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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속 터져. 태리는 한숨을 쉬며 넘어지면서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로 모아서 쓸어 넘겼다.
한 발짝 물러선 거리에서 그녈 바라보던 클로드는 그 모습에 생각을 잃은 것처럼 얼굴이 멍해졌다가 손끝을 떨며 이성을 깨웠다. 저런 사소한 모습 하나에 이 정도로 속이 울렁거리는 게 정상인가 싶으면서도 살면서 저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봤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애써 합리화중이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망설이던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펼쳐진 그의 손바닥 위에는 작은 방울이 달린 머리끈이 올려져 있었다.
“뭐예요.”
“오다가 주웠―”
“어느 길로 오면 이런 걸 줍는데요?”
“그건 나도 잘…… 아니, 그냥 주머니에 있어서…….”
웃기시네. 돈 주고 샀겠지. 심지어 어떤 걸로 골라야 할지 고민한 티도 나는데. 거절당할까 봐 말투가 처져 있긴 했지만.
태리는 머리끈을 한 번, 조마조마한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보다가 헛웃음을 비틀었다.
이렇게나 잘 들키는 진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무슨 주인공이야. 어떻게 이런 남자가 주인공이고 무슨 수로 드래곤에 맞서서 세상을 구할 거냐고.
받지는 않고 말없이 집요하게 째려보자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한다.
그런 순수함이 걱정이 되면서도 태리는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기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말았다.
취중 고백에 섞여 그가 속삭였던 감정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이 소소한 순간, 순간마다 계속 확인받게 되니까. 신중하고 주의 깊은 눈빛들과, 다 큰 남자가 주머니에서 방울머리끈을 꺼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들로.
그녀가 손끝으로 잡아 머리끈을 가져가자, 닿은 부위가 간지러웠는지 클로드가 제 옷에 손바닥을 벅벅 문질렀다.
끈으로 묶은 긴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움직이는 걸 바라보던 그에게 마침내 차분한 음성이 떨어졌다.
“클로드.”
머릿속에서 폭탄이 펑 터진 것처럼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그렇게 된다. 덩달아 놀란 태리가 살피듯 다가왔고 클로드는 완전히 무너진 표정으로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셔서.”
목소리가 끊기듯이 잘 나오지 않는 건 턱 밑의 맥박이 심하게 뛰고 있어서다. 성대의 움직임을 방해할 정도로 요동을 쳐서 그 흔들림이 입술에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원래 잘 부르지 않으시니까.”
“아…… 그랬나? 그렇, 네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아, 진짜 내가 왜 그랬지.”
혼자서 골몰히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감정에 이끌려 불렀으니 총독이라는 직책 대신 무심코 그의 이름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그는 처음부터 줄곧 그렇게 친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미묘해진 공기 속에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둘 다 눈빛이 헛돌았다. 볼이 화끈화끈해지는 게 민망해서 태리는 반사적으로 좀 큰 목소리를 냈다.
“아무튼!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냐면. 그게 그러니까 자꾸 신경 쓰이게 근처에서 맴돌지 말라고요. 기억이 안 나는 건…… 그만 됐으니까. 전처럼 지내요, 그냥.”
연락도 뜸해지고, 전처럼 자주 찾아오거나 말을 걸지도 않는다. 이게 그와의 지난 며칠간의 기록이었다. 그렇다고 그는 결코 무심하지도 않았지만 거기에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와의 관계에선 그런 일이 처음이라 오히려 더 불편했다.
뒷말을 얼버무리고 황급히 돌아서려는 그녀의 손목을 클로드가 성급하게 붙잡으며 외쳤다.
“아, 아닙니다. 났습니다, 기억!”
목부터 귀까지 잔뜩 달아올라 만지면 열이 날 것만 같은 부끄러운 얼굴이었지만 잡은 손목을 놓지 않고 있다.
어미 잃은 양처럼 안절부절못하던 눈동자가 간신히 태리에게로 고정됐다.
“기억이, 났다고요?”
“예. 나긴…… 났는데.”
“그럼 더 빨리 왔어야죠. 혹시 거짓말?”
“아니!”
신음 같은 한 마디를 내어놓고 그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잊었던 일들은 대부분이 생각이 났다. 그러나 생각만 나면 그녀를 다시 찾아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기억을 되찾은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클로드는 무서웠다. 겁이 났다.
고백에 대한 대답을 듣는 게.
당연히 거절하겠지. 거절당할 게 뻔하지 않은가. 당연한 일인데도 그녀의 입으로는 듣고 싶지 않아서 찾아오지를 못했다.
직접 만날 자신은 없는데 안 보고는 죽어도 못 버티겠고. 의도하지 않게 곁을 맴돌게 된 건 그런 연유였다. 비겁한 행동인 줄 알면서도.
“대답을 들으려니 자신이…… 없어서.”
어렵게 연 서두를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말끝이 쳐졌다. 풀이 죽는 느낌.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속눈썹에는 힘이 없다.
늑대의 털처럼 강건했던 회색빛 눈동자가 부셔질 것처럼 흔들거린다.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조금이라도 괜찮은 남자로 보일지 고민만 하다가 입술을 수없이 달싹이고 다물길 되풀이했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목격하곤 태리는 호흡이 약간 가빠졌다. 무엇에 대한 대답이고 무엇에 대한 자신감을 의미하는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고백을 자각한 이후의 그를 보는 것. 그건 그녀에게도 마찬가지로 지나친 자극이었다.
‘진짜 기억이 날 줄은 몰랐는데.’
그래, 그의 말이 맞다. 그만한 고백을 들었으면 이쪽도 그에 대한 답을 해 줘야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떠한 미래도 약속할 수 없는 상대에게 무슨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내가 뭔가를 줄 수 있기는 해?’
아래로 흩어지는 모래성처럼 현실의 찬바람을 맞은 눈동자가 허공에 맺힌다. 들떴던 마음이 조심스레 침묵 속에 잠기면서 빠르게 뛰던 심장도 서서히 진정세로 돌아왔다.
그와 소리 없이 마주 서 있는 지금이 무척이나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실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처분을 기다리듯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에게 태리는 그보다 더 자신 없는 손을 뻗어 그의 옷 끝을 조심조심 쥐었다. 정직하고 순수한 남자는 손에 잡히는 천 자락마저도 부드럽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저기, 클로드.”
또 한 번 이름으로 부르자 순식간에 멍청해진 표정이 눈에 띈다.
그래, 이 시간은 좀 많이 즐겁고 행복하네. 구경하는 걸로도 즐거워서 자꾸 부르면 중독이 되겠다 싶었다.
“우리 그냥 내일도 볼까요?”
가볍게 쥐었던 천을 조금 세게 힘을 줘 움켜쥐어 본다. 괜히 새어 나가 말 속의 무언가가 그에게 전해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도 됩니까?”
착하고 순진한 이 사람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이게 어떤 뜻인지.
좋아한다고 했던 너의 말은 무효라고. 그런데도 헤어지고 싶지는 않다고. 이렇게 질 나쁘고 비겁한 뜻이란 걸 절대 눈치채지 못하겠지.
입이 환하게 벌어진 얼굴이 태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미안함의 크기를 아프게 키웠다.
“뒤에 숨지 말고 옆에 와서 걸어요.”
먼저 돌아서서 갈 길을 가자 신이 난 것만 같은 남자가 바짝 다가와 붙었다. 그것만으로도 체온이 올라간 것처럼 곁이 따스해졌다.
* * *
‘구름이 많이 끼었네.’
밤 열두 시를 알리는 먼 곳에서의 종소리를 들으며 빌은 도서관의 입구를 닫아걸었다. 이미 일찍부터 내부에는 이용객이 없었다. 하지만 자정까지 열어 두는 것은 그냥 오래된 습관일 뿐이다.
그의 권능으로 밝혀 두었던 모든 등불을 꺼트리자 홀에는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하늘의 달만이 유일한 빛이 되었다.
보름달도 아닌 데다가 구름이 자욱해 그나마도 오늘밤은 유독 어둡다. 그러나 용에게는 그다지 제약으로 작용하지 않아 그는 어두운 길에서도 익숙하게 철제 난간을 짚고 회오리 계단을 타고 올랐다.
통통 뒤꿈치를 딛는 그의 작은 발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아니, 분명히 그랬는데 빌이 한 층을 모두 오르고 층계참에 다다른 순간 천장에서 암살자가 뚝 떨어졌다.
“뭐냐. 지 집인데도 살금살금 다니네.”
여상한 말투와 달리 자객은 그의 목에 물결처럼 굽이치는 모양의 단검을 깊숙이 갖다 대고 있었다.
‘이건…… 엘븐 나이프.’
고루하다고 할 정도로 오래된 형태의 단검은 더는 알아보는 이도, 사용하는 이도 극히 일부가 된 옛 유물이었지만 빌은 보는 순간에 구분해 냈다.
이 무기의 이름은 엘븐 나이프. 엘프들이 만들어 그들만의 전유물처럼 사용했기 때문에 그러한 명칭이 붙었다. 그렇다면 사용자가 누구일지도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는 바였다.
“여기 도서관의 주인은 장서 수집에 미친 중독자라는데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소년의 모습이라는 얘기가 있더라? 대부분 치매에 걸린 노인네가 하고 다니는 헛소리 정도로 취급하는 모양이지만 수상하니까 확인해 보러 안 올 수도 없고 말이야. 응?”
“…….”
“야.”
“…….”
“너 나 만난 적 있지? 하도 모르는 척 얌전을 떠니까 헷갈릴 뻔했잖아. 내가 못 알아볼 줄 알았냐? 나 납치해다가 공주 괴롭힌 놈들 쏴 죽이도록 시켰던 거. 그거 너였잖아, 이 자식아.”
소년을 쫓아가는 것처럼 잠입해선 도서관 문이 닫힐 때까지 이즈는 이곳에 완벽히 숨어 있었다. 정확히는 내부를 샅샅이 수색하면서 이 소년을 관찰하고 지켜봤다. 그리고 이놈을 어디서 봤는지 똑똑히 기억을 해내고 만 것이었다.
그때도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나는 놈이라고 여겼었는데 역시 한번 감이 좋지 않았던 놈은 다시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주 녀석, 수상한 놈이 있으면 재까닥 얘기를 하랬더니만.”
말을 하느라 손의 각도가 틀어져 의도하지 않게 더 위험한 쪽으로 아이의 숨통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손등으로 느껴지는 건 소년의 낮고 작은 날숨.
겁을 먹은 게 아니라 명백히도 그를 귀찮아하는 기색이었다.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날벌레 때문에 얼굴이 간지러운 것처럼 성가셔하고 있다.
귀찮? 감히 날 귀찮아 해?
기분 나쁜데 그냥 끝내 버릴까. 이즈는 고민했고 고민은 길어지는 법 없이 얇은 칼날이 목줄기의 동맥을 내달리는 것으로 실현이 되었다.
혈관을 보호하는 살갗은 너무도 연약하고 그에 반해 예리하게 벼려진 칼날은 손 쓸 수 없을 만큼 강하다. 그러니 쓰윽 긁히듯이 찢어졌어야 마땅했는데 이즈는 하지 못했다. 간단히 막혀 버렸다.
“엘프들은 지혜롭고 아름답지. 하지만 일부는 난폭하기도 해. 아마 오랫동안 적수가 없었기 때문일까? 원하는 걸 쉽게 얻다 보니 어쩌다가 가끔씩 하는 일을 방해받으면 때때로 그렇게 구는 게 아닐까 싶어.”
“엘프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여.”
“너희 종족이 대체적으로 욕심이 없는 건 천만다행이야. 안 그랬다면 엘프의 난폭함은 진작에 세상에 널리 퍼졌을 테니까. 안 그래?”
성질머리를 긁으려는 것처럼 소년은 그에 대해 논평하곤 두 손가락으로 잡고 있는 칼끝을 손쉽게 밀어 냈다.
“머리를 써. 수상하다면 굳이 그걸 확인해야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