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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익숙한데, 홀로 놀란 것이 눈에 띄었던지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에게 한 여자아이가 다가와 얼굴을 내밀었다.
“우와, 혹시 공주님 아니세요?”
손가락을 입에 대고 갸우뚱대며 묻는 게 너무 깜짝해 태리는 덩달아 깜짝 놀란 흉내를 내 주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러자 살이 통통하게 오른 얼굴이 환히 밝아지더니 어른들에게서 배워 온 ‘귀한 분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어쩐 일이세요?’ 하는 고리타분한 인사말로 대응을 한다.
귀여워. 태리가 웃음을 삼키며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난 여기에 책을 반납하러 왔어. 빌……이라는 친구한테서 빌렸는데 어디로 돌려줘야 하는지 지금 찾고 있는 중이야.”
“빌이요?”
놀랍게도 아이는 ‘빌’이라는 이름에 크게 반응했다. 뭔가를 기대하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별안간 태리의 치맛자락을 잡더니 중앙의 회오리계단으로 잡아끌며 신나게 뛰어 올라간다.
다람쥐처럼 짤막한 다리로 얼마나 빨리 오르던지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던 태리는 금세 도서관의 꼭대기 층에 다다라 버렸다.
“빌! 공주님이 빌을 만나러 오셨대!”
유리로 된 돔 천장을 머리에 두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는 최상층에는 책상에 앉아 깃펜을 쥐고 사각사각 글씨를 쓰고 있는 소년이 홀로 앉아 있었다.
여자아이의 말투를 거리낌 없이 받은 빌은 그와 비슷한 또래처럼 소꿉장난 같은 대화를 주고받더니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소녀를 배웅했다.
그러곤 밝은 미소를 띤 그 얼굴 그대로 태리를 향해 돌아섰다.
“……!”
단둘만이 남자 잠깐 잊고 있었던 긴장감이 등줄기를 기어 올라온다. 태리는 기합이 잔뜩 들어간 손으로 그가 빌려준, 정확히는 안기다시피 했던 마법서를 두 손으로 깍듯하게 내밀었다.
“이거 돌려주려고. 무척 도움이 됐어. 고마……워.”
“응.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
“아하하, 별말……씀…… 을.”
반말과 존댓말을 번갈아 쓰는 걸 보곤 빌은 픽 웃더니 대뜸 ‘검사해 볼까?’라며 책상으로 돌아갔다. 빈 종이 위에 순식간에 복잡한 수식을 그린 그가 그것을 한쪽 벽에다 붙여 두곤 호출하듯 손짓했다.
“자, 이걸 연산해서 구동시켜 봐.”
“아니, 이런 식으로 검사를 하는 게 어디 있어…….”
“못 해?”
“아니, 해, 해 볼게요. 그럼 나도 종이를.”
“암산으로 해.”
“뭐?”
“매번 편히 앉아서 마법식을 풀이할 순 없어. 연산 속도가 느리면 고위 마법에 접근이 안 되니 실력은 늘지 않고 제자리일 거고, 평생 간단한 마법밖에 쓸 수 없겠지. 그러고 싶은 건 아니지?”
“그거야―”
“그러니 처음 만나 보는 마법이라도 암산으로 파훼하는 습관을 들여야 해.”
선생님 같은 말을 하면서 은근히 등을 밀어 대서 태리는 꼼짝없이 종이 앞에 서게 되었다.
8성이니 9성이니 하는 말로 마법사의 능력을 가르는 건 대체로 마법식의 정교함과 밀집도이다. 그런데 빌이 한 장의 종이 위에 몇 분 되지도 않아서 그려 낸 술식은 한눈에 보아도 까마득하게 높은 윗줄에 자리하고 있었다.
드래곤이란 게 본래 마법에 능한 존재란 건 알고 있었지만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식은땀이 났다. 이런 녀석이 최종 보스였다는 소리니까.
태리는 끙끙거리며 낱장의 종이 앞에서 무려 한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소비했다. 몇 번이나 중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드래곤이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게 무서워서 꾸역꾸역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해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풀어낸 술식 위에 손끝으로 마나를 흘려보내자, 마법진에 빛이 들어오면서 종이가 붙어 있던 벽장이 옆으로 차곡차곡 접혀 가며 밀려 나갔다. 다른 방으로 통하는 공간이었다.
“후우.”
“잘했어. 봐, 할 수 있다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렸지만 앞으로 더 성장해서 뛰어난 경지의 마법사가 되면 이런 것쯤은 순식간에 풀어낼 수 있을 거야.”
“뛰어난 경지란 건 뭐야?”
“너희들 말론 9성, 10성쯤 되려나.”
“그런 건 어떻게 될 수 있어?”
가벼운 질문에 빌이 들어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말했다.
“글쎄, 자아를 잃는 듯한 상실을 겪거나 그걸 뛰어넘는 깨달음을 얻거나?”
“결국 못 된다는 소리네.”
대놓고 실망한 어투를 내자 빌이 키득거렸다.
“경지를 올리는 것보단 숙련도를 올리는 데에 집중하는 게 더 올바르다고 생각해. 그건 시간과 노력만 들이면 누구든 얻을 수 있거든. 보니까 너는 마법에 대한 숙련도가 굉장히 낮은 것 같던데 높은 서클의 마법보단 낮은 단계의 마법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훈련을 하도록 해. 알겠어?”
“나는 딱히 마법에 욕심이―”
“알겠어?”
“……알겠어.”
뭐야,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은 거야. 태리는 입을 삐죽대다가 어두컴컴한 통로를 따라 들어가며 또 조심스럽게 말을 붙여 보았다. 아무래도 이 큰 도서관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건 빌 하나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여기서 혼자 일하는 거야?”
“일? 일은 하지 않아. 혼자는 맞지만.”
“그런데 왜 도서관에 있어?”
“그야 나는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진리와 지식을 사랑하니까. 네 아빠도 그랬어. 실리도 지식에 대한 탐구 열정이 대단했지.”
“그건…… 마법사는 다 그래.”
학식에 관한 마법사들의 허영과 탐구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체로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관은 어디든 다 그런 법이다.
연구에 집착하고 세상의 법칙을 밝혀내는 데에 인생을 몰두하는 직업이며 그만큼 지식의 깊이가 대단했다. 또한 이것이 마법이 대단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탐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자연을 이해하는 백마법을 배우게 되고, 생사의 경계를 발견하는 흑마법을 익히게 됐으며, 차원 너머의 악마법에까지 손을 대게 되는 족속들인 것이다.
“그래, 너희는 다 그렇지. 그래서 좋아해. 난 그런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거든.”
그런 마니악한 모습이?
그것 참 고약한 취향이라고 반문할 차례였다. 그런데 좁았던 길이 단숨에 넓어지면서 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방이 나타난다. 건물의 어디쯤인지 짐작이 가지 않도록 창문이라곤 하나도 없이 오로지 책장만 가득한 곳이었다.
“이곳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건 네가 처음이야.”
환영한다는 작은 미소. 빌은 책꽂이에 하나 남아 있던 빈 공간에 태리에게 빌려주었었던 책을 끼워 도로 넣었다. 책은 마지막 퍼즐처럼 알맞게 딱 맞춰져서 들어갔고 그로서 다시 완벽한 그림이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곳에 보관된 모든 책들이 실리안에 관한 기록이란 걸 태리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책들은 전부 다 네가 쓴 거야?”
“응.”
“왜 이런 걸 남기는 건데?”
“잊어버리기 전에 써 놓은 것들이야. 내 기억, 아니 내 추억들을 이 단단한 책 속에 가두는 거지. 실리에 관해 무언가를 잊는 건 이제 죽어도 싫거든.”
화사한 톤으로 말하지만 입김에 옅은 성에가 어리듯 빌의 눈가가 조금 붉어진 게 느껴졌다. 태리는 제자리로 돌아간 그 책 속에서 도저히 잊히지 않았던 첫 장의 글귀를 입 안에서 되뇌었다.
‘영원한 나의 친구 실리안 소네티를 생각하며, 라고 적혀 있었지.’
친구. 친구라.
“네가 정말 친구였어……?”
아빠라는 단어가 입에 익지가 않아서 생략하고 물었음에도 빌은 ‘응, 응.’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는 듯했던 얼굴도 다시 미소로 밝아졌다.
혼란스러워하는 태리의 반응을 당연하다고 여겼는지 빌이 추억에 젖듯 아련한 표정으로 과거를 꺼내 올렸다.
“실리는 별에서 부서져 나온 조각처럼 비범한 사람이었어. 세상의 모든 신비로움은 이자리스로부터. 정확히 그 말에 어울리는 남자였지.”
본래도 호기심 많은 마법사들을 좋아했던 빌에게 실리안은 그가 처음으로 사귀게 된 인간 친구였다.
용을 보고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구석이 없었던 마법사들의 왕은 마치 고독한 연구자와도 같아서 호기심과 열정으로 충만해 있으면서도 언제나 차분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그가 좋아 곁에 머무르게 되었다가 다시는 없을 우정을 쌓았다.
아무도 그녀에게 실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는 게 속상했는지 빌은 더더욱 열띠게 설명했다.
“마법도 뛰어났고 심성도 곱고 착했어. 아는 것도 얼마나 많은지 대화를 나누면 낮과 밤이 언제 지나갔는지도 알 수 없었지. 서재에는 늘 희귀한 책들을 한가득 가지고 있어서 내게 보여 주곤 했어. 대지 계열 마법이 대단해서 성 앞의 장미원에는 사시사철 꽃들이 만발했었다는 걸 알아?”
“아, 아니. 미안…… 나는 잘 몰라.”
“그래. 잘 모를 거야. 이제 아무도 그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니까.”
먹구름에 가려진 햇살처럼 즐겁게 재잘대던 낯빛이 한순간에 시체처럼 훅 흐려졌다.
광란의 대마법사. 저주를 불러온 비운의 왕. 실리안의 이름은 그렇게 덧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다.
다시금 붉게 차오른 눈이 구슬픈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그날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어?”
그날이라면 저주가 불어닥친 날 말인가. 이것도 아는 게 없는데. 태리는 주워들은 정보들을 고르고 골라 가장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왕이 신의 금기를 침범해서 벌어진 일이라고만 들었어. 도대체 금기란 게 뭐야?”
순간 소년의 표정이 자조적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차가운 비소가 깔렸다.
“인간이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면 그게 무엇이든 신에게는 금기가 되는 법이지.”
그러더니 기억을 더듬듯 책등을 쓸어 만지며 안의 내용들을 읽듯이 훑었다.
“그는 신의 영역을 침범한 적이 없어. 다만 내게서 창조의 말을 배웠을 뿐이지. 그건 고대의 시대에 존재했었던 언어였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말일 뿐이야.”
그것을 왜 가르쳤냐고 묻는다면 함께 지식을 연구하고 탐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그 이유이자 대답이 될 뿐이다.
호기심 많은 친구가 좋아서, 너무 좋아서 자신이 품은 귀퉁이마저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도 총명했던 친구는 창조의 말을 익히고 곧 계몽의 눈을 떴다.
“난 그저 언어를 가르쳤을 뿐이야. 깨달은 건 그 스스로지. 정말 대단하고…… 뛰어나지 않니?”
과거를 회상하며 빌은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상위 기적이라도 얻은 줄 알았었던 그때. 실리의 이마 정중앙에 세모꼴의 낙인이 생겼던 그날.
그러나 신의 눈동자를 닮은 그 반점 속에 비치는 건 푸른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 드넓은 대지와 뜨고 지는 달과 별…… 세상 그 자체를 품은 진리였다.
쾌감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몸을 부르르 떤 빌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읊조렸다.
“그때 알았지. 그가 인간의 범주에서 아주 조금, 벗어나게 되었다는 걸.”
다만 그것이 이 나라에 파멸을 불러오리라곤 대비하지 못했었다. 인간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영역에 발을 댄 침입자를 몰아내기 위해, 그 즉시 그를 제거하기 위한 신의 징벌이 내려왔다.
“무지의 단계로 되돌리려 했겠지. 그가 가진 지식을 빼앗고 다시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리고 싶었을 거야. 하지만 알고 나면 그 이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어. 그러니 어쩌겠어. 죽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