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186)

50

그녀가 한숨을 쉬며 체념하듯이 털어놓았다. 

“굳이 범인을 지목하자면 나야. 내가 찢었어. 내가 뛰다가 그런 거란 말이야.”

“왜 뛰었어.”

“그건…….”

직전의 일이 단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자세히 설명하려니 마음이 또 좋지 않아져서 태리는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설명을 하게 된다면 결국 ‘무시’를 당했었다는 사실까지 고백해야만 했으니까.

다 듣고 나면 이 사람은 날 뭐라고 생각할까. 일개 시정잡배에게도 무시당하는 공주를 어떻게 여길까.

동정받는 것도 달갑지 않았고 창피한 기분이 드는 건 더더욱 싫었다. 공주라는 이 몸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때라면 모를까. 이제 그녀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

“시비가 붙어서 싸웠거든.”

“싸우기까지 했어? 그걸 왜 이제 말해.”

대규모 토벌을 앞두고 근래에 분위기가 다소 격해지고 있다는 것은 클로드도 잘 알고 있었다. 크거나 작게 사건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고 그로 인해 기사들도 신경이 곤두서 있는 참이다.

그 여파가 태리에게도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는 점점 더 차오른 뭔가를 참기가 어려워졌다.

“그놈들이 뭐라고 그러면서 시비 걸었어. 솔직히 다 말해.”

“그냥 나한테 나쁜 말 조금 했어.”

“무슨 나쁜 말.”

“그건 말 안 해.”

“그걸 말해야지!”

“말하기 싫어. 무슨 상관이야?”

“……뭐?”

안 그래도 한계까지 간당간당하게 차올라 있던 물이 왈칵 넘쳐 버린 건 딱 그 순간이었다.

네가 무슨 상관이냐, 그 한마디에 남자의 목울대와 턱 근육이 뻐근하게 움직이더니 자신의 팔 안에 넣어 두었던 얇은 허리를 움켜잡아 그녀의 얼굴을 제 입술 앞까지 바짝 끌어당겨 왔다.

“내가 그런 말 쓰지 말랬지.”

넌 예전에도 나한테 이렇게 상처를 줬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냥 여기서 기다리라는 둥, 넌 와도 쓸모가 없다는 둥 그렇게 성의 없는 말로 가슴을 할퀴어 놨었다.

그때도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데.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까지도 자기 전에 불쑥불쑥 떠올라서 죽겠는데!

“난 상관있어. 내가 왜 상관이 없어. 내가 여기 총독이야. 당신이랑 분명히 상관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화가 난 목소리에 놀란 건지, 진정이 되었던 작은 얼굴이 도로 흐려지면서 눈물샘이 툭 하고 다시 터진 건 그때였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했는데 클로드의 높아진 언성에 태리는 그만 참지 못하고 서러움이 폭발해 버렸다.

말하기 싫은데 자꾸 말하라고 그러고. 누가 괴롭히면 뭐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더니 그는 자신을 가리켜 총독이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렇다는 거였다. 그가 제게 아무리 친절했어도, 아무리 다정했어도 결국은 그렇다는 얘기였다.

“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가…….”

그녀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퍽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참지 말라며. 그래도 된다며! 난 진짜로 그 말을 믿었는데…… 네가 총독이라서 안 되겠어? 그래서 못 봐주겠어? 걔네가 먼저 괴롭힌 거란 말이야. 나는 그냥 여기 사람들을 지켜 주려고……!”

말을 하면 할수록, 그를 때리면 때릴수록 점점 더 서러워져서 한두 방울로 시작했던 눈물은 금세 다시 소낙비가 되어 내렸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직위를 앞세워서 찍어 누르려던 게 아니었는데. 클로드는 펑펑 우는 그녀를 앞에 두고 쩔쩔매다가 품 안에 꽉 끌어안아 버렸다.

가슴을 때리고 있는 팔과 흔들리는 등까지 통째로 감싸 안고, 밤톨 같은 정수리 위에 턱을 얹어서 거의 제 몸으로 덮다시피 했다.

커다랗게 변한 울음소리가 그의 가슴 안에서 메아리치듯이 울렸다.

“울지 마……. 내가 미안해…….”

하늘이 무너져도 시큰둥할 것만 같던 공주가 지금은 그의 옷이 흠뻑 젖도록 울고 있었다. 그렇게 만든 사람이 본인이라는 생각이 들자 클로드는 정말 죽고 싶어졌다.

그러니 저 개자식의 팔다리를 조각조각 뜯어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말소리 따위는 아예 관심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 지금은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치게 할 수 있지. 우는 걸 계속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아파 죽겠는데.

빌듯이 잘못했다고도 수십 번을 해 봤고, 미안하다는 말은 그보다 더 많이 했다. 그래도 울음은 약간만 잦아들었을 뿐 완전히 멈추지를 못했다.

“울지 마. 왜 울고 그래. 아니,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되는데…… 그래도 그렇게 아프게는 울지 마. 내가 진짜 미안해.”

클로드는 횡설수설하며 어쩔 줄을 모르다가 꽤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 하곤 태리의 허리에 묶어 두었던 옷의 안주머니를 뒤져, 금박지에 싸인 작은 원형 초콜릿을 꺼냈다.

“이거, 이거 먹을래?”

아주 약간의 관심이라도 가져 준다면 성공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코를 훌쩍인 태리가 눈물을 닦으며 ‘뭐야, 장난해?’ 하는 무서운 눈초리로 째려봤을 때 그는 정말로, 정말로 기뻤다.

나한테 이렇게 큰 관심이라니.

그래서 더욱 열과 성을 다해서 떠들었다.

“뭐 좀 먹었어? 먹었어도 또 먹어. 맛있는 걸로. 아, 나한테 사과도 있는데.”

말 등에 걸려 있는 주머니 안에 과일도 들어 있다. 혹시 몰라서 대충 던져 놨는데 지금은 그 사과가 황금보다 더 귀하게 느껴졌다.

그가 말의 이름을 가볍게 부르자 순한 눈망울을 굴리며 대기하고 있던 하얀 말이 얼른 신호에 응해 다가왔다.

“안 되겠어. 이거 먹고 오늘은 이만 호텔로 돌아가서 쉬어. 데려다줄게. 그러려고 온 거니까. 할 일이 있어도 내일 해.”

클로드는 내내 가두고 있었던 팔을 풀어서 태리가 말의 안장을 밟고 올라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를 향해 기를 팔팔 세우고 있는 마법사들은 안중에도 없는 공기 취급이었다.

급기야 머리 뚜껑이 열린 마법사들이 ‘저 삿된 놈!’ 하고 그를 가로막으려 했지만 하필이면 그 순간 ‘응, 집에 가고 싶어…….’ 하고 작게 말하는 공주님의 아기 새 같은 목소리가 들려서 모두가 동작을 멈춰 버렸다.

떠나기 전 태리는 퉁퉁 부은 눈을 하곤 그들을 잊지 않았다는 듯이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를 했다.

“오늘은 나 때문에 여러 가지로 모두한테 미안했어요. 나중에 금방 다시 또 올게요.”

그 말에 다들 찌잉 하고 감동을 받더니 ‘공주니임…….’ 하면서 시린 코를 훔친다.

태리는 할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어 주곤 릴리와 마치를 찾았다.

“릴리와 마치는 안 갈 거니?”

“가긴 갈 건데 조금 있다가 가야 할 것 같아요.”

“공주님 뒤에 있는 기사가 너무 무서워요.”

“지금 같이 따라가면 우리를 물 것 같은 눈이에요.”

“맞아요, 릴리를 잡아먹겠어요.”

“내가 언제 그런 눈으로 봤다고.”

클로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항변을 했지만 막상 태리를 먼저 말 위에 태우고, 그 뒤에 올라앉고 보니 솔직히 자리가 좀 부족해 보이긴 했다.

여기에 꼬맹이 둘까지 합석시키기는 무리지. 그는 스스로 합리화했다.

“자리가 없군. 따로 와라.”

“저거 봐요!”

“거봐요!”

“맞잖아요!”

“그랬다니까요!”

“돌아가서 너희를 태울 마차를 보내 주도록 하지.”

“이제 와서?”

“뒤늦게야?”

“시끄럽다, 꼬맹이들.”

릴리와 마치는 퉁퉁 불은 면발처럼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지만 웬일인지 순순히 양보를 하는 눈치였다.

분하지만 오늘만큼은 저 썩은 치즈 기사가 소원을 들어준 램프의 요정이라 어쩔 수 없는 거라면서.

마법사들 역시 같은 마음이라 훼방을 놓고 싶어 죽겠는데 ‘그……래…… 공주님이 원하시니까 봐준다…….’ 혹은 ‘어쨌든 저 개독이 나타나서 눈물을 멈추긴 하셨으니까.’라는 등의 분통한 말들을 곱씹으며 꾸역꾸역 참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지긋한 촌장만이 성숙한 태도로 떠나는 두 사람의 배웅을 나섰다.

그들의 주군이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지 훤히 보이는 데다가 오늘의 그녀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치고 고달파 보였다.

자신들의 욕심으로 붙잡고 있기보다는 서둘러 돌려보내 쉬게 해 드리는 것이 더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또 오실 때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과연 웃어른다운 생각이었지만 그런 그도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미련을 못 버리고 마법사스러운 제안을 했는데.

“그런데 타고 가실 말이 너무 허약해 보이는군요. 제가 날으는 양탄자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다. 말이 허약하면 내가 업고 간다.”

웬걸. 불한당 같은 놈에게 바로 칼 거절을 당했다.

“…….”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멀어지는 말의 엉덩이 뒤로 긴 꼬리가 살랑살랑 얄밉게도 흔들린다. 그것을 꾹 참고 지켜보던 고매하고 정정한 노인의 입에서 마침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욕이 터져 나왔다.

“저런 썩을 놈이 다 있나!”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공주의 울음을 멎게 한 건 틀림없이 백마를 타고 온 기사였다.

눈물을 멈출 수 있는 자에게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고 했으니, 공주를 데려가는 게 소원이라면 지금은 놓아줄 수밖에.

“훗날 네놈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썩을 놈!”

두고 보자, 이놈.

온 동네 마법사들이 오뉴월의 서리처럼 지팡이를 쓱싹쓱싹 갈고닦았다.

* * *

호텔 앞에 내려 주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안 놓였는지 클로드는 태리를 그녀가 머무는 호텔방의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안시에게 발각됐다면 턱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한창 손님들이 나가고 난 뒤에 바쁘게 청소를 하는 시간이라 호텔의 마법사들은 두 사람이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버리지 않고 태리는 닫힌 문을 기대고 서선 조심스럽게 클로드를 살폈다.

요즘은 그도 무척 바쁘다고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혼자 갈 테니 돌아가라는 말이 죽어도 나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기어이 바쁜 그를 여기까지 데리고 올라와 버린 거다.

“…….”

클로드는 눈치를 살피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팔을 들어 서늘한 제 손등을 그녀의 눈가에 슬며시 갖다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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