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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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을 따라 흙이 빠르게 들썩이며 분출했고 거대한 철벽이 그녀의 앞으로 몇 개씩이나 튀어 올랐다. 태리의 몸이 지우개로 문질러진 것처럼 보였다가 사라지기도 했고, 심지어 그중에는 대상자가 피해를 입으면 몇 초전으로 체력이 되돌아가는 시간 역행이라는 정신 나간 초월 마법까지 섞여 있었다. 

그 마법을 캐스팅한 자는 몇 달 치의 기력을 한꺼번에 소모한 뒤 그 자리에서 즉각 혼절했다.

“왜 저래. 공주님 모시는 광신도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질겁했다. 무슨 저런 미친 집단이 다 있나.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마법사들은 혼신을 다해 증명하고 있었다. 절대로, 그 누구도, 우리 공주님께는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걸.

“정도라는 게 없군.”

이즈 역시 태리를 보호하려 상급 정령들을 잔뜩 불러냈으나 쓸모가 없어져 손을 탈탈 털었다.

하지만 모두가 혀를 내두르며 헛웃음을 터트린 와중에도 태리는 그 기회를 시시콜콜한 웃음으로 낭비하지 않았다.

‘이런 식이라면 오히려 더 좋아.’

빛을 받지 못하면 잿빛, 반대로 빛이 쏟아지면 화려한 금색으로 변모하는 머리카락이 맹렬하게 휘날리며 움직인다.

여러 겹의 보호막에 막혀 주춤하는 드레이크의 정면으로 부츠를 신은 다리가 힘차게 돌진했다. 절대로 빗나가지 않을 거리에서 총을 꺼내 든 그녀는 안광이 빛나는 눈구멍으로 사정없이 탄알을 갈겨 댔다.

부서진 뼛조각이 퍽퍽 튀기고 괴수의 울부짖음이 귓속을 긁는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꾸어억!

마침내 눈이 완전히 망가진 드레이크가 고통스러워하며 상체를 훤히 노출시킨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태리는 재빨리 왼팔을 치켜들어 괴물의 굵은 목뼈에 로프를 감아 올라탔다.

“위험하시다! 다시 보호해라!”

마법사들은 그녀가 본 드레이크의 목 위에 위험천만하게 매달리는 상황이 연출되자, 또다시 화드득 난리를 치며 보호용 마법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건 뭐 어지간해야 대충 무시를 하지. 쟤들이 자꾸 저러니까 나까지 물들 것 같잖아.”

주위에서 저렇게들 다칠까 봐 노심초사에 안달을 내니, 호응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진짜 엄청 사랑받네.”

그거 좀 재밌어 보이는데 나도 좀 껴 볼까. 이즈가 입술을 찢으며 모든 화살을 뽑아 한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그리고 곧이어 사람들은 공기를 태우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화살 비를 보았다. 속공. 엄청난 속공. 웬만한 사수가 쏘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빠른 속도였다. 그것들이 죄 날아와 드레이크의 발등과 발톱에 박혀 커다란 덩치를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킨다.

발을 움직이지 못하자 드레이크는 자신의 몸에 탄 작은 공주를 쉽사리 떨쳐 내지도 못했다.

태리는 드레이크의 등짝 한가운데에 도끼를 수직으로 내려쳐서 박고 있는 중이었는데 덕분에 일이 몹시나 수월해졌다.

“다 됐다!”

피뢰침처럼 꽂혀 있는 도끼에 그녀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언데드형 마물에게 가장 효율적인 매는 1등이 신성력, 2등 백마법, 3등이 은을 이용한 물리적인 공격인데 태리는 그중에서도 2등과 3등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였다. 이날을 위해 드래곤에게서 나름 특훈도 받아 왔고.

벼락을 소환하는 다람쥐처럼, 아니 아니, 살육의 천사처럼 그녀가 하늘 높이 아름다운 양팔을 뻗었다.

‘뼈 튀김이 되게 해 주세요!’

뭘 하려는 거지? 하고 쳐다봤던 사람들의 동공 속으로 동시에 터져 나간 것은 찌릿찌릿 흔들리는 하얗고 푸른 빛.

번쩍!

정확한 학명은 라이트닝 썬더 볼트. 빛과 전기가 동시에 결합된 한 줄기의 섬광이 은도끼를 타고 내리꽂히며 백만 볼트를 뿜어내는 전기 충격기처럼 드레이크의 몸 전체를 지글지글하게 지진다.

그것도 무려 네 번씩이나.

선 채로 등허리에 벼락을 네 대나 얻어맞고, 뼈로 이루어진 커다란 익룡의 몸이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었다.

“쓰러지나?”

“어어, 쓰러진다!”

산 같은 몸뚱이가 좌우로 휘청휘청하다가 마침내 쿵 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 * *

많아도 너무 많다. 구덩이에서 물보라처럼 쏟아져 나오는 언데드의 숫자에 용사들의 기세가 서서히 꺾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데드는 이제껏 검은숲에 즐비했었던 여타 몬스터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뼈가 부러져도 도로 합쳐지고, 살이 찢어져도 다시 오므라드는 징그러운 재생력을 가진 그들에게는 음식도, 치료도, 휴식 시간 따위도 필요치 않았다. 그저 눈앞의 먹잇감을 물어뜯는다는 본능만이 남아 있어서 후퇴나 항복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인간은 시간에 따라 필연적으로 지쳐 갔기 때문에 서서히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처음과 같은 전력 상태를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는 곳이 있다면 오직 발로란의 성기사단뿐.

클로드는 팔뚝에 힘을 실어 검은 연기를 내뿜는 스켈레톤의 가슴을 강하게 후려쳤다. 한 번의 공격으로 중첩 피해를 입히는 기사의 강타 기술이다. 뼈가 부서지며 사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지만 후방에서 짧은 법령과 함께 신성한 빛이 쏟아지며 피부에 닿기 전 말끔히 태워 버렸다.

“아가사의 이름으로!”

성직자 계열이라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축도였다. 그러나 어둠 속성의 언데드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으로 작용한다. 성기사단의 누구도 은으로 된 무기를 따로 구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신의 가호를 입은 기사들은 대부분이 쌩쌩했다.

“이것도 정화가 유효한가.”

“예, 정화 유효! 확인했습니다!”

“좋아, 본대를 제외한 모든 기사들은 축도를 위해 후방으로 붙는다.”

“알겠습니다, 단장!”

“곧 해가 질 거야. 그 안에 이곳을 돌파해야 한다.”

클로드의 군대는 이미 꽤 깊숙한 곳까지 진입해 있는 상태였다. 숱한 전쟁터를 구르며 실력을 쌓아 온 노련한 기사들 덕분이기도 했지만 사실 진짜 일등 공신은 태리의 조언이다.

언데드에게는 성기사만큼 효율적인 군대는 없다는 걸 알았던 건지 그녀는 일찍부터 여러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다.

‘약점을 간파하려고 하지 말아요. 정화만 먹힌다면 충분하니까. 괜히 전략을 짜면서 시간을 소비하는 사이에 언데드는 금세 재생되고 말 거예요.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싸워야 하죠. 그러니 최대한 행동의 과정을 줄여 보도록 해 봐요.’

그녀가 지시한 건 기사의 방식이라기보단 전사의 방식에 더 가까워서, 겉보기와 질서를 중시하는 일반적인 성기사라면 싫다고 거절할 법도 했다. 하지만 클로드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다.

그는 정확히 그녀가 알려 주었던 공략을 상기하며 움직였다. 최대한 많은 수의 적들을 한곳에 집중시켜 모은 뒤 빗자루로 휩쓸듯이 일각을 무너뜨리고 후방으로 턴을 넘긴다.

그러면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성기사들이 신성력을 흩뿌리며 회생이 불가능하도록 그것들을 정화시켜 완전히 소멸시켰다. 진행이 속전속결로 굴러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불개미처럼 몰려드는 것들을 베어 넘겨 가며 지속되는 전투에 클로드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내려앉았다.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에 섞여서 꽤나 매력적인 모습이었지만 신경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 있는 상태다.

주변의 이파리들이 갑자기 한 방향으로 꺾이자 그가 칼질을 그치고 멈칫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바람의 쏠림. 결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입구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앞만 보고 들어왔던 그가 처음으로 칼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차갑게 굳어 있던 입에서 비명 같은 한 마디가 터졌다.

“브레스?”

예사롭지 않은 바람의 흐름은 흉포한 맹수의 목구멍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한 줌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여자. 그녀를 향해 본 드레이크가 숨을 들이마시자 흉곽 부근이 부풀며 갈비뼈가 흉측하게 좌우로 벌어졌다.

“어? 단장! 어딜 갑니까! 기다려요!”

클로드는 그 즉시 검을 움켜쥐고 거꾸로 달렸다. 힘들게 격퇴해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정신을 차렸을 땐 머리보다 먼저 움직인 다리가 미친 듯이 땅을 박차며 달려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심장이 터지고 근육이 찢어질 것처럼 뛰는데도 멀리에 서 있는 태리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이것보다 더 빨리 달려야 되는데. 전력을 다해 질주하는 그의 머리 위로 숱한 마나의 파동이 하늘을 뒤덮으며 지나갔다.

마법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일반인조차 몇 초 사이에 수십 개가 넘는 마법들이 캐스팅되었다는 걸 살갗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양의 마력이었다.

“단장, 천천히 가십시오! 너무 빠릅니다! 저희가 엄호해 드릴 수 없습니다!”

“엄호할 필요 없어!”

그의 속도를 추격하지 못한 기사들이 점점 뒤처지기 시작하더니 이젠 몇 명 남지도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전방으로 대량의 스켈레톤 병사들이 비척거리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빌어먹을.’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무찌르고 정화하면 될 일이지만 부하들이 도맡아 한 후처리를 안타깝게도 그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

기가 막히게도 신성 기사단장인 그는 신성력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성기사였다.

평생 그 점을 교묘하게 숨기며 살아왔고 그것만큼이나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따위 것이 대수가 아니다. 그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정화해 주지 못하면 뚫고 가지 못할 건가?

‘재생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해치워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오러로 인해 넓어지고 길어져 대검의 형태로 변모한 성검이 닥치는 대로 썩은 살과 뼈들을 끊고 베며 지나간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푸른 오러의 흔적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뒤따라오던 기사들은 심지어 그가 칼을 휘두르는 모습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까마득한 무리 안에서 적들을 가루로 만드는 하얀 망토와, 그 후 순식간에 하얀 점으로 변하는 등을 보았을 뿐.

이어서 화끈하게 싸운 건 이쪽만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 클로드가 달려간 방향의 하늘에서 구름을 가르고 번개가 내려쳤다.

문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전격계 마법임을 드러내듯 섬광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해서 네 차례나 똑같은 자리에 지속된다.

마법에 면역력이 없는 기사들은 세상이 망하려는가 보다고 단체로 엎드렸지만 파동은 순식간에 그들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멀리서 쿠웅― 하고 둔탁한 것이 쓰러지자 배를 깔고 있는 그들의 지축에까지 덜덜덜 진동이 울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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