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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가. 클로드는 잠잠히 공주가 돌아왔었던 그날을 떠올려 보았다.
새벽에 소네티로 추정되는 어떤 여자가 숲을 가로질러 들어왔다, 그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무작정 이 호텔로 들이닥쳤었다.
그런 다음에는 당장 나와서 얼굴을 비추라고 무례한 압박을 가했고, 이상한 차림새로 엉뚱한 말을 하는 그녀를 수상하게 여겨 사방에 감시자를 붙여 두었었지. 내 앞길에 방해가 될까 봐.
그리고 지금은…….
술에 취한 건지 회한에 젖은 건지 모를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걱정을 많이 했었어요.”
“어떤 걸.”
“공주님에 대해서요. 어둡게 자라셨을 게 분명할 테니까.”
보호자도 없이 홀로 내던져진 아이. 주변의 비난과 힐책에 필연적으로 죄책감이라는 지독한 외로움을 가슴 안에 지고 자랄 수밖에 없는 아이.
보통의 어른으로 자라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또한 자신들의 받아들여야 하는 업이라고 여겼었고.
“그런데 말이죠, 축복스럽게도 돌아오신 공주님은 너무도 사랑스럽고 밝았어요. 마법사는 신을 믿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저는 신을 찾았습니다. 그 순간에 신이 우리의 곁을 다녀간 게 틀림없었으니까.”
누구의 신에게라도 경배를 올리고 경외를 바치겠다는 뜻으로 안시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잘게 떨리는 속눈썹에 언뜻 물기가 비쳐서 클로드는 좀처럼 하지 않는 짧은 한 구절의 기도문을 조용히 입 안에서 읊어 주었다.
그대의 기도가 무사히 여신의 귓가에 닿길. 남자의 짧지만 정직한 속삭임에 안시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거야 원 미워하기 좀 힘든 사람이군요, 라는 말을 씁쓸히 중얼거리며.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축복의 나날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열악해 무례한 이들로부터 공주님이 상처를 입게 되면 어쩌나 걱정도 했었지만 감사하게도 그런 일 역시 일어나지 않았죠. 덕분에 슬퍼하시는 표정을 보지 않을 수 있어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그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경한 눈빛을 클로드에게 보여 주었다.
거기에 가장 큰 일조를 해 준 사람이 그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 이자리스의 통제권을 가진 정복자. 이곳에서 판결을 내리고 통치를 하고 있는 권력자.
그가 거느린 강력한 힘과 군대 앞에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굴종을 한다.
그런 남자가 ‘공주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온몸으로 표출하고 다녔기 때문에 공주님을 향한 모든 허튼 시도들은 사전에 차단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망국의 공주라 하여 함부로 그녀를 업신여기지 못했고 무모하게 덤벼들지도 못했다.
그런 짓을 했다간 눈앞의 이 남자에게 죽기 직전까지 보복을 당할 테니까. 어이없지만 그가 공주의 완벽한 보호막인 셈이었다.
“불운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공주님은 많은 힘을 내 주고 계십니다. 당찬 기세로 저희를 이끌고 계시지요.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는데…… 그런 우릴 보고도 매일같이 웃어 주시지요.”
공주님의 행복한 미소를 볼 때면 가슴 벅차고 기뻐서 눈앞에 닥친 고난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더는 여한이 없달까. 말하지 않았지만 마법사들은 다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 나온 김에 이 자리에서 선을 긋도록 하지요. 총독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셨든 당신께서 지금처럼 공주님을 소중히 대할 줄 안다면 구태여 적이 되려고 하진 않겠습니다. 어쩌면 최후의 순간에 가서도 한 번쯤은 목숨을 살려 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이봐, 나는―”
“하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우리 공주님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면 나는 마법사 일족의 명운을 걸고 당신의 영혼까지 산산이 부숴 놓도록 하겠어요.”
살벌했지만 그것이 안시가 술의 힘을 빌려서 꺼내 놓은 진심.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석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품고 있었던 가장 귀하고 찬란한 보석의 귀퉁이를 클로드에게 허락해 준 것이었다.
비록 조건부이긴 했지만, 그것도 아주 무시무시한 저주까지 옵션으로 붙어 있긴 했지만 클로드는 술 때문에 혀가 꼬부라진 그녀의 발음 하나 놓치는 법 없이 똑똑히 챙겨 들었다.
기도하듯이 투명한 물 잔을 양손으로 꼭 쥔 그가 다듬고 다듬어 심혈을 기울인 한마디로 맹세했다.
“가슴에 새기도록 하지.”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서 듬직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맹세가 웃겼던 걸까. ‘호호호’가 아닌 ‘허허허’로 너털웃음을 터트린 안시는 갑자기 짓궂은 표정을 짓더니 그의 손에서 물잔을 홱 뺏어서 술을 한가득 콸콸 퍼부었다.
“자, 마셔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술이었다.
딱 한 잔.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가 없다. 클로드는 망설이지 않고 눈을 질끈 감아 그것을 한 번에 삼켜 버렸다.
약품에 설탕을 약간 섞어서 휘휘 저은 독극물 같은 맛이 즉시 혀에 퍼졌지만 남아 있는 한 방울의 술까지도 탈탈 털어 신뢰의 눈빛을 쌓는다.
“아, 좋아요, 아주 좋아요! 마십시다! 마시고 오늘을 즐겨요!”
하지만 알코올로 쌓는 신뢰란 그렇게 단숨에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한번 달리기 시작한 사람의 술잔은 쉽게 멈춰 서지도 않는 법.
지독한 술 냄새가 다시 한번 투명한 물잔 안에 가득 차오른 것을 보며 클로드는 서서히 공포에 질려 갔다.
* * *
만찬장의 봉인이 풀린 건 늦은 밤이 다 되어서였다. 저녁 시간을 넘겨서도 두 사람이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태리는 사람들을 설득해 강제로 문을 따기로 했다.
함정 해체에 능하다는 호텔 벨보이 루티가 열쇠 구멍 안에 지팡이 끝을 쑤셔 넣고 약 10분가량의 긴 주문을 읊어 마법을 해제하는 동안, 태리는 두 손을 간절히 모으고 클로드의 무사 안정을 빌었다.
‘다른 건 기대도 안 할 테니 제발 자가 호흡만이라도 하고 있어요!’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의 만취 상태란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안 가서 더욱 마음이 초조해졌다.
내가 더 빨리 구하러 왔어야 했는데. 봉인이 해제되는 소리가 나자마자 그녀는 제일 먼저 뛰어서 안으로 들이닥쳤다.
“무사해……요……?”
그러나 맞닥뜨린 풍경은 기존의 우려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라서. 아니, 전체적으로는 예상했던 결과가 맞긴 했는데 세부적인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의외성이 있어서 달려가던 발이 도중에서 멈췄다.
일단 빈 술병과 쓰러진 술잔이 점령하고 있는 테이블 아래에 문제의 두 사람이 주저앉아 있긴 했다.
한 사람이 커다란 통을 붙잡고 우웨웩 구토를 하면 다른 한 사람이 등을 퍽퍽 쳐 주는 구도로. 여기까진 그녀가 예상했던 범주였다. 다만 토사물을 쏟아 내는 게 안시이고 감정을 담아 등을 치고 있는 사람이 클로드라서 놀란 것이지.
안시는 빈 통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폭포수처럼 토하다가 ‘살려 줘요, 잘못했습니다, 우웨에에엑―’ 같은 의미 없는 말들을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클로드가 더 세게 등을 후려치면서 그녀가 입을 다물고 속을 게워 내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 역시 눈앞의 광경을 보고 단체로 의아함에 빠졌다.
“으잉, 지배인님이 당했네?”
“와, 술고래 안시를 이겼어? 그렇게 안 봤는데 저 기사 생각보다 더 대단한 구석이 있잖아.”
“야단들 피우지 말고 현장부터 정리해!”
이럴 때 돈 내기를 했어야 하느니 뭐라느니 떠들면서 사람들은 클로드에게서 안시를 넘겨받아 추위에 떠는 그녀의 몸에 담요를 가져와 덮었다.
“허이고, 얼마나 마신 거야, 대체. 호텔에 숙취 해소 물약 같은 거 없나?”
“없어요. 그런 걸 만들어 둘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뭐 해독제와 비슷한 원리이긴 할 텐데 지금이라도 대충 조합해서 제조해 볼까요?”
“그러다가 망치면 더 큰일이지. 그냥 브리짓한테 연락해서 호텔로 오라고 해. 지 이모가 저 모양인데 오겠지.”
빠르게 튕기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어수선한 잡음이 자극이 되었던 건지, 꿀물을 들이켜던 안시가 돌연 머리가 깨질 것 같다고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 꼴이 완전 중환자가 따로 없어서 다들 그녀를 방으로 옮기기로 의견을 모았다.
“다리 들어! 내가 팔이랑 어깨 잡았으니까!”
“자, 서둘러 옮기자고.”
들것에 실려 나가듯 술에 절어 있는 안시가 마법사들에 의해 만찬장을 빠져나간다. 왁자지껄한 말소리까지 덩달아 쫓아 나가고 나자, 뒤이어 쥐 죽은 듯한 정적이 내려왔다.
아무도 챙겨 주지 않아서 쓸쓸히 남게 된 클로드에게는 물수건과 물 주전자를 챙겨 온 태리만이 홀로 곁에 남게 되었다.
무릎걸음으로 잽싸게 접근한 그녀는 클로드의 코앞에서 손을 휘휘 흔들어 보았다.
전쟁과도 같은 시간을 겪은 건지 탁자 다리에 머리와 등을 기댄 채, 한쪽 다리를 접고 눈을 감고 있는 그의 호흡이 그 어느 때보다도 힘겹게 느껴진다.
눈썹도 살짝 찡그려져 있는 것 같았고, 숨소리에서 종종 성대를 긁고 나오는 듯한 거친 탁음마저 간간히 섞여서 들려온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이라 태리는 한결 안심이 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처음 몇 번은 총독, 총독 하고 불렀는데 반응이 없어서 작은 목소리로 클로드? 하고 속삭이니 대번에 눈꺼풀이 열렸다.
‘멀쩡한 게 아니었구나.’
무척이나 고단한 은빛 눈동자. 심지어 가까이서 들여다본 그의 얼굴은 벼랑 끝에서 나뭇가지 하나 붙잡고 버티고 있는 사람처럼 위태롭기까지 하다.
뭐랄까, 정제되지 않은 날것 같은 면모가 스며들어 있어서 남성적인 관능미가 강렬하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하긴, 괜찮을 리가 없지. 애초에 주량이 간장 종지만 한 사람인데.’
그는 현재 자신의 상태를 힘겹게 버텨 내고 있는 중인 게 틀림없다.
쇠심줄 같은 정신력인가? 싶어서 조금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던 태리는 갑자기 팔을 뻗어 자신을 꽉 움켜잡는 힘을 느끼곤 깜짝 놀라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