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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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태피스트리를 보고 뭔 사달이 일어났다는 걸 눈치챈 그녀는 물에 젖은 생쥐처럼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안시의 앞에 섰다. 

꾸중이라도 들을 거라고 예상한 거다. 하지만 안시는 그러지 않았다. 사람이 180도로 뒤집히듯 단숨에 얼굴을 바꿔 세상에서 제일 상냥하고 화사한 마녀가 되었다.

“어머, 왜 이리 얼어 계셔요? 총독께 사정을 다 전해 들었습니다. 이곳의 모든 건 공주님의 것이에요. 누구를 데려오든 마음대로 하실 수 있지요. 다만 상대가 남성이란 것에 이 안시가 잠깐, 아주 잠깐 놀랐을 뿐이에요.”

그러더니 소름이 돋게도 친근한 척 클로드를 향해 생긋 웃었다.

“두 분이 이리 친밀한 관계인 줄도 모르고…… 제가 그동안 공주님의 주변에 대해 너무 소홀했군요. 공주님께서 호의를 갖고 대하는 분이라면 저 역시 더불어 친분을 쌓고 싶은데. 어떻게, 우리가 좀 친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총독님?”

네가 우리 공주님 주변에서 얼쩡거리려면 나랑도 좀 승부를 봐야 하지 않느냐, 그런 반협박조의 말투.

“좋을 대로.”

클로드는 마녀가 뭔 수작을 부리든 두려울 것 하나 없다는 패기에 찬 태도로 응했지만, 이어서 ‘그럼 간단한 술자리 정도는 괜찮으시겠지요?’라고 건넨 짱돌에는 눈탱이를 얻어맞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돼. 안시. 이 사람은 술이라면 완전히 젬병인데…….”

“어머 어머! 술을 못하세요? 어쩜 호탕한 기사님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얌전한 샌님이셨던 거군요? 저런, 호호호!”

입을 가리고 저렇게 호호호! 거리는 건 일부러 열받게 하려고 저러는 걸 테다.

살면서 지겹게도 당한 뻔한 수법, 뻔한 놀림. 클로드는 천년의 짜증을 담아서 명징한 논리로 되받아쳤다.

“함께 술을 먹어야만 친목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인간이 만든 사교 행위 중에 가장 낡고 후진 방식이다. 술만 먹고 배만 나온 오륙십 줄의 아저씨 같은 발상이지. 젊게 살도록 해라, 지배인. 아직 오십은 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예상외의 능숙한 반격에 안시는 잠시 이것 봐라? 하는 시선을 내비쳤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에게는 아직 한 장의 카드가 더 남아 있었다.

사랑에 빠진 멍청한 바보들에게 쓰기에 아주 딱 안성맞춤인 최상의 골든 카드였다.

“그렇게 정색하시는 걸 보니 정말로 못 드시는 게 맞군요.”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걸로 하지. 나는 오십 줄이 되어서도 복근 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살 건데.”

“참 아쉽네요. 앞집 엘프는 그래도 술은 잘하던데.”

“……여기서 왜 그놈 얘기가 나와.”

그놈은 잘한다를 넘어서서 숲의 엘프인지 술의 엘프인지 거의 구분이 안 가는 수준이었지. 클로드 역시 눈앞에서 목격한 바가 있었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그 엘프야 족히 오십은 넘지 않았겠어요?”

은근한 비교질에 대놓고 끌어들이려는 마녀의 수작질. 함정을 팠으니 얼른 들어오라고 눈웃음 짓는 눈꼬리가 더럽게 얄미웠지만, 인간도 아닌 놈에게 밀리는 기분은 그보다 더 더럽다.

‘빌어먹을.’

여기서 거절하면 또 어떤 식으로 사람을 코너로 몰고 갈지는 뻔했다. 또한 당장은 모면하더라도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일 것이고.

자꾸만 구겨지려는 미간을 손가락을 꾹꾹 문질러 펴 내며 클로드는 피곤한 목소리로 백기를 들었다.

“마시는 데 앞자리 정도는 지켜 주지.”

“호호호, 그렇게 하셔요.”

그 정도 승부욕도 없다면 재미가 없을 뻔했지. 안시는 사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감히 우리 공주님을 탐내는 놈이라면 자신이 못하는 일도 능히 극복해서 해내야 하는 것이지. 어렵다고 포기한다면 도전의 자격조차도 없는 것이지.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점점 더 위험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스노우볼을 막기 위해 태리가 중간에 서서 ‘반대요, 난 결사반대요!’를 외치며 열심히 양팔로 엑스 자를 그렸지만, 눈에 불이 붙은 두 사람은 순식간에 결투장을 옮기기로 합의를 봐 버렸다.

“공주님의 처소에서 술판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단 한 방울의 술이라고 할지라도요.”

“나 역시 대단히 공감하는 바다.”

“이동하시죠.”

“앞장서라.”

그렇게 만찬장에 커다란 나무 술통이 몇 개나 굴러서 데굴데굴 들어갔다.

철커덕, 찍, 찌익.

자물쇠를 잠그고 출입을 봉하는 결계 마법진이 대형 문짝에 커다랗게 그려져 작동했다.

* * *

[공주님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걸어 놓은 만찬장 안에서 고요한 술 대결이 펼쳐진 지 서너 시간째.

족히 기백 명은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 안에 단 두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긴장감을 조성하는 듯한 촛대의 촛불들이 긴 테이블의 중앙에서 일렁거리고 꼴꼴꼴 액체를 따르는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눅눅하게 깔렸다.

앉자마자 술잔을 엎고 묵묵히 맹물만을 들이켠 클로드는 짧지 않은 그 긴 시간 동안 나름 훌륭하게 자신의 방어선을 지켜 냈다.

살면서 이런 일을 한두 번 당해 봤어야지. 술을 권하는 사회에서 태어난 그는 이런 유의 사회생활이라면 지겹게도 해 봤다.

아, 남자라면 술을 마실 줄 알아야지. 아, 모름지기 기사라면 술 먹고 노상 방뇨 한두 번쯤 한 경험이 있어야지. 한 잔만 마셔도 어지럽고 힘들다고? 그러면서 주량이 느는 거다. 그것이 사나이지!

견습 기사일 때부터 듣고 자란 말이고. 그때마다 그는 그들이 먹이려는 지옥의 알코올 실험을 피하기 위해 더러운 성질머리를 차곡차곡 키워 나가며 성장해야만 했다.

탁자도 좀 엎어 봤고 술병도 좀 깨 봤고 술 먹고 취한 놈도 여러 명 손을 봐 가며 보낸 험난한 청소년기였다. 안시에게 호락호락 당할 리가 없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술은 안시가 해치우고 그는 옆에서 잔을 부딪쳐 흥이나 돋게 해 주는 정도에만 그치고 있었다.

안시는 ‘지독한 놈!’이라고 욕하면서 혼자 퍼마시기 시작했고 지금은 걷잡을 수 없이 취기가 올라와 해롱해롱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봐요, 총독. 당신 정말 재수 없고 열받는 남자예요.”

“드디어 시작했군, 술주정.”

“남의 땅에 들어왔으면 그냥 나대요. 정석대로 나대라고요. 그래야 우리가 당신 팔다리를 찢든, 끌어안고 같이 자폭을 하든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볼 거 아니에요? 왜 남의 영토에 들어와선 얌전하게 공관이나 지키고 있죠? 선량한 척, 예의 바른 척 구역질이 나요!”

눈을 찌르듯이 휘적거리는 삿대질을 피해 클로드가 짧게 대꾸했다.

“기사단은 숲을 지키고 있다.”

“웃기셔라. 진짜 속셈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가증스러워요.”

“그렇다고 표현을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나.”

“우릴 괴롭히고 억압해 봐요!”

술주정에 시달리는 게 힘들었는지. 지친 한숨을 내쉰 그가 마시려던 물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핍박당하는 게 취향인 모양인데 나는 아니야. 나는 남을 괴롭히는 취미가 조금도 없다, 지배인. 그러고 싶지도 않고.”

“군대를 끌고 들어온 주제에 그딴 곱상한 말은 지껄여 봤자죠. 아닌가요?”

안시는 화병이 날 것 같은 이글이글한 눈으로 잔 안의 술을 한입에 털어 넣더니 하소연하듯이 지난 이야기들을 꺼내 놓았다.

긍지의 이자리스가, 신비의 땅 이자리스가, 마법의 기원을 가진 이자리스가 이런 누추한 꼴로 전락한 것에 대한 설움이었다.

“우리 고향은요 아주 좋은 곳이었어요. 사소한 고민거리는 있어도 큰 걱정거리는 없었죠. 바깥에선 마법사들은 다 성질머리가 고약하고 폐쇄적이라 자기들끼리만 뭉쳐 산다고 했지만…… 그래서 우리가 누굴 해쳤나요? 누굴 괴롭혔나요? 우리는 그냥 이 땅에서 만족하고 행복했습니다. 당신들 같은 나라에서 우릴 마족으로 취급해도 거기에 항의 한 번 한 적 없었죠!”

“그렇다기보다는 남의 평가에 그냥 관심이 없었던 것 같던데.”

“그게 그거예요!”

마법사가 사교성이 부족하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건 그냥 자신들의 타고난 성질이었다. 배 속에서부터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란 말인가.

안시가 술잔을 부여잡고 꺽꺽거렸다.

“선왕 폐하도 아주 좋은 분이셨어요. 너무 착하고 순해서 군주 자리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좋았죠. 말수가 적고 오렌지 나무 키우는 걸 즐기셨는데……. 그거 아나요? 그분의 미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몰라.”

“엄청났어요! 우리 마법사들이 입이 조금만 가벼웠다거나 방랑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면 진작에 세기의 미남이라고 소문이 났을걸요! 꽃처럼 아름다우셔서 모든 여성들의 흠모를 받았죠. 저 역시 젊었을 때는 그분을 흠모했었답니다.”

“미안하지만 지배인의 소싯적 추억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렇게 아름다운 남자는 세상에 다시는 없을 거예요.”

그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었나. 지겨운 자랑에 클로드는 제국 황궁의 아틀리에에 걸려 있던 죽은 소네티 왕의 초상화를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그의 고모가 취미로 그려 놓은 것이었는데, 그녀 역시 젊은 시절의 그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었으니까. 따로 외모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았지만 옛 기억을 되살려 그릴 정도였다면 상당히 잘생긴 생김새였다는 건 맞는 것 같았다.

“공주와 닮았다 하던데.”

“오, 맞아요. 우리 공주님은 선왕 폐하의 예쁜 부분을 모조리 빼다 닮으셨죠. 보석으로 빚어낸 작은 요정처럼요.”

사람이 아무리 예뻐도 어찌 보석만큼 빛나겠나 싶었지만 클로드는 물을 한 모금을 삼키며 그 말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그러자 안시가 매우 기쁜 얼굴로 외쳤다.

“재수 없다고 했던 발언은 취소하겠습니다. 진실된 눈을 가졌군요, 총독.”

그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흥을 깰 것 같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그녀는 하고 있던 상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우리는 그분도 사랑했었답니다. 이자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을 가진 마법왕국이었죠. 매일매일이 동화 같았는데…… 그걸 하루아침에 잃은 거예요. 왕도, 성도, 숲도, 가족과 친구도 전부 다.”

“…….”

“그래서 공주님만큼은 지켜 내기 위해 남아 있는 모두가 필사적으로 몸을 던졌었죠. 한날에 사랑하는 사람을 둘이나 잃는다면 그건 대체 어떤 삶인가요. 당시의 우린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멸망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성 안을 거슬러 들어가 구석에서 떨고 있는 작은 공주를 찾아내 끌어안았다.

그리고 손에서 손으로, 또다시 손에서 손으로 옮겨 가며 희생의 대가를 치러 구해 낸 존재였다.

작디작은 공주는 모든 사람들의 심장과도 같아서 너만 살아 준다면…… 그런다면, 우리는 그것만으로 될 것 같았다.

“상상도 안 되실걸요. 공주님이 돌아오셨을 때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얼음 속에 넣어 두고 살던 심장을 다시 꺼내 끼운 것 같았지요.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다 꿈일까, 돌아오신 날 호텔의 모두가 뜬눈으로 공주님의 방을 지켰던 것. 그게 어떤 심정이었는지 당신은 절대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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