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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길고 넓은 천을 빼낸 그녀는 거대한 파도가 바위를 밀쳐 내듯 천의 면적을 크게 펼쳐서 전방으로 휘둘렀다.
카펫은 이죽거리던 남자의 몸에 닿기 직전에 경질화 주문에 걸려 단단한 판때기로 변한 뒤 그의 전신을 후려쳐 구석까지 밀어 냈다.
“흐컥!”
내동댕이쳐져서 데굴데굴 어느 가게 안까지 굴러간 놈은 이제 그 가게 주인의 제물이 된다. 주인이 지팡이를 몽둥이처럼 탁탁 두드리며 남자를 수거해 갔다.
그렇게 하나 더 아웃되고 나니 눈 깜짝할 새에 적의 숫자는 둘로 줄었다.
“사, 사, 사람을 카펫으로 후려쳐?”
“마땅한 무기가 없는데 어찌하나.”
남은 놈 중에 덩치가 큰 놈이 재차 태리가 맨손인 것을 확인한다. 그러곤 상대하려면 지금이 적기라고 여겼는지 불시에 마테체를 뽑아 들었다.
칼날을 따라서 불길이 일고 있었다. 아마도 거리의 누군가에게 화염 강화라도 받은 모양. 그걸 믿고 달려들려는 거였다.
태리는 다시 한번 빠르게 주변을 훑어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던 고무 대야를 얼른 집어 들었다.
‘신속 빙결.’
순식간에 대야가 얼음덩어리처럼 쾅쾅 얼었다. 그녀는 그것으로 몸 안쪽을 노리고 들어오는 불의 검을 막아 낸다.
칼은 두꺼운 얼음을 반 정도 깬 상태에서 박혀 버렸고, 칼이 고정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는 대야를 멀리 던져 남자의 칼까지 함께 공중으로 날려 버렸다.
“멍청한 자식, 칼을 뺏기면 어떡해! 난 치료사라서 전투는 못 한단 말이야!”
“에이씨, 젠장, 야, 튀어!”
이제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내던진 건지, 남은 두 녀석들은 그제야 서둘러 내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살 궁리를 한다고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겁박을 해 댔다.
“공주가 어떻게 민간인에게 이런 짓을 합니까? 우리는 당신을 총독부에 신고할 겁니다. 공관에 가서 거기 있는 총독에게 당신을 고발할 거란 말입니다!”
발악을 하며 악을 쓰는데, 그 말에 웃음이 스며드는 건 왜인지.
그러고 보니 태리는 언젠가 자신이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던 적이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에, 브리짓의 기를 살려 주려고 갔었던 와인 바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었더라.’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그는 뭔가 길고 멋있는 말로 분명히 그녀의 편을 들어 주었었다.
으음, 뭐. 뭘 해도 잘했다고 해 주겠지.
그녀는 신이 나서 남자들을 잡으러 달렸고 더 신이 나서 소리쳤다.
“가서 이르긴 뭘 일러. 그 총독이 적극 권장한 건데!”
양아치들을 쫓아내는 데에 여전히 빈손인 게 아쉬워서 가는 길에 어느 가게 앞에 기대서 있는 빗자루까지도 야무지게 챙겼다.
거침없이 내달리는 그녀의 뒤로 수없이 많은 마법 캐스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민첩 상승! 대지의 밀림으로 이동 속도와 공격 속도 증폭!”
“모든 피해로부터의 회피! 절대 보호!”
“치명타를 가하는 주먹! 약점 간파!”
등 뒤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몸이 가벼워지더니 전신에서 폭포수 같은 에너지가 넘쳐흐르기 시작한다.
눈이 휘둥그레진 태리는 작은 주먹을 쥐어 보았다. 그것으로 무엇이든 다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은 강력한 힘이 들어서.
‘아니,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이 힘이면 아파트도 뿌셔뿌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순식간에 놈들을 따라붙은 그녀는 우선 한 녀석의 뒷목을 빗자루로 적중시켰다.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내려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기적인 버프를 얻은 덕분에 바로 치명적인 일격이 터졌다.
같이 뛰던 동료가 흰자위를 보이고 쓰러지는 걸 확인한 최후의 한 놈은 더욱더 이를 악물고 죽기 살기로 뛰었다.
태리는 그 불쌍한 뒷모습을 쫓지 않고 노려보더니 불현듯 어떤 멋진 생각이 떠올랐는지, 빗자루를 한 손에 창처럼 쥐고 목표물을 겨냥했다.
‘광명의 스피어.’
드래곤이 공부하라고 던져 주었던 그 서적.
거기서 보았던 빼곡한 마법식을 오차 없이 머릿속으로 그려 나간다. 선을 긋고 원을 만들고 도형을 이뤄 도식이 차근차근 완성되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일대의 빛이 빗자루에 모여들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겠지?’
모르겠다. 아무튼 난 책에서 하라고 한 대로 했으니까.
빗자루는 이제 더 이상 빗자루의 형태가 아니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창기사의 창처럼 날카롭고 길게 뻗어 있었다.
“맙소사, 저건 선왕 폐하의 저격기인데?”
“저 마법을 다시 보게 될 줄은…….”
태리는 도망가는 놈의 등을 향해 소환된 창을 투포환처럼 힘껏 내던졌다.
빛으로 빚어진 창은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 남자를 저격하고, 그를 몇 미터 밖으로 뻥 밀어 내 자빠뜨리더니 잠시 후 다시 빗자루가 되어 툭 떨어졌다.
그렇게 전원 처치.
남은 적군의 수 제로.
솔직히 이기지 못하면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을 만큼 싱거운 대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공주를 응원하고 있던 자들의 눈에는 그게 아니었는지 거리에는 즉각 커다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와, 우리 공주님이 저 x밥들을 다 무찔러 주셨다! 우리 공주님 만만세다!
얼마나 열광의 도가니였으면 제일 처음에 미사일처럼 던졌던 인형까지도 분위기에 합세해 환호했다. 아직까지도 알차게 머리를 뜯어 먹고 있던 인형은 푸학! 하고 고개를 들며 쾌재를 질렀다.
“앙, 마시쪄! 이 맛이지. 너희 공주가 최고다!”
흙바닥에 엎어져서 머리를 뜯어 먹히고 있던 놈은 뒤늦게야 가물가물한 정신을 차리곤 태리를 보며 분통을 금치 못했다.
놈이 ‘마법을 써서 치사하게…….’라고 씨근덕거리는 것 같길래 태리는 간결한 한마디로 그의 입을 닥치도록 해 주었다.
“꼬우면 법사 하든가.”
왜, 내가 숨만 쉬어도 강한 게 부러워? 아, 그러면 너도 법사 하든가. 꼬우면 센 거 하라고.
기사를 하다가 열받아서 마법사로 전직한 바람에 게임 속에 끌려 들어온 차라 그건 어쩌면 그녀로선 한이 실린 발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법사 우월주의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에겐 그 말보다 더 값진 포상은 없어서 가뜩이나 불같던 함성이 활화산이 되어 폭발했다.
“들었냐! 꼬우면 법사 하시란다!”
“아함! 아함! 지당하신 말씀!”
“새겨들으라고, 엉?”
그렇게 거리는 축제의 분위기가 되었다. 오늘은 돈벌이고 나발이고 가게 문 닫으라고 깨춤을 추는 사람들이 중앙으로 몰려나온다.
그들 사이에서 동화되지 못하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이즈리얼은 기가 막힌 상황에 베어 먹고 있던 사과를 떨어트릴 뻔했다.
“말도 안 되지, 저게 무슨…… 저게 어딜 봐서 법사냐. 저게 무슨 개사기 능력이냐.”
법사스러운 기술로 야무지게 사람을 두들기는 격투가. 아니면 법사인 척하면서 먼지 나게 사람을 때려 주는 매질쟁이 뭐 그런 거면 몰라도.
구할 재료가 있어서 왔다가 엉겁결에 휘말린 싸움 구경. 보는 재미야 있었지만 육탄전을 불사하는 마법사는 그도 태어나 처음 보았다.
그리고 또 한편에는 이즈만큼이나 지금의 상황에 어울리지 못하고 바삐 어디론가 뛰어가는 기사도 한 명 더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몰래 공주의 감시 및 보호 역할을 도맡았던 기사단의 주접꾼은 엉덩이 뒤로 부아아앙 소리를 내며 부리나케 공관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이고, 여기 난리 났소, 단자아아앙!”
* * *
거리의 중앙에 위치한 작은 원형 광장의 중심에서 태리는 누군가가 마련해 준 의자에 앉아 미지근한 온도의 코코아를 마셨다.
달리면서 싸우느라 찢어진 치마의 옆선이 앉을 때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아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렸더니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이유도 없이 따라들 웃는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현재 그녀는 광장의 중심에서 마법사들의 의해 둥그렇게 둘러싸여 있는 상태였다.
릴리와 마치는 그녀의 좌우에 오른팔, 왼팔처럼 앉아서 그곳이 일등석인 것 마냥 자랑스러움을 뽐내고 있고, 구경꾼처럼 서 있는 마법사들은 콧구멍을 벌렁대며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도를 넘은 집중력을 보인다.
간혹 관중석의 맨 뒷줄에서 ‘형씨, 거기 좀 비켜 봐요!’ 하면서 서로를 당기고 미는 잡음이 살짝씩 들려오기도 했다.
‘무슨 동물의 왕국에 사는 카나리아가 된 것 같아.’
카나리아가 지지배배 노래를 부르는데 숲속에 사는 동물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어머! 너무 예쁜 목소리야! 하면서 감상하고 있는 느낌?
자신의 키만 한 나무지팡이를 잡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노인이 마침내 어색함을 깨고 그녀에게 제일 먼저 다가왔다.
“공주님, 진정이 좀 되셨는지요. 저희 때문에 많이 놀라신 듯합니다.”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자 노인의 푸근한 인상이 따스하게 밝아졌다.
“저는 이곳의 촌장입니다. 죽기 전에 이렇게 장성하신 공주님의 모습을 뵐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세월이 주는 선물이란 이런 것이로군요.”
세월. 짧지 않은 시간과 그보다 더 긴 기다림이 느껴지는 단어였다.
“남아 있는 옛 이자리스의 주민들은 대부분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숲의 모험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다 보니 약재상의 거리라는 명칭이 붙었지만 보시다시피 다 소규모의 상점들입니다.”
“어, 저기…….”
“부디 편히 말씀해 주시지요.”
“아까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면서요? 아니, 난다……면서?”
촌장은 씁쓸한 미소로 긍정하면서도, 크게 우려하지는 말라고 답했다. 자신들의 힘으로 이제껏 잘 퇴치해 왔다면서.
“적진 않지만 적절한 선에서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다신 얼씬도 못 하도록 할 수 있다면 편하겠으나 그들은 저희들의 생계이기도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구나…….
과거에는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을 테지만 하루아침에 살던 곳이 무너지고 살길이 막힌 이들이다.
피해 수복을 위해 힘써야 했을 왕은 죽었고, 나라의 근간이었던 일급 마법사들은 재앙을 막는 데에 목숨을 바쳤으니 이들은 그 누구의 보살핌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티며 스스로 먹고 살길을 찾아야만 했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그들이 손님이구나.”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저희들끼리도 분란이 많았지요. 마법사의 긍지를 해치는 일이라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시련 앞에 서면 사람은 겸손해지는 법이지요. 생계란 자긍심을 지키는 게 아닌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일이란 걸 이제 모두들 성숙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촌장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웃었지만 태리는 도저히 그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