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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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끝으로 이즈는 머릿속이 띵해지면서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경험을 했다. 귓속이 멍해지고 시야가 가물가물하게 흐려진다. 좁아지는 감각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들리지 않게 된 귀 대신 소년의 입 모양을 읽으려고 발악했다. 

미안.

필사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기절하기 직전에 그는 그 두 글자를 분명히 구분해 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감정보다도 빠르게 반응한 건 등골이 서늘하게 식는 감각이었다.

자신을 간단히 제압한 소년의 사과에 그는 처음으로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꼈다.

소년이 뻔뻔해서? 놀랄 만큼 강해서?

아니, 순순히 범행을 자백할 만큼 그것을 감출 수도 있다는 확신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죄를 인정한다 한들 이즈가 그것으로 자신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걸 소년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식은 대체 뭐야……?’

모든 감각이 닫히고 종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엘프의 등을 가볍게 받아 내며 빌은 이마의 맺힌 굵은 땀방울을 훔쳤다.

“후.”

태연한 척했지만 역시 하이엘프는 쉽지 않다. 그도 이만한 상위 개체의 정신을 건드린 적은 거의 없는 편인데 이즈에게는 무려 세 번을 시도하게 됐다.

맨 처음은 숲속에서, 두 번째는 폐허에서, 오늘은 도서관에서. 세 번 모두 상대가 방심을 한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맑은 이마 위에 손을 올리자 찡그려져 있는 엘프의 미간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그것을 미안한 얼굴로 쳐다보며 빌은 남아 있던 양심의 가책을 마저 읊조렸다.

“범인을 찾는 모양인데 특별히 네게 한 건 없어. 그냥 네 머릿속을 조금 뒤져 봤을 뿐이야. 허락 없이 그런 짓을 해서 미안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어.”

이즈가 처음 검은숲으로 들어왔었던 그날 밤, 빌은 우연히 그를 발견하고는 꺼져 가던 불씨가 되살아난 것만 같은 희망에 휩싸여 흥분해 버렸다.

하이엘프는 세계수의 권속으로 태어나 세계수의 지식을 물려받는다.

태고부터 살아온 존재의 지식을 물려받았다면 그의 머릿속에 어쩌면 저주의 해법에 관한 단서를 알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손을 댔다. 저주를 풀 수 있다면 무엇이든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방심하고 있던 엘프를 습격해 그의 머릿속을 뒤지고 엘프의 지혜를 구하려 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세계수의 자식에게조차도 신의 저주를 풀 해답 따위는 없었지만.

“그러니 이제 나는 공주를 기다릴 수밖에 없지.”

그녀가 무언가를 해 주기를. 망가진 나의 세상을 구해 주기를.

이마를 어루만지던 손이 소망을 품고 떨어진 순간, 내내 구름에 갇혀 있던 달이 빠져나오면서 위대한 자의 옆모습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막힌 숨을 들이켜며 벌떡 깨어난 이즈는 자신의 허름한 진료소 바닥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돌아왔는지는 대수롭지 않다. 뇌리에 남은 건 또 당했다는 더러운 생각뿐.

정확한 것만 세어 보면 둘, 애매한 것까지 더하면 셋. 너무 여러 번 당해 본 경험이라 이제는 이가 갈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역시나 범인은 근처에 있던 게 맞았다.

* * *

코트 깃을 높이 세워 얼굴을 파묻고 베레모까지 푹 눌러쓴 채 태리는 검은 숲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를 걸어 지나쳤다.

그토록 고대하고 고대하던 언데드 토벌 당일이었다.

왕가의 정원이라 불리는 왕묘를 목전에 두고 대륙 각지에서 몰린 인파가 입장을 대기하고 있다.

숲에서 가장 가까운 구시가지는 이미 예전부터 모험가와 용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호텔 역시 일찍부터 만실이라 안시가 배부른 금화 주머니를 들고 좋아하는 것을 지난 며칠간 보아 왔다.

듣자 하니 타국의 어느 부유한 재력가가 오늘의 토벌전에서 가장 용맹을 떨친 자에게 상금까지 걸었다고 하니, 소문난 잔치에 명성뿐 아니라 먹을 것까지도 많아진 셈이다.

사람들의 의욕은 하늘을 찔렀고 저주받은 숲은 오랜만에 건강한 에너지가 가득 흘러넘쳤다.

‘몬스터에 뒤덮여 쇠락한 왕국이 이런 엉뚱한 방향으로 호황과 번영을 누리게 되다니. 세상일이란 알 수가 없다니까.’

아수라장 속에서 스스로 강자임을 입증해야만 명성과 상금을 가져갈 것이다.

‘그래, 열심히들 해라. 힘내 줘. 응!’

혼자 해결을 봐야 할 퀘스트를 이렇게까지 온 우주가 힘을 다해 도와준다는데 솔직히 너무 기뻐서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흥분에 찬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그녀는 그들이 이루고 있는 파티의 구성과 특성들을 흥미롭게 탐색하며 돌아다녔다.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건 단연 높은 근력과 다양한 무기술을 지닌 전사. 거기에 길을 찾고 함정을 설치하는 도적이라거나 적의 뒤를 노리는 잠입자, 회복술을 지닌 성직자도 끼어 있으며 타 대륙권에서부터 섭외한 이국적인 외양의 주술사와 퇴마사들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장관인 것은 완벽한 진형을 갖추고 선 채 출정을 기다리는 발로란의 성기사단이었다.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신성력까지 겸비한 제국 최정예 병력. 존재 자체로 제국의 힘과 위엄을 상징하는 군대.

중무장한 기병 1천 기로 타국의 영지 수십 개를 복속시키고 깃발을 꺾었다는 우스갯소리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저리 빳빳하게 각이 잡힌 모습을 보니 어쩌면 그게 농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뭘 이렇게까지 공을 들인 거야?’

왕묘의 지형과 특성에 맞춰 재편제된 기사단은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와도 같았다.

전방의 주력 부대를 제외하고도 사전 정찰을 맡을 수색대, 진입에 필요할 시설물의 설치 및 해체를 담당할 공병 부대, 물품 조달과 부상자의 치료를 도맡을 보급 부대에 이르기까지 편성조차도 완벽하다.

몸 전체를 덮는 판금 갑옷이 아닌 어깨와 가슴. 배, 팔뚝, 무릎 관절 정도만을 가리는 부분식 보호구를 착용한 것이 다소 특이했는데 아마도 기병이 주력인 본인들의 특기를 살릴 수 없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몸에 가해지는 중량을 대폭 낮춘 것으로 보였다.

‘이런 식으로 기동력을 올리겠다?’

몸이 가벼워지면 말을 탈 수 없어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이동 속도를 낼 수 있다. 다른 집단에게 전투의 우위를 내주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엿보이는 한편, 그들 또한 이번 토벌전에 상당한 수고를 들였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클로드는 어디 있지?’

누구의 명령에 의한 결과물인지는 뻔해서 태리는 눈부신 흰빛과 금빛의 망토 사이에서 문제의 남자를 찾으려고 발꿈치를 들어 기웃거렸다.

별안간 일대에 자잘한 소란이 번졌다.

웅성거림은 이내 한 방향으로 밀집되더니 길의 끝에서부터 파란색 로브, 빨간색 로브, 검은색 로브…… 갖가지의 색색깔 로브를 걸친 마법사 군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는 번쩍이는 날붙이 같은 것은 없었지만 대신 치렁치렁한 장식이 달린 스태프와 그보다는 다소 투박한 완드, 혹은 작고 휴대하기 좋은 지팡이가 잡혀 있다.

오랫동안 은거하던 옛 영광의 세력. 대륙 최초의 마법사 일족이자 신비로운 도시왕국의 후예들.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그들이 다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이자리스의 마법사들이다.”

“저거 진짜야?”

“진짜 그들이라고?”

봉인되어 있던 전설을 뚫고 나타난 것만 같은 마법사 군단은 신성 기사단만큼이나 위용이 드높고 강력한 돌풍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그 선봉장을 이끄는 건 악독스럽기로 소문난 독을 파는 찻집 주인.

늘 입고 있던 화려한 드레스를 벗고 보랏빛 로브를 걸친 멋진 친구의 모습에 태리는 폴짝폴짝 뛰며 양팔을 높이 흔들었다.

“브리짓! 브리짓, 여기야!”

두리번거리던 브리짓은 태리를 발견하곤 수십 명의 마법사들을 이끌고 우르르 이동했다.

누구라도 말을 걸면 죽이겠다는 것처럼 엄숙, 근엄, 진지의 자세를 유지하던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공주님을 발견하더니 단숨에 돌변해선 콩콩대는 걸음으로 다가와 꽃이 핀 얼굴로 그녀를 빙 둘러쌌다.

“공주님, 공주님. 잘 지내셨어요?”

“공주님, 공주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오늘은 어쩜 이렇게 귀여우세요? 아 참, 매일 귀여우셨지만!”

“악! 누가 이렇게 밀어 대? 아주 그냥 다들 알은척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네! 전부 나와! 내 할 말이 제일 중요하다고!”

순식간에 뒤로 밀려난 브리짓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모두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서로 얼굴을 들이밀며 태리에게 주섬주섬 뭔가를 안겨 주느라 바빴다.

“이건 5백 년 된 저희 집 가보인데 행운을 올려 주는 반지랍니다! 부디 착용해 주시겠어요?”

“이 환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서리 불꽃의 정수라 불리는 것으로 삼키면 주문력이 대폭 증폭되는 귀한 재료로만 뭉쳐 놓았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예전에 어느 던전에서 채집하신 건데…….”

“공주님의 신발에 보호용 룬을 새겨 드릴게요! 제가 제발 도움이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분위기를 잡던 게 우스울 정도로 그들은 바리바리 싸 온 보따리를 풀며 태리를 챙기기에 바빴다. 집안의 가보나 전설급 보물들을 선뜻 안기면서.

태리는 그런 그들의 어리광을 받아 주면서도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근데 다들 너무 많이 온 거 아니야? 위험할 텐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위험하니 더욱 와야지요. 예나 지금이나 저희가 목숨을 거는 이유는 이자리스를 지키고, 공주님을 지키고 싶은 마음 때문이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어요.”

“이곳에 언데드가 많아진 건 다 저희가 제때에 죽은 이들의 장례를 치르기 못 했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은 땅에 묻히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제 그만 같은 식구의 시신을 마무리해 주러 갈 때도 되었습니다.”

“아…….”

빌이 표현하길 저주받은 숲에 쌓여 있는 죽은 마법사들의 시체 구덩이……라고 했었던가.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파묻기에만 급급했던 그날의 장면들이 선명하게 전해지는 것만 같아 태리는 목구멍이 따끔따끔해졌다.

난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당신들은 정말 용기 있고 강하구나.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폐허를 지켜 가며 지금까지 버텨 왔는지 알 것만 같았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단이 넘치고, 그러면서도 필사적인 사람들 앞에 태리는 덩달아 가슴속의 심지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들과 함께 있으면 늘 이렇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허우적거리며 가라앉던 제 등을 넘쳐흐르는 파력으로 밀어 올려 준다. 오로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어떻게든 해내고 만다.’

초기의 목적은 원래 몸으로의 귀환이었지만 거기에 강력한 동기와 의지가 더해졌다. 망한 나라를 땜질해서 고쳐 보겠다는 게 아니라 이들에게 어떻게든 고향을 돌려주고 싶어진 탓이다. 더 이상 방랑하거나 숨지 않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도록.

“걱정 마. 내가 반드시 성공해 낼게. 약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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