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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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과 광기, 재앙에 사로잡힌 몬스터들이 성에서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성과 숲을 파괴하기 시작한 마수들은 실리를 제거하고 그와 같은 마법사들을 진리의 입구로부터 몰아내려고 했다. 

“그게 바벨 신이 분노한 이유야?”

“너…… 바벨을 알고 있어?”

“그 일에 대해 징벌을 내렸다면, 그건 아마도 그의 영역이 아닐까 해서.”

진리의 신 바벨. 이건 태리가 그나마 사전에 쥐고 있었던 단서였다. 안다기보단 얻어걸린 것이지만 빌은 그녀가 그 신을 정확하게 범인으로 꼬집어 지목한 것에 크게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씁쓸하게 눈꼬리를 내리며 바벨의 입장을 대신 변호하듯 이야기했다.

“신이 위대한 것 같니? 하지만 신도 세계의 일부일 뿐이야. 너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깊은 곳까지 알고 있을 뿐인 그런 존재. 신이라고 해도 자신들이 만든 규율을 거스를 순 없어. 그가 징벌을 내렸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말은 묻지 않아도 되었다. 빌이 먼저 손가락을 모아 그 끝에서 타오르는 빨간 구체를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줄까? 태양신은 아주 오랫동안 너희에게서 가장 위대한 신으로 군림했어. 신 중의 신이었고 모든 신들의 우두머리를 자처했지. 하지만 이제 태양신이란 건 없어. 죽었어. 너희가 태양이 무엇인지 대해 깨달았기 때문이야.”

“…….”

“그렇게 규칙이란 게 생겨났지. 인간이 신의 격을 침범하는 일을 절대 금기로 삼기로. 진리를 깨달은 자를 절대 살려 두지 않기로. 그렇게 규칙을 정했어.”

살려 두지 않기로. 그 말이 경종처럼 위태롭게 태리의 귓속을 찔렀다.

실은 그동안 줄곧 마음속에만 품어 왔던 질문이 있었다.

실리안은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 게 분명하지만 그는 어떻게 죽은 걸까, 했는데.

새삼 그의 최후를 확인하고 나니 깊은 물속에 잠기는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저도 모르게 뒷걸음치는 그녀에게 빌이 다급한 손을 뻗었다. 옷깃을 잡은 소년의 손은 몹시 작았고, 간절했으며,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댐처럼 속절없이 휘청거렸다.

“미안해.”

“…….”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 때문이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을 거야. 그건 실수였어. 내 실수야. 바보같이 그게 내 친구를 죽이는 길인지 몰랐어. 정말 미안해…….”

원죄를 고하는 신자처럼 가냘픈 얼굴이었다.

절절하리만치 후회가 뚝뚝 떨어지는 감정 앞에 태리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서서 가만히 팔을 내주었다. 그 팔에 기대어 소년은 더 가엾이, 더 연약한 울음소리로 흐느끼며 용서를 구했다. 작은 구슬픔이 서러운 헐떡임이 될 때까지 내내.

숨이 끊어질 것처럼 소리 내어 울던 빌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축축하게 젖은 뺨을 문지르며 스스로를 추슬러 올렸다. 매달리듯이 붙잡고 있던 팔도 놔주었고, 반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이의 평범한 붉은 눈이 짐승의 것처럼 세로로 길쭉하게 선 것 같다고 느낀 순간 그가 또 하나의 사실을 고백했다.

“눈치챘겠지만 난 사람이 아니야. 드래곤이지.”

“……!”

아? 그걸 이렇게 쉽게 알려 준다고? 태리는 순간적으로 이상한 소리를 낼 뻔했다. 그만큼이나 놀랐다.

말할 수 없는 비밀과 말할 수 있는 비밀. 그중에서도 빌이 드래곤이라는 건 그의 입장에선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야만 예정된 스토리대로 정방향으로 굴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어째서…….

“수면기에서 깨어나 첫 유희를 나왔고. 그 뒤로 돌아가지 못한 채 계속 이곳에 머무르고 있어. 알고 있지? 저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

신의 징벌은 실리안의 죽음과 더불어 마법사들이 살고 있는 땅, 이자리스의 멸망이었으니.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 저주는 현재도 진행 중이었다. 숲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있음에도 몬스터의 씨가 마르지 않는 이유였다.

“숲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성이야. 이제까진 나 혼자 그곳을 지키고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내 유희의 시간은 곧 끝나 가. 그럼 난 다시 오랫동안 긴 잠에 빠질 거고 성은 무방비 상태가 될 거야.”

“…….”

“그 전에 서둘러 해주의 방법을 찾아야 돼.”

“너 혼자 거길 지켜 왔었어? 왜 그렇게까지―”

“나마저 떠났으면 이자리스는 저주가 실현되는 그날 그대로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을 거야. 영원히, 아무것도, 그 무엇도 살아남지 못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어. 너희는 실리가 사랑하던 모든 것들이야. 어떻게든 지켜 내고 싶었어.”

“그건…… 네가 사랑하던 것들은 아니잖아.”

“내게는 그렇지. 하지만 사랑에만 진심을 다하게 되는 건 아니잖아. 사랑이 아닌 마음에도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거잖아.”

이해해 줄 수 있지 않냐는 듯 빌은 턱을 끄덕였고 태리는 그제야 왜 그가 폐성의 보스로 게임 속에 등장했었는지를 납득하게 되었다.

생존한 마법사들이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클로드의 기사단이 도착해 황폐해진 땅을 돌보기 전까지 그 혼자서 쏟아져 나오는 마수들을 상대로 성을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유희의 기간이 다 되도록 떠나지 못하고 남아, 사람들이 올 때까지 외로이 계속해서. 단지 친구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을 그대로 보호해 주기 위해.

“사람들이 올 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었던 거야?”

“응. 그런데 혼자 저주를 해결을 해 보려다가 그만 실리에 대한 기억을 많이 잊어버렸어. 지금도 잃어 가는 중이고. 다행히 이렇게 책 속에 잠가 넣은 기억들은 다시 읽으면 회복할 수 있지만 이미 잃은 것들은 되찾을 수가 없어. 아마 너에 대한 것도 그렇게 잊게 된 것 같아.”

그러면서 빌은 또다시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하지만 태리는 진정으로 가여운 건 자신이 아니라 그라고 생각했다.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지박령이 되어 인간의 땅에 묶여 버린 대단한 존재.

그러면서도 저주를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 말했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고. 나 역시 오랫동안 해주의 방법을 찾았지만…….”

말끝을 흐리며 빌은 죄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누구보다도 이 참극을 해결하고 싶었던 건그 자신이었던 듯했다.

“네가 돌아와서 다행이야. 난 아주 오랫동안 저주를 풀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어. 이제 나는 나 자신을 구할 수 없어. 그러니 부탁해. 해주의 방법을 찾아 줘.”

말과 말 사이를 잇는 목소리가 물기에 얼룩져 일렁이는가 싶더니, 빌이 팔을 넓게 펼쳐 책장을 끌어안으며 울었다. 그것들은 책이 아니라 그가 간직해 온 친구에 대한 소중한 추억 전부였다.

“실리가 너무 보고 싶어…….”

사랑이 아닌 것에도 진심을 다할 수 있다는 말. 그것이 우정이나 추억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어떤 말인지 알기에 태리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차마 말할 수도 없다.

‘있잖아, 저주를 푸는 법은 이미 내가 알고 있어.’

그건 너의 죽음이야. 네가 죽는 순간이 이 이야기의 끝이라고.

차마 그런 말을 가여운 소년에서 할 수 있을 리가. 그런 것이 해결법이라고 기쁘게 들려줄 수 있을 리가. 안쓰러운 마음을 대신해 얕게 떨리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 * *

클로드가 도서관으로 향하던 태리의 뒤를 밟은 건 특별한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만취 사건 이후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으니까. 차마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지 그는 항상 그녀의 뒤의 붙어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였는데.’

다만 오늘따라 유독 그녀의 기분이 우울하게 느껴져서, 평소보다 좀 더 눈이 벌게져서 쫓아온 건 맞긴 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토벌전에 대비해서인지 최근의 그녀는 긴장하는 구석이 보여도 늘 열심이고 바빴는데 오늘은 뭔가가 달랐다.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길을 나선 채 가다가 멈추고, 또 가다가 한숨을 쉬며 이상한 책 한 권을 낀 채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저기를 왜? 저곳에 무슨 볼일이지?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그리고 그런 갖가지 가정들로 걱정하는 찰나의 순간에 타이밍을 놓쳐서, 그녀를 뒤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바로 코앞에서 문이 닫히고 말았다.

“이런. 놓쳤……”

“앗, 놓쳤잖아!”

“……?”

“응?”

뭐지. 뭔데 나랑 비슷한 말을……. 고개가 떨떠름하게 옆으로 돌아갔다.

옆 사람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는지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곧 정체를 확인하곤 눈이 쭈글쭈글하게 찌그러졌다.

“하, 또 너냐?”

클로드의 옆에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그와 똑같이 누군가를 미행 중이던 이즈리얼이 서 있었다.

이미 닫혀 버린 도서관의 거대한 양문형의 문고리를 한 짝씩 붙잡고 있던 남자들은 또 동시에 그것을 놓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뭔가.”

“넌 뭔데.”

“왜 따라왔지?”

“널 따라왔겠냐?”

“설마 공주님을 미행했나.”

“뭐야, 그럼 너도?”

“…….”

“…….”

그렇군. 이놈도군. 클로드는 더 말 붙일 것도 없이 오만 가지의 짜증이 서린 눈썹을 찌푸렸다.

왜 미행했느냐로 대화는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어야 했지만 묻기도 싫고 답하기도 싫으니 둘 다 그에 관한 건 그쯤 하기로 한다. 대신 닫힌 문의 기둥에 하나씩 기대고 서선 비슷한 모양새로 팔짱을 꼈다.

그냥 열고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흔적을 놓쳤으니 들어가면 이제 직접 찾아다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수색을 하다간 태리에게 발각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다음 계획은?”

“나한테 물어보는 거냐?”

“여기까지 쫓아왔으면 계획이 있던 거 아니었나.”

“에엥? 그냥 쟤 어딜 가나 싶어서 충동적으로 따라붙은 건데? 너처럼 눈깔은 시뻘게지지 않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다.”

“보고도 그대로 놔두긴 좀 그랬잖아. 애가 오늘내일하는 노인네처럼 걷는데. 그 꼴로 어딜 가나 했더니 이런 데로 들어오질 않나. 수상하지. 수상한 건 못 참으니까 쫓아와야 되는 거고.”

속이 끓고 있는 클로드와 달리 이즈는 되레 속이 편한 말투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충동 범죄에 계획이 어디 있겠어. 대충 상황 봐 가면서 저지르는 거지. 벽이라도 탈래?”

“범죄…….”

머리 아프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이즈의 얘기는 그런 뜻이었지만 클로드는 범죄라는 단어에 가슴이 관통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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