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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몸에서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어깨를 잡은 힘에 놀라서 물러났다가 다시 살며시 손을 겹쳐 올려 보곤 확신했다.
‘신성력으로 해독을 하고 있네?’
그녀가 소리 없이 놀랐다.
클로드 본인은 아마 자기 자신을 신성력이라곤 콩알만큼도 없는 성기사 짝퉁쯤으로 여기고 있을 테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는 신성력이 없는 게 아니라 단순히 ‘지금은’ 꺼내 쓰지 못하도록 막혀 있는 상태일 뿐이었다.
능력 봉인이 게임의 2회차 때 풀릴 예정이라. 1회차에서 진엔딩을 보면 두 번째 플레이에서는 한층 더 강화된 능력치의 주인공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태를 보니 신체에 치명적인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그런 제약과는 상관없이 잠재 능력이라도 본능적으로 운용을 하는 것 같았다.
아, 이래서 그동안 수차례 있었던 브리짓의 독살 시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구나.
태리는 그의 작은 비밀을 모른 척하며 팔을 잡고 흔들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물 좀 마셔 볼래요?”
제대로 받아 마시기는 힘들 것 같아 그녀는 물을 머금은 손수건으로 그의 입술을 축이듯이 적셔 주었다.
눈을 끔뻑거리며 바라보던 클로드는 피부에 찬기가 닿자 점점 더 또렷하게 그녀에게로 초점을 맞췄다.
그러더니 이제 더는 위험한 것은 없다고 안심이라도 한 건지 불현듯 아낌없이 꺼내 쓰고 있던 신성력의 가동을 멈춘다.
그것을 기점으로 그의 얼굴이 수마에 휩싸이듯이 나른하게 풀리는 게 보였다.
‘몸 괜찮아요?’ 하고 물었더니 도리도리. ‘안시가 막 억지로 먹였어요?’ 하고 물었더니 입을 삐죽이면서 끄덕끄덕.
귀가 늘어진 대형견처럼 눈꺼풀이 아래로 축 처진 그가 실망감이 잔뜩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안 된대. 나는…… 나는 안 된대.”
“잘 안 들려요. 뭐라고요?”
뭐라고 꽁알거리는 건지. 태리가 귀를 가까이 대자 이번엔 좀 더 선명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불만이 한가득 들어찬 음성이었다.
“나는 왜 안 돼, 왜.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어떻게 하면 돼.”
당최 무슨 소리인지. 아니, 술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쓸모없는 짓이려나.
이해를 위해 애쓰는 대신 그녀는 어디서 묻혀 온 건지 모를, 클로드의 코끝에 붙어 있는 먼지를 손가락으로 콕 집어서 떼어 냈다.
그러자 딸꾹질하는 것처럼 그가 몸 전체로 크게 움찔하더니 너무나 눈 부신 걸 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얼마나 집요했냐면 술을 마신 게 제가 아니었음에도 볼이 화끈하게 달궈질 정도였다.
민망해진 태리가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커다란 손이 턱 끝을 붙잡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넌 절대 공주가 아닐 수가 없어. 공주 같지 않을 수가 없다고.”
“취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고집이 세지네요. 말도 많아졌어요.”
“진짜야.”
“알겠어요.”
“진짜라고. 진짠데 왜 그걸 몰라.”
건성인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짜증을 내는 게 전형적인 만취자의 모습이다.
‘진짠데. 진짠데 어떡하라고.’ 같은 말들을 중얼대면서 씩씩거리던 그는 별안간 손을 뻗더니 태리의 양 뺨을 두 손아귀에 넣고 꼬옥 감싸 왔다.
“우읍, 왜 그래요!”
그러더니 그녀가 놀랄 새도 없이 뺨을 마구 비벼 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 보고 싶었어. 병아리 같아서 해 보고 싶었어.”
“이, 술주정뱅이가! 난 병아리 아니에요. 정신 차려요. 병아리 아니라고!”
“아니야, 맞아. 병아리야.”
“사람이 술 먹고 이러면 못 써요. 이러면 안 돼!”
“……안 돼?”
호된 목소리로 질책하며 팔뚝을 찰싹 때렸더니 다행히도 비비던 동작은 멈췄다. 다만 부작용이 있어서 고집을 부리던 목소리가 한층 더 거칠어지고 낮아져 버리고 말았다.
“안 돼, 안 돼, 그놈의 안 돼.”
그 안 된다는 말이 미워 죽겠다는 듯이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태리의 얼굴을 감싼 손바닥에 힘을 주고 버텼다.
안 된다는 말이 무슨 기폭제라도 되는 것처럼.
“지금 충분히 많이 취했어요. 빈방 내줄 테니까 쉬었다가 술 깨면 가요. 알았죠?”
거기에 불안함을 느낀 태리는 서둘러 제 뺨에 붙어 있던 팔을 떨쳐 내고 마주 안듯이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어 커다란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술 취한 사람의 몸은 무겁다. 아주 많이 무겁다. 거기에 당사자가 협조까지 해 주지 않는다면 엉덩이 떼는 것조차도 버거워진다.
머리가 그의 가슴팍 정도밖에 오질 않으니 태리는 한참을 낑낑대다가 결국 월등한 체격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중심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몸이 기우뚱 밀리면서 커다란 뭔가가 앞으로 넘어오듯이 그녀를 덮친다.
벌어진 목깃 사이로 보이는 굵은 목덜미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몸 전체를 기대다시피 해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남자는 그녀를 바닥으로 밀어 넘어트리곤 기어이 제 몸을 붙여 묵직하게 짓눌렀다.
허우적대는 팔에 밀쳐져 덩달아 엎어져 버린 은주전자가 경고음처럼 쾅 소리를 내며 옆에서 굴렀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품 안에 들어온 것을 본능적으로 끌어안는 것처럼 클로드의 팔이 태리의 어깨와 허리를 감싸 그대로 꽉 조여 안았다.
제 안에 욱여넣듯이 강하게 끌어안은 탓에 맞닿은 몸의 윤곽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불에 달군 강철처럼 뜨겁고 단단한 몸이었고, 뺨에 붙은 목덜미가 야수의 등줄기처럼 가파르게 들썩이고 있었다.
태리는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버둥댔지만 그럴 때마다 치마가 말려 올라가, 클로드의 굵은 다리에 맨살이 비벼지는 것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찬 공기에 노출된 종아리가 닿아 있는 뜨거운 살결과 대비되어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너무 세게 안아서 힘들어……!”
얼마나 센 힘인지 그가 마음먹고 가두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차선책으로 달라붙어 있는 손이라도 뜯어 내려 했더니 떼어 내면 도로 붙고, 밀어 내면 금세 달라붙어선 그는 ‘왜 안 돼. 나는 왜 안 돼.’ 같은 소릴 칭얼대며 가쁜 숨결을 내쉬는 태리의 입을 쫓아 턱을 내렸다.
뺨이 뺨을 스치고, 길고 반듯한 콧날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검은 머리카락이 연약한 목덜미를 긁으며 자극했을 땐 하마터면 이상한 소리까지 낼 뻔했다.
고개를 숙인 그는 체취를 묻히듯 그녀의 귀와 머리칼, 어깨, 목 같은 곳에 제 얼굴을 마구 비비적거렸다. 따듯해, 부드러워. 귀엽고 말랑말랑해. 나른하게 흘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도 무척이나 좋은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상체를 들어 홍당무가 된 태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긴장해서 숨을 참고 있었더니 그가 다시 ‘병아리 입술’이라고 중얼대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탐내듯이 만지작거렸다.
거기에 심장이 달린 것처럼 쿵쾅쿵쾅 맥박이 뛰어서.
검을 쥐는 거친 손끝이 연약한 부위를 낱낱이 훑어 대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남자의 단단한 손가락이 기어이 도톰한 아랫입술에 힘을 줘 벌려 냈을 땐 머릿속에서 우르르 쾅쾅 하는 우레 소리가 진동했다.
매끄러운 턱선이 비스듬히 꺾여 내려오는 것을 보곤 태리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아, 안 돼!”
이건 안 돼. 이거는 정말로 안 돼.
그녀가 부질없는 손으로 클로드의 가슴팍을 구겨 잡았다. 어쩌다 보니 그것이 더 애원하는 형국처럼 보이긴 했지만 다행히 숙여지던 커다란 몸은 중간에서 그쳤다.
대신 코끝이 닿는 위치에서 자제력이 간당간당한 남자의 얼굴을 고스란히 봐야만 했다.
약간 쉰 목소리로, 열기에 찬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클로드가 말했다.
“난 너 안 좋아할 거야.”
“…….”
“안 좋아할 거라고. 안 좋아해……. 그런데 진짜 좋아해. 너무 좋아……. 그러니까 나한테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돼.”
그러더니 더는 버티기 힘들었던지 다시 그녀의 몸 위로 무너져선 천에 감싸인 작은 어깨 위에 펄펄 끓는 제 입술을 낙인처럼 꾹 찍어서 짓눌렀다.
그런 거 하지 마. 이 바보 멍청이……. 태리가 그의 넓은 등판을 퍽 때렸다.
괴로움과 불만이 한데 섞인 눈빛이 그녀를 향해 쑤셔 들어왔다.
“……싫어? 왜, 내가 형편없어서? 내가 총독이라서 싫지. 그런 사람이라서 나 싫어하지.”
멍청아, 그런 게 아니잖아!
“나도 알아. 그래서 미안해. 널 괴롭히는 사람이라서 내가 미안해. 내가 진짜 너무 미안한데…… 그래도 나 좀 좋아해 줘, 응? 안 된다고 하지 말고 지금 당장 나 좀 좋아해 줘…….”
몸 안까지 전부 새빨갛게 물들고 있다. 아니면 심장이 바싹바싹 익어서 바닥으로 떨어졌거나.
끌어안은 채로 어깨에 입술을 문댔던 클로드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태리의 턱 밑과 쇄골 사이쯤에 입술을 파묻었다.
도망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긴장으로 잔뜩 몸을 움츠렸다.
비좁은 틈새에 얼굴을 박아 놓고 끙끙대던 남자는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웅얼댔다. 자길 싫어하지 말라는 둥, 미워하지 말아 달라는 둥, 그러면서 서서히 움직임이 잦아들더니 잠시 후에야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뱉었다.
‘잠들었……나?’
여전히 호흡은 뜨겁지만 귓가에 퍼지는 숨소리는 전보다 훨씬 더 고르고 얌전해졌다.
꼬집고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확실히 잠이 든 것 같긴 한데 그런 상태로도 그는 끌어안은 태리의 허리를 놓지 않고 있었다.
이걸 놓으면 무슨 큰일 나는 사람처럼 꽉 움켜잡고 있어서, 태리는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오려고 몇 번을 시도했다가 번번이 실패하곤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심장이 이렇게까지 뛰는 건 놀라서이겠지.
그렇겠지, 분명히.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와 엉켜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창피했다.
너무 부끄럽고, 너무 간지럽고…….
‘별일 아니어야 하는데…….’
그녀가 눈을 꼭 감아 이마 위에서 쏟아지는 불빛을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