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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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라니. 

이거…… 범죄인가?

눈깔이 벌게졌다는 지적까진 수용할 수 있었다. 그게 좀…… 좀 사실이긴 했으니까.

하지만 범죄라니.

안 그래도 태리에게는 실수를 한 게 있어서 죄지은 기분이 겹겹이 쌓여 있던 참인데. 심지어 아직 제대로 사과를 못 했는데.

다시 떠오른 호텔에서의 만행에 얼굴이 홧홧해져 클로드는 자신을 방어하듯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엘프와는 상종을 못 하겠군.”

그 말투가 꼭 ‘이러니까 엘프는’ 혹은 ‘하여튼 엘프란’과 같은 더러운 뉘앙스라 이즈가 발끈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거기서 왜 엘프 뭐시기가 나와? 이게 감히 인종 차별을 해?”

이제껏 이즈는 살면서 여기서만큼 엘프라고 차별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이 뻔뻔한 기사 놈이며 어느 찻집의 독물학자며 둘 다 그를 덜떨어진 유사 인류 정도로 취급하는데 아주 기가 막혀서 머리꼭지가 팽팽 돌 지경이다.

“정말 싫다, 너. 오늘 바로 뒤졌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귀쟁이. 넌 잘 때도 서서 자라. 죽을 때도 선 채로 죽도록 해.”

“하! 사실 공주 좋아하면서 표현도 못 하는 칼 찬 돌대가리가!”

정곡을 찔린 클로드가 그 즉시 귀신 같은 눈이 되어서 돌아서자 이즈가 히죽 웃었다. 잡히는 대로 던진 짱돌이 아픈 부분에 딱 적중해서 들어가니 기쁨이 넘쳐흐를 수밖에. 놈을 골려 줄 생각에 최대한 자극적인 문구들을 골라냈다.

“내가 그 공주님이 슬슬 마음에 들려고 하거든. 예쁘고 귀엽고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그때는 너 같은 삽질은 안 할 거야.”

“치근덕대면 산 채로 찢어서 땅에 묻어 버릴 거다.”

순진한 놈이 하는 말치곤 새삼 섬뜩한 말이었다. 강한 놈이 어울리지 않게 평화주의자인 것 같아서 얕보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적당히 센 척도 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왜 이래. 너 예전에 내가 공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했었잖아?”

호텔 식당에서 난동을 부리고 쫓겨났을 때의 일을 말하는 거였다. 그때 확실히 엘프는 그에게 공주를 좋아하냐고 물었었고, 당시의 클로드는 분명히 아니라고 답했었다.

“뭐? 아.”

그래, 그랬었지. 젠장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될 줄 알고 내가 왜…….

“……언제.”

“뭐야?”

“내가 언제. 그런 적 없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런 걸 인정할 머저리도 없다. 안 그래도 염치없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서 미치겠는 판에. 클로드는 죽어도 그러지 않았다고 잡아뗐다.

“이거 사기꾼 아니야. 뒤늦게 마음이 변했나 본데.”

“변한 게 아니라 제대로 본 거고.”

“그래서 고백했냐?”

“했……”

……지. 하기야 했지. 그러나 말이 끊긴 클로드의 얼굴은 좋지 못했다.

5층 난간에서 추락해 허겁지겁 호텔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그날, 태리가 일찍이 먹여 두었던 알 수 없는 숙취 해소제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반드시 기억해 내야만 한다는 그 스스로의 강박 관념 때문이었는지 술에 묻혀 있던 기억들이 싸늘한 통증처럼 되살아났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녀를 만졌던 것, 끌어안았던 것, 안고 놔주지 않았던 것. 결정적으로 좀 좋아해 달라고 매달렸던 것까지. 그를 절망에 빠트리기에는 차고 넘칠 만큼 충분한 양이었고 그날 밤부터 지금까지 그는 벽만 보이면 머리를 갖다가 박고 있는 중이다.

그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진짜 아니었는데.

그런 식으로 고백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좋아하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왜 하필이면 그런 최악의 방법으로 전달이 된 걸까. 더 좋은 시기에, 더 멋진 장소에서, 더 근사한 말로 전해도 모자랐을 마음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죽고 싶을 만큼 형편이 없는데 그녀가 그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를 떠올리면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래도 안 죽고 멀쩡하겠지만.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주위만 뱅글뱅글 맴돌고 있는 건 이런 연유 탓이었다.

자괴감에 사로잡힌 그의 표정을 읽은 이즈가 꼴좋다는 듯이 비웃었다.

“됐어. 네가 고백했는지 안 했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고백보다는 유혹을 해야 된다고. 유혹은 또 눈치 보면서 하는 게 아니라서 왕창 욕심 부려도 되거든. 욕심 부리면 또 얼마나 즐겁다고.”

“욕심 부리면 죽어야지.”

상념에 빠져 있던 클로드는 그 소리에 얼음물을 맞고 정신이 들었는지 갈고리 같은 손을 뻗어 이즈의 머리끄덩이를 콱 쥐어 잡았다. 누구 때문에 짧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치곤 여전히 긴 편이라 변함없이 틀어잡기에 좋았다.

“이게 미쳐 가지고 또 내 머리를 갖고 이래? 미칠 거면 곱게 미치자. 응? 곱게 미치자고.”

섬섬옥수 같은 엘프의 손가락이 클로드의 앞머리를 비슷하게 쥐어뜯었을 때였다. 거대한 풍압이 둘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더니, 닫혀 있었던 도서관의 문이 안에서부터 밀려 열렸다.

농약 먹인 잡초처럼 이걸 죄 뽑아 버리겠네 어쩌네 하며 옥신각신하던 남자들은 그쪽을 확인하곤 그대로 굳었다.

열린 문의 한가운데에서 태리가 자신의 허리밖에 오지 않는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너희가 왜 여기에 있어? 하는 경악한 표정으로. 눈치를 보던 놈들은 후다닥 상대방의 머리칼을 놓고 떨어지더니 또 동시에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는 소년에게로 시선이 못 박혔다.

이 애는 뭐지?

처음 보는 얼굴에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 연못가에서 목을 축이는 고아한 사자처럼 따스한 붉은빛의 눈을 빛내는 소년은 보는 순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우아한 귀태를 풍기고 있었다. 분명 어린아이의 모습인데 빚어내는 눈빛과 표정이 깊고 아름다워 감탄을 자아낸다.

반면에 빌의 눈가에는 눈앞의 놈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한 기색이 눈 깜짝할 새에 스쳐 지나갔다.

“잘 가. 언제든 또 오고.”

“으, 으응.”

실리안을 무척이나 닮아 있는 태리의 얼굴을 그리워하는 듯한 기색으로 올려다보던 빌은 작은 키, 작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폭 끌어안으며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사냥에선 몸 조심히 해야 해. 절대 혼자 다니지 말고, 알았지?”

여운이 남아 걱정과 염려가 한가득 실린 말투에도 태리는 움찔하며 더듬거리다시피 대답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작은 목소리로 똑같이 ‘잘 가.’라고 인사를 했는데 그게 얼마나 기뻤던지 빌이 꽃처럼 활짝 웃었다.

멈칫했던 남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 지점에서부터였다. 너무나 미소년 같은 외모에 너무나 연인 같은 인사를 듣곤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깨어났다.

“무례하군. 이분은 네 친구가 아니라 공주님이다. 공주님께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나. 예의가 없구나.”

“근데 이 꼬맹이. 낯이 좀 익다? 아, 어디서 분명히 본 것 같은데? 흠.”

아, 안 돼. 그러지 마아…….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아……. 태리는 말로는 하지 못하고 미미한 고갯짓과 눈빛으로 둘을 격하게 만류했다.

걘 드래곤이야! 여기서 제일 강하고 제일 무시무시한 드래곤이란 말이야! 절대 깝죽거려도 안 되고 덤벼서도 안 된다고!

그럼에도 둘은 멈추지 않고 소년에 대한 은근한 구박을 이어 갔다. 빌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비슷한 얼간이들이 똑같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주제에.’라고 보란 듯이 중얼대더니 마지막으로 태리에게 한 번 더 따스한 눈인사를 남기곤 그들을 개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런 기분 나쁜 꼬맹이가…….”

청력이 우월한 엘프는 당연히 다 들어 버렸다. 말릴 새도 없이 이즈가 문을 열어젖히며 따라 들어갔고 간발의 차로 그를 놓친 태리의 팔은 허공에서 허탕을 치고 허우적거렸다.

“아악! 안 돼, 돌아와! 돌아오라고!”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단명할 팔자다, 저건.

한 놈은 그렇게 자기가 죽을 자리로 찾아 들어갔다. 반면에 그보다 동작이 느렸던 다른 놈은 다행히도 말을 들어 먹어 그녀의 곁에 남았다.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던 태리는 마른 오징어처럼 긴장을 해선 제 눈치를 살피는 클로드를 발견하곤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드디어 나타나셨군?’

망측한 일을 저질러 놓곤 감히 내 슬리퍼 한 짝을 들고 도망친 이 괘씸한 주인공렐라. 클로드는 호텔에서 도망쳤던 그날 아침 이후로 한 번도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제 잘못이 떠오르면 뵙고 사과하러 가겠습니다, 라는 우울한 편지 한 장을 보내놓고는 줄곧 잠수를 탔다.

그런 주제에 또 어찌나 주변을 맴도는지. 외출할 때마다 몰래 숨어서 따라오질 않나, 그녀 혼자 사냥을 나갈 때면 위험한 게 없는지 변장한 채로 바지런히 경계를 서고, 한밤중에는 먹을 것을 문고리에 살그머니 건 다음 문을 두드리고 도망을 갔다, 이 남자는.

‘그저께는 테라스에 과일 바구니 두고 가다가 나한테 걸릴 뻔했지. 잡았으면 흠뻑 때려 주는 건데.’

무슨 멧돼지 잡아다가 마당에 갖다 두는 우렁각시처럼 구는데 솔직히 어이없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그를 힘줘서 노려보다가 일부러 찬바람이 쌩쌩 느껴지도록 팔을 탁 스쳐서 계단을 내려갔다. 뒤로 후다닥 간격을 좁히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대놓고 티 내지 못하는 꼴이 처량해서 또 삐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나도 몰라. 지가 아쉬우면 먼저 말 걸겠지.’

저렇게 쭈글쭈글해진 자신감으로 대체 어느 세월에 입을 열 건지 두고 볼 거다.

올라올 때는 조심스러웠던 걸음과 달리 태리는 내려갈 때는 땅을 차다시피 해서 속력을 냈다. 따라붙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헐레벌떡 서두르는 느낌이 났다. 그런데 지나치게 그쪽에 신경을 집중했던 건지 그만 마지막 한 칸에서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

넘어지면 무릎이나 조금 까지고 말겠지 싶었다. 그런데 헐레벌떡하는 것으로 느껴지던 기운이 갑자기 돌풍이 되어 돌진하더니 엎어지기 직전에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어떻게 이렇게 신속하지.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니 그걸 아까와 같은 째려봄으로 느꼈는지 클로드가 또 얼른 팔을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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