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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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 이건.” 

아니다. 시야가 변한 줄 알았더니 아예 서 있는 자리가 바뀌었다. 공간이 달라졌다.

의뭉스러웠던 소년도 사라지고 약재상의 거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구시가지에서 폐허로 이어지는 어느 길목의 초입에 서 있었다.

뭐야, 그 망할 녀석. 왜 날 납치해서 이런 데다가 떨궈.

그의 앞으로 다리를 절뚝대며 다가오고 있는 한 무리가 보였다. 시력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아까 공주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난 바로 그놈들이었다.

“설마 지금 나더러 쟤들 처리하라 이거냐?”

누굴 살인 청부업자나 전문 암살자인 줄 아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발끝에 걸리는 돌을 깡 하고 찼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화살 통에서 순순히 여러 개의 화살을 골라내듯이 뽑아낸다.

그것도 딱 사람 숫자에 맞게 다섯 개.

불쾌한 의뢰였지만 거절할 의사는 없다는 뜻이었다.

‘날 이런 취급하는 건 열받지만…….’

솔직히 아까 지켜보는데 기분이 좀 더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공주한테 깝죽거렸었던 부분.

“걘 내가 여기 와서 사귄 유일한 애란 말이지.”

목을 조르는 밧줄처럼 두껍고 거친 활시위가 끝까지 뒤로 잡아당겨졌다가 퉁 놓아졌다.

잠시 후 시가지에서 출발한 짐수레가 터덜터덜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왔다.

당나귀 뒤에 앉아서 느긋하게 콧노래를 부르던 행상인은 길에 들어선 순간 비명과 경기를 일으키며 나귀의 등에서 떨어졌다.

수레를 끌고 지나가야 할 골목길에 온통 핏물이 흥건한 탓이었다.

사냥감은 다섯, 저격수는 하나.

입을 목표로 삼은 건지 정확히 목구멍마다 하나씩 박혀 있는 하얀 깃이 기괴했다.

* * *

“곧 대대적인 토벌이 있지요. 그것 때문에 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태리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고 오므려지는 손으로 치마를 구겨 잡았다.

그런 염치없는 목적까지도 알고 있었다니.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파렴치한 자신이 그토록 못나 보일 수가 없었다.

마법사들의 합류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백작에게 그렇게나 큰소리를 쳤었는데…….

이제 보니 잘난 척하며 힘들지 않겠느냐 지껄였던 그의 말이 사실은 더 옳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몰랐던 건 오히려 그녀 자신이었다.

‘이 사람들은 데려갈 수는 없어.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이미 끔찍한 일을 겪은 이들에게 어떻게 다시 같은 장소로 돌아가 날 위해 싸워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은 지금까지도 내내 희생해 왔다. 차고 넘칠 정도로 과한 희생이다. 그만하면 됐고 그만하면 충분하다. 태리는 이 착한 사람들을 또다시 그곳으로 끌고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오지 마. 내가 혼자서도 최선을 다해서……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자 기사들이 검을 뽑아 사기를 올리듯 마법사들이 사방에서 각양각색의 지팡이들을 멋지게 꺼내 들었다.

“어째서 혼자 가신답니까? 저희는 부르실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언제쯤 이걸 쓰게 될까 매일 지팡이에 광을 내고 윤이 나도록 닦았습니다만.”

“전 벌써 위험한 마법 주문 잔뜩 외워 뒀다고요!”

출정 준비는 진작에 다 끝났다며 언제든 불러만 달라고 그들은 하나같이 호걸처럼 자신감을 표출했다.

그걸 뿌듯하게 되돌아본 촌장이 목울대를 출렁이며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밝혔다.

“저희들은 기꺼이 주군의 부름에 응해 집결합니다. 이자리스의 힘을 잊고 지냈던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조국의 영광을 되새겨 주겠습니다.”

그렇게 죄책감은 털어 내 주고 늠름한 용기는 보태 주더니 그는 태리를 아주 장하고 대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저희는 이런 공주님이 자랑스럽습니다. 큰 불행을 겪은 사람은 불행에 익숙해져 현실의 고달픔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현재를 바꿀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 하지요. 그런데 공주님께선 불행에 지지 않고 이만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참 장하십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

태리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또다시 멈췄던 눈물을 또르르 떨어트렸다.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뚝뚝 떨어지는 눈물들이 모여 무릎에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고여서 바다가 될 정도로 그녀는 하염없이 울었다.

“아, 어쩜 좋아. 겨우 그치게 해 드렸는데.”

마법사들은 다시금 애가 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러다간 공주님의 눈이 다 짓물러 헐 것 같았다. 쓰라리고 아플 텐데. 자신들이 그 모습을 어찌 본단 말인가.

그들은 손수건을 들고, 급하게 제 옷을 찢고, 황급히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눈물을 허겁지겁 닦아 주었다.

이 눈물만 마르게 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금지된 마법이라도 쓸 것 같은 얼굴들로 ‘누구 할 수 있는 사람 없어?’ 하고 진지하게들 묻곤 했다.

공주님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자라면 당장 뭐라도 해 줄 텐데.

누구라도 좋으니 나타나, 제발!

그들의 간절함이 기적처럼 이루진 건 바로 그 염원이 울린 순간이었다.

불현듯 커다란 말이 땅을 접어 달리듯 맹렬한 속도로 등장하더니, 길게 울음을 뽑아내며 급정지를 했다.

훤칠한 남자가 그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고 그가 본인이 타고 온 말보다 더 돌풍 같은 기세로 그들을 뛰어넘어 모습을 드러낸 순간 마법이 이루어진 것이다.

흰 뺨을 타고 속절없이 흘러내리던 공주의 눈물이 뚝 그쳤다.

“머, 멈췄다!”

“세상에, 정말이야. 이제 울지 않으셔!”

마법사들은 커다랗게 환호했지만 애석하게도 클로드는 그 순간에 심장이 지옥을 향해 쿵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그가 목격한 것은 턱 끝에 있던 투명한 눈물방울이 무게를 못 이겨 떨어지는 장면과,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된 창백한 얼굴, 그리고 칙칙하고 음침한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한 여자를 괴롭히듯이 둘러싸고 있는 광경이었으니까.

이를 악문 그가 본능처럼 허리 쪽에 손을 갖다 대더니, 무덤 뚜껑을 미는 듯한 스스릉 소리를 내며 위압적인 검을 뽑았다. 정말이지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동작이었다.

“……울렸나.”

그렇다면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는 기세로 시퍼렇게 선 날을 마법사 집단을 향해 겨눈다. 혼자서.

그는 매우 매우 진심이었고 마법사들은 매우 매우 벙쪄 버렸다.

다 같이 어리둥절해진 마법사들은 뭐지? 뭐야? 저 미친놈 누구야? 하면서 수군거리다가 하나둘씩 그의 사특한 정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잠깐만, 저거 어디서 본 얼굴인데.”

“그렇지? 나도 아까부터 계속 낯이 익다고 생각했거든.”

“아! 생각났다! 저거, 저거 신시가지의 그놈이잖아!”

그놈이다, 그놈. 총독인지 개독인지 하는 제국에서 내려 보낸 악당 녀석.

저놈이 여길 왜 왔지? 싸우러 온 건가? 드디어 한번 제대로 붙어 보자는 건가!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소매를 걷어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네놈 생각만 하면 자면서도 어금니가 갈렸는데 감히 겁대가리도 없이 여길 혼자 쳐들어와?”

“기사 나부랭이가 침범할 땅이 아니라고!”

“지팡이로 두들겨 패서 황제의 똥구멍 앞으로 배달해 주마.”

저 잘난 기사 놈의 얼굴에 흉터를 새겨 준다고 혈안이 되어 떼거지로 우글우글 모이는데도 클로드는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싸울 기세가 아주 만만해서 목을 물어뜯기 위해 추진력을 모으는 맹수처럼 고요하게 검의 손잡이를 잡고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그걸 본 태리는 눈물이 마르다 못해 나왔던 것도 도로 쏙 들어갈 지경이었다.

‘저 멍청이! 돌대가리가!’

미쳤다. 저 남자 아주 미쳤다. 여기 마법사가 몇인데 지금. 하나같이 자기를 찜 쪄 먹고 싶어서 벼르고 있는 중인데!

더 늦기 전에 그녀는 의자를 밀치고 뛰어나갔다.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찢어진 치마가 덜렁거렸지만 그런 걸 따질 때도 아니다.

“그만! 그만둬요!”

야잇 주인공 멍청아 하지 말라고오! 저 띨띨이는 왜 내가 눈만 떼면 자꾸 고장이 나는 거야!

“……!”

짧은 대시 기술로 미끄러지듯이 적진으로 파고들었던 클로드는 달려오는 그녀를 발견하고 급제동이 걸린다.

도중에 멈춰 선 그가 갑자기 칼을 던진 건 그때였다. 얼굴이 흙빛이 되어선 자신의 목숨 줄과도 같은 칼을 내던지더니 갑자기 막 상의를 벗기 시작한다.

다른 직업군의 출중함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법사들도 제국 제일 검에 대한 무용담은 상당히 많이 들어왔던 편이라, 다들 긴장을 하고 대기 중이었는데 갑자기 그가 뭘 잘못 먹은 것처럼 옷을 벗으니까 단체로 당황을 했다.

“방금 덤벼들려던 거 아니었어?”

“뭐지, 신기술인가.”

뭘까, 저런 신박하게 돌은 놈은.

그리고 이어진 돌은 놈의 다음 행동에는 모두가 입을 뻐끔뻐끔 벌리며 기가 막혀 했다.

“저, 저, 저 개독 자식이 지금 우리 공주님한테 뭘 하는 거야?!”

클로드는 거침없이 벗은 자신의 외투를 태리의 허리에 두르고 꽉꽉 조여서 묶고 있었다. 허리가 묶이느라 그의 품에 쏙 들어가 버린 태리는 그가 씩씩거리며 따져 묻는 잔소리를 꼼짝없이 다 들어야만 했다.

“치마가 왜 이래. 이거 누가 찢었어.”

누구야. 이거 누구냐고. 누가 이렇게 찢어 놨냐고. 그 새끼 누구냐고. 이름 대라고.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면서 뛰어오는 그녀를 본 순간 눈깔이 살짝 돌 뻔했다. 한 번 묶은 걸로도 모자라서 두 번을 돌려 감는 그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섰다.

“찢은 게 아니라 그냥 찢어졌어…….”

태리가 궁색한 변명을 쭈뼛대며 내놓았다.

이마를 바짝 붙여 투닥거리기 시작한 남녀는 자기들만의 대화를 빠르게 주고받았다.

남자는 주로 속삭이는 톤으로 캐물었고, 여자는 작은 입술로 웅얼웅얼 받아치는 방식이었다.

찢은 게 아니라 찢어졌어. 그러니까 누가. 왜 누가 찢었을 거라고 생각해? 당신 주변에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다 당신을 노리고 있어, 눈들이 그래. 또 그런 이상한 소리하네. 달리다가 찢어진 거니까 유별나게 굴지 마.

“유별?”

클로드는 답답하다는 뜻으로 눈썹을 찡그리더니 한층 더 강하게 짓눌린 목소리로 내내 참고 있었던 말을 뱉었다.

“……야하잖아!”

“이게?”

왜지?

태리는 영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고개를 내려 갈라진 천을 들여다보았다. 약간 머메이드 형태의 스커트라 달리기를 하기에는 폭이 좁긴 했다.

그렇다 해도 이 정도가 뭐 심할 정도의 노출인가 싶어서 자가 점검을 해 보려고 했는데, 클로드가 부리나케 도로 덮어대는 통에 할 수가 없었다.

유별난 거 맞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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