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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드레이크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 쓰러지기 직전에 태리는 그 위를 뛰어내려 탈출했다. 자칫하다간 엄청난 뼈 무게에 깔려 죽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어서.
막대한 파괴력이 들어갔다는 것을 피해 면적과 소리로 짐작했기에 홀가분한 기분이었는데, 높은 곳에서 아래로 몸을 던진 순간 갑자기 현기증이 팽 돌면서 약간의 오한이 들었다.
‘아, 역시 숙련도가…….’
왜인지는 물론 빌에게서 들어서 잘 알고 있다.
숙련도가 부족한 마법을 한꺼번에 몰아 쓰면 대량의 마나가 코어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심지어 태리는 이 마법을 이번에 현장에서 처음으로 써 봤다.
‘한 20% 정도 빠져나간 것 같은데.’
이론은 완벽한데 숙련도가 부족해서 1을 내려고 했든, 10을 내려고 했든 의도와 상관없이 출력을 무조건 100으로 뽑아내는 상태라고나 할까. 삽으로만 파도 될 자리에 포크레인을 끌고 와서 괜히 기력만 왕창 소모하게 되었다.
불안정한 착지로 다소의 찰과상을 각오했을 때였다.
커다란 올가미로 낚아채듯 떨어지는 그녀의 몸을 누군가가 정확한 타이밍에 받아 내곤 드레이크의 덩치를 피해 단숨에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땀방울이 맺힌 클로드의 턱이 보였다. 그가 어깨를 감아서 제 가슴 쪽으로 꽉 눌러 안은 탓에 더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대신 가슴에 닿아 있는 뺨으로 그의 심장이 얼마나 세차게 뛰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저 깊숙한 안쪽에 있었을 텐데 언제 여기까지 왔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다리에 땅에 닿자 또다시 어지러움이 도져서 작게 앓게 된다. 신음 소리를 들은 그의 얼굴이 대번에 흐려졌다.
“뭐야, 너 저 멀리에 있지 않았냐?”
그녀를 대신해서 마찬가지로 숨이 차도록 뛰어왔던 이즈가 허탈하다는 듯이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못 봤나. 뛰어왔다. 빠르게.”
“그런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말이 되는 속도냐고.”
“네놈은 대체 뭘 했나. 가까이에 있었으면서!”
“뭐야? 나도 멀리에 있었거든?!”
풍압에 밀려나 멀리까지 튕겨 나갔던 이즈로선 억울한 비난이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드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식은땀이 맺힌 태리의 이마를 걱정스럽게 쓸고 있었다.
“나 별로 안 아파요. 갑자기 마나를 많이 써 버려서 그런 거지 다친 것도 아니고. 그냥 몇 분 쉬면 돼요.”
머쓱한 태도로 태리가 설명했지만 발을 동동 구르는 듯한 클로드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친하게 지내면 뭐라 할 거면서, 제대로 안 돌봐 주면 아주 누굴 죽일 듯이 쳐다보네. 실수 한 번만 더 했다가는 아예 날아가겠는데.”
불만을 담아 비꼬는 이즈의 말투에 클로드는 어금니를 갈았다.
“이 사냥은 여흥이 아니다. 대충 하지 마라.”
“그렇게 신념 있는 사냥을 하는 놈이 자기 부하들을 저렇게 버리고 오냐?”
그리고 누가 대충 한다는 건지. 나름 처음부터 열심히 임했고 이제는 더 진심으로 참여할 생각이다.
이즈가 반곡형의 활을 손에 잡고 아직도 전기에 지져져 떨고 있는 드레이크에게로 서서히 걸어갔다. 기절한 것이지 숨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으니 마무리를 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클로드는 그 등을 노려보다가 빠질 수 없었는지 태리를 나무 밑에 기대어 놓곤 본인도 검을 뽑아 들어 합세했다. 그녀가 싸우게 하는 것보단 본인이 두 배로 움직이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다행히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드레이크를 실력자 둘이서 파괴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정화를 도맡아야 할 성기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충분히 몸체를 부수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순조로웠던 상황이 반전된 건 활시위를 당기던 이즈가 자신의 화살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하늘에서 발견했을 때부터였다.
“어? 저거 뭐냐?”
“당장 물러나라!”
노린 것인지 둘 사이로 정확히 떨어진 것은 주먹 크기의 작은 공 모양의 구체. 클로드는 발견한 즉시 이즈의 어깨를 뒤로 밀쳐 내고 자신도 몸을 튕겨 내 피신했다.
두 남자가 자리를 피하자마자 구체가 펑 하고 터지더니 여러 개의 독 줄기가 사출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이 독무로 가득 찼고 재생되지 못하도록 부숴 놓았던 본 드레이크의 몸은 액체처럼 녹아내려 곧 독 웅덩이로 변했다.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 클로드는 멀지 않은 근처에서 폭발 테러범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휴식 중인 태리의 옆에 한가로이 서선 보라색 로브를 입고, 독 탱크 같은 것을 어깨에 메고 온 찻집 주인이라 우기는 정신 나간 독법사.
마법사 중에선 태리와 함께 유일하게 지팡이를 쓰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각종 포션을 허리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서 쉽게 죽지도, 다치지도 않는 불사신 같은 여자였다.
되살아날 수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액체가 되어 버린 시체를 보곤 그녀가 깔깔깔 코끝을 울려 웃었다.
“어머나, 이를 어쩌나. 마지막 처치를 뺏어 먹었으니까 드레이크를 죽인 건 내 몫으로 떨어졌네? 아하핫!”
그러면서 폭죽을 터트리듯 탱크에 매달린 호스를 뽑아 보랏빛의 유독 가스를 스프레이처럼 사방팔방 분사해 댄다. 사방에서 콜록거리는 매운 기침 소리가 울렸고 태리도 눈을 감고 숨을 참으며 브리짓의 등짝을 찰싹 내려쳤다.
이동형 분무기처럼 생긴 드럼통 안에서 설마하니 독이 나올 줄이야. 신성력을 빌릴 필요 없이 언데드를 물처럼 녹여 버리니 좋은 것 같긴 한데 아군까지 공격을 한다는 건 너무나도 치명적인 단점이다.
등짝을 때리다 못한 태리가 옷깃을 잡아당기며 만류했다.
“그게 도대체 뭐야, 브리. 너무 위험하잖아!”
“뭐긴 뭐야. 이런 게 바로 마법 공학이라고 하는 거야. 위험하면 내 뒤에 숨어 있어. 그럼 넌 안 다칠 거야. 내가 너 하나 못 지켜 주겠어?”
“우리만 무사하면 뭐해. 민폐잖아.”
“당연히 민폐여야지! 이번 대결은 차기 후보 간의 지지율 대결이나 다름없어. 하나라도 더 죽이고 하나라도 더 뺏어 먹어야 된다고. 그걸 모르겠니?”
강자로서의 자격은 가장 많은 공적치를 올린 자에게 돌아간다.
이번 토벌전 하나에 미래 이자리스의 지도자로서의 명분과 정당성이 걸려 있다고 주장하는 브리짓은 이렇게 해서 자신을 팔자를 고쳐야 한다고 몇 번이나 거듭 강조해서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꼭 1등 할 거야! 침 발라 놨으니까 아무도 손 못 대! 퉤퉤!”
“그래도 남이 다 죽여 놓은 걸 뺏어 먹는 건 반칙이야.”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지.”
그러면서 언데드를 한 번에 싹 쓸어 담기 위한 거대 장애물 같은 것들을 마구 설치하는데, 그 범위 안에 또다시 이즈와 클로드가 들어가 있다는 건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때마침 대량의 레드캡이 땅에서 기어 나오자 그녀가 ‘노다지다!’라면서 행복하게 폭탄물을 터트렸다.
‘미쳤다, 미쳤어.’
독 구름에 화약을 더한 치명적인 조합이다. 폭탄 안에는 독가스 말고도 쇳조각이나 압정, 못 같은 것들이 함께 들어 있어서 폭발하는 순간 레드캡의 몸뚱이가 꽃잎처럼 찢어져 휘날리는 것을 감상할 수 있었다.
살기 위해 체면을 버리고 허겁지겁 폭발 지역을 굴러 빠져나온 이즈와 클로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거의 다 엉망이 되었다.
“이 시발, 저 자식 짓일 줄 알았다!”
분노의 욕을 짓씹은 이즈는 나오자마자 곧바로 활을 들어 맹렬하게 반격했다. 그가 시위를 오랫동안 당기고 있자 화살촉이 뾰족하게 얼면서 얼음 화살로 변한다. 강력한 한 방이 된 고드름이 브리짓이 만든 독 구름의 중앙을 관통하더니 불붙은 유독 가스를 그대로 꺼트려 버렸다.
효과와 규모로 보건대 상당히 작심하고 쏜 화살이었다.
“아악! 어떤 놈이 내 걸 무효화시켰어?!”
“나다, 이 미친년아.”
“썩을 놈이 바빠 죽겠는데……!”
본인의 폭발물로 인해 두 남자의 목숨이 저세상으로 갈 뻔했는데도 범인은 얼굴에 대못 하나 박히지 않을 정도로 극도로 뻔뻔하게 나왔다. 왜 내 앞길을 방해하느냐, 내가 너희들 같은 줄 아느냐며 딱따구리처럼 쏘아붙이고 항변했다.
“나도 내 살길, 내 이윤, 내 밥그릇 챙겨야 할 거 아니야. 너희들처럼 무식하게 힘이 세면 나도 이렇게 안 해요! 그런데 어떡해, 난 약한걸!”
“네가 약하다고?”
“대체 누가.”
“저거 뭔 개소리야?”
뒤에 있던 태리까지 더해 동시에 세 사람이 황당한 헛바람을 터트렸음에도 브리짓은 사시나무 떨 듯 부르르 경련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너희들 한 명씩 어떤지 불러 줄까? 너부터 쟤까지 돌진형 파괴왕, 저격형 간잽이, 전략형 힘법사야! 이게 말이 돼? 내가 이 자리에서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어떻게 너희를 이기니?”
“내가 언제 돌진만 했나.”
“뭘 어쨌다고 간잽이래. 궁수는 원래 교전 특성이 그렇다고. 신중하고 민첩하게 움직여야 돼.”
“힘을 그렇게 많이 쓰진 않았어. 조금 썼어, 조금…….”
평가가 지나치게 촌철살인 급으로 뾰족한 것에 대해 셋이 단체로 반발했지만 브리짓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녀는 태리가 그랬듯 사냥감을 몰아붙일 수도, 클로드가 하듯 뭔가를 한꺼번에 섬멸할 수도 없었으며, 이즈처럼 신출귀몰하게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러니 효율을 중시하며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부지런히 사냥터를 누비며 남들이 거의 때려 놓은 것들을 막판에 훔쳐 먹거나, 대규모 출몰이 감지되는 곳들에 지뢰를 설치하며 이른바 한탕 전략을 구사하며 돌아다녔던 것이다.
도구와 물약이라면 산더미처럼 지니고 있었으니 소 떼 같은 숫자의 언데드가 덫에 걸릴 때마다 어마어마한 소득을 거두어 온 참이다.
모르긴 몰라도 처치한 숫자로는 클로드와 거의 비등비등한 수준이었다.
입씨름을 하는 사이 다시 끄물대며 오는 레드캡과 구울을 발견하곤 클로드는 지체 없이 무기를 고쳐 쥐었다. 본 드레이크라는 상당한 덩치의 몬스터가 쓰러졌으니 그 시체의 찌꺼기를 탐내고 몰려드는 것들이었다.
식욕밖에 없는 언데드의 특성상 점차 더 밀려들어 올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그는 기사단의 위치를 확인하며 즉시 공격 태세를 갖췄다. 그걸 본 브리짓의 눈이 일순 메기의 수염처럼 가느다랗게 변했다.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이 중에서 저놈이 제일 유력한 우승 후보잖아? 그럼 쟤만 없으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니지, 그보다 전에 저놈이 없었으면 애초에 나한테 이런 고생이 왜 필요해? 그보다 전전에 난 원래부터 쟬 죽이고 싶었구!’
때는 이때다.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다. 다 나 잘되라고 주신 행운이다.
매일매일 눈엣가시 같던 놈!
사고는 순식간에 ‘이겨야겠다’에서 ‘죽여야겠다’로 훌쩍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