄 테니까 서운해 말라고.”
이렇게 해서 제국에게 받았던 치욕과 설움을 돌려줄 것이다. 감히 겁도 없이 마법사들의 땅을 침범한 대가가 무엇인지 톡톡히 치르게 해 줄 것이다. 그녀가 독 탱크의 분무기를 높이 치켜들며 쩌렁쩌렁 소리쳤다.
“여기서 널 죽이고 내 팔자를 고쳐 보겠다!”
남이 다 해 놓은 밥에 숟가락을 얻는 걸로도 모자라 한가롭게 나쁜 짓까지 덤으로 계획했다. 진짜 다른 존재의 길을 선택한 사람. 그녀는 지독한 악질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용맹무쌍한 독립투사였다. 순수한 광기가 두 눈에서 빛나는 걸 보고 클로드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눈썹을 쓸었다.
“그런 저질적인 방법으로 되겠나.”
“뭔 소리야. 내가 아까 드레이크 죽인 거 못 봤어? 이번엔 더 적극적으로 해 볼게. 지금의 넌 굉장히 만만한 거 같거든? 넌 실수한 거야. 어리석게도 자기 부하를 다 버리고 공주님을 구하러 오는 기사라니. 멍청한 녀석! 우리 공주는 내가 지킨다.”
혼자 남은 기사단장 따위는 개밥 훔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이다. 다른 기사들이 구하러 오기 전에 놈의 시체 하나쯤이야 뚝딱 만들고 자리를 뜰 수도 있다. 이런 공짜 밥상을 받아도 되나 싶어 브리짓은 손이 떨릴 지경이라고 까르르거렸다.
“진짜 미친년이다, 미친년이야. 아니, 중간에 낀 난 뭔 죄인데.”
클로드를 잡은 데에 더불어 인신 공양으로 바쳐진 엘프 하나. 브리짓의 눈에 이즈는 딱 그 정도였다. 어차피 이놈도 함께 죽을 운명, 잡아뗄 이유가 없다고 여겼는지 그녀가 농도 짙은 본심을 꺼내 놓았다.
“여기서 잘 싸우는 놈은 다 미리 싹을 뽑아 놔야 할 경쟁자야. 게다가 넌 평소에 나한테 친절하지도 않았잖아?”
“난 누구한테도 친절하지 않다, 이년아!”
“그게 다 겁이 없어서 그렇지. 죽을 때가 되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내가 널 강제로 친절하게 만들어 줄게.”
“쓰레기의 극치를 달려도 적당히 달려야지 이거는 뭔…….”
“시끄러우니까 입 닥쳐, 뾰족 귀.”
맥락 없이 거칠기로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기에 이즈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귀하디귀한 하이엘프에게 인간이 맞먹으려고 한다. 이런 굴욕은 난생 처음이었다.
열 손가락 사이사이에 예리한 독침을 꽂은 브리짓이 눈을 깔아 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뭐 남기고 싶은 말이라도?”
싸우기도 전에 마지막 순간을 묻는 저 오만함. 남자 둘이 앞다퉈 이를 갈며 토해 냈다.
“넌 정말 최악이다. 독방구.”
“출세에 눈먼 악마 새끼. 너는 내가 절대로 가만 안 둔다.”
“어머, 고마워. 그게 유언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유언을 접수했으니 대화는 거기까지. 한 놈당 독침 다섯 발씩. 이미 발을 묶어 움직임을 반으로 깎아 놓은 상태였으니 브리짓의 독침 공격은 수월하게 쏟아져 들어간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구분 없이 밀려드는 언데드를 함께 무찌르는 것까지도 결코 잊지 않았다. 누가 누가 더 악질인지 대결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안 죽이고는 못 사는 이상한 전우애가 사냥터의 한복판에서 피를 튀기며 열을 올렸다.
* * *
‘이것들은 다 미쳤다.’
이즈는 이를 악물고 근거리에서 달려든 레드캡의 머리를 활대로 후려쳤다.
태어나서 이렇게 열심히 싸워 본 게 얼마 만인가. 한 2백 년 전쯤에 있었던 자야린 대숲 왕위 찬탈 전쟁 이후로 처음이다. 그때 자신은 목숨을 걸었었는데 말이다.
분명 셋이서 힘을 합쳐 언데드에 대항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론 1 대 1 대 1의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적이 셋이란 소리였다. 클로드, 브리짓 그리고 몬스터. 각자 알아서 정신없이 몬스터를 해치우면서도 동시에 누군가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올 때면 서로 맹렬하게 견제를 했다.
“시발, 이 징그러운 것들!”
“진짜 더럽게 안 죽네! 둘 중에 하나라도 좀 죽어 봐!”
“……쯧.”
여기서 이긴다면 그건 단순히 운이 좋아서겠지만, 진다면 실력 부족이라는 더러운 오명을 평생토록 지고 살게 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지. 하다못해 개미에게 밟혀 죽는 운명이 되더라도 이놈들에게만은 질 수 없다. 다 같이 최선을 다해 방어하고 전투의 흐름을 읽으며 자신의 신변을 사수하고 있었다.
‘이건 무리야. 이만한 준비는 못 했다고!’
무엇보다 이 일의 원흉인 브리짓은 독 스프레이를 숨 가쁘게 흩뿌리며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암살 계획에 내내 탄식을 내지르고 있었다.
일거양득이라는 작전까진 좋았는데 몰려든 언데드의 숫자가 너무 많았던 것이 변수다. 거기에 되살아나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어서 이러다간 두 놈을 잡기 전에 본인이 먼저 당할 노릇이었다.
‘미리 트랩이라도 깔아 놨어야 했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 그리고 저 자식들이 너무 잘 싸우잖아!’
그녀는 슬그머니 곁눈질로 두 남자의 동태를 살폈다.
먼저, 인간이 아닌 활잡이 녀석은 아무 데나 화살을 쏴도 모든 공격이 다 필중이었다. 연사와 속사를 물 흐르듯이 조절할 뿐 아니라, 움직임이 꼭 암살자 같아서 대체 어느 방향에서 공격을 한 것인지 가늠도 어렵다. 거기에 쏜 화살은 정령들이 착실히 수거해서 가져다주니 화살통이 동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저 총독 자식.
‘하찮은 매국노 주제에!’
적국의 기사 주제에 감히 우리 공주를 좋아하니 저놈은 매국노다.
그가 검을 들고 싸우는 모습을 이번에 처음으로 제대로 보게 된 브리짓은 솔직히 약간 겁을 먹었다.
도신을 키운 검이 무자비하게 전장을 휩쓸 때마다 경로에 걸리는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부딪쳐 바스러졌다. 마치 분쇄기에 갈리는 것처럼 살벌하게 썰려 나가는 것이다.
거기에 그걸 한 번도 아니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내내 하고 있다. 억지로 버티는 것도 아니고 조화와 균형으로 능숙히 완급 조절을 하는 놈이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증거로 그의 주변은 일찍부터 초토화 상태였다. 혼자서 얼마나 많이 몰살을 시켰는지 만약 언데드가 피를 흘리는 몬스터였다면 그 주변에 피 보라가 쳤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였다.
‘이 정도로 강한 녀석이었단 말이야?’
전후방으로 깔린 몬스터에 마비, 혼란, 출혈 독까지 야무지게 양념해 놨는데 이 정도면 알아서 죽어 줘야지. 어떻게 저렇게까지 끄떡없을 수가 있는지 기가 막힐 지경이다. 옆에서 들어 보면 놈은 그저 가식 없는 정직한 숨소리만을 들이쉬고 내쉴 뿐이었다.
그러니 시간이 흐를수록 브리짓은 점점 더 극도의 위기감을 가졌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머지않아 자신만이 피를 본다.
셋 중에서 가장 최약체이니 자칫해서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두 놈 중 누구도 그런 자신을 돕지 않으리란 건 자명한 일.
‘에라 모르겠다. 일단 전략적 후퇴다.’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그녀는 주의 깊게 신경을 분산하고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 동료의 위험을 알아차린 뒤 ‘돌풍 회오리’를 일으키는 마법 스크롤을 쫘악 찢었다.
‘일단 살고 봐야지. 나는 간다. 너희들끼리 잘 해 봐라, 이놈들아!’
탱크 통의 분무기를 최대치로 개방해 회오리 속에 독이 섞인 유독 회오리를 만들어 낸다. 언데드들은 회오리에 쓸려 죽거나 혹은 그것을 피해 다른 ‘살아 있는 먹이’ 쪽으로 쏠렸다.
별안간 배로 늘어난 몬스터에 의해 둘러 싸이게 된 남자들은 당황했다. 뒤늦게야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깨닫고 브리짓을 찾으려 했을 때엔, 그녀는 이미 적군에게 아군을 배달하고서 투명화 물약을 마시고 달아난 뒤였다.
“으아악! 찻집 녀석, 잡히면 반드시 죽인다! 넌 내가 꼭 죽인다!”
이즈는 길길이 날뛰며 전장을 뒹굴었다. 회오리의 여파가 커서 점점 더 많은 몬스터가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이 와서 도와주었지만 간에 기별도 안 갈 수준.
그는 쉴 새 없이 칼을 휘두르는 클로드를 보다가, 아직 퇴로가 남은 빈 공간을 쳐다보았다. 저곳까지 언데드로 덮이는 건 시간문제. 발을 뺀다면……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었다.
“샐러맨더 나와, 화살에 타라.”
그가 다섯 발의 화살을 끈으로 묶어 한 개의 대화살로 만들고는 불의 정령을 태워 그것을 불화살로 만들었다.
“나까지 저놈을 버리고 가면 쟨 더 힘들어지겠지만―”
듬성듬성한 공간으로 불화살이 퉁 일직선으로 쏘아진다. 화살이 길을 내며 만든 통로로 냅다 뛰어 달리며 이즈가 소리쳤다.
“의리는 뭔 놈의 의리! 야, 총독 거기 위험하다! 난 간다!”
그래도 위험하다고 말은 해 줬으니 비겁한 찻집 주인보단 내가 더 낫다.
등 뒤로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구울의 몸통을 한 칼에 갈라 버린 클로드는 싸우는 도중에 그 비겁한 외침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