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됐습니다. 어차피 얕은 상처입니다.”
“근데 나 때문에 이렇게 늦어서 어떡해요. 내가 데려다줄까 봐요.”
그녀의 말을 ‘밤길이 위험해서 어찌 가니’ 그런 의미로 읽었는지 그의 얼굴이 희한하게 찡그려졌다.
“그건 제가 할 말이고. 아니, 그것보다 할 말이 있다고 했잖습니까.”
“아, 그거 진짜였구나.”
그냥 변명인 줄 알았는데.
“진짜죠, 그럼.”
자신을 도대체 얼마나 유치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거냐며, 그가 옷을 도로 끼어 입고 외투의 안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판판한 카드와 비스킷 봉지 두 가지가 동시에 잡혔지만 뭐부터 줄까의 고민 없이 그는 당연히 비스킷 봉지부터 먼저 꺼냈다.
“배 안 고픕니까? 아까도 쥐꼬리만큼 뜯어 먹던데.”
“나 주려고 가져온 거예요?”
“이런 걸 먹일 사람은 제 주위에 공주님밖에 없습니다.”
무슨 심각한 내용인가 했는데 주섬주섬 꺼내는 게 비스킷이라니. 다 큰 남자의 그런 모습이 왠지 너무 귀엽게 느껴져서 태리는 조그마하게 웃었다.
손은 점잖게 내밀고 있는데 얼굴은 ‘얼른 먹어, 응? 빨리 먹어, 맛있어!’ 하고 반질반질한 눈동자를 빛내고 있다. 혹시나 호텔 식구들에게 걸려서 곤란해질까 망까지 봐 주고 있고.
왜 이렇게 날 먹이지 못해서 안달이지.
꼭 그가 키우는 햄스터나 다람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배고프다고 앞발을 탁탁 치면서 항의하면 그가 얼른 와서 맛있는 씨앗들을 잔뜩 가져와 대령하는 그런 관계.
봉지를 뜯어서 비스킷 한 개를 바스락 소리 내어 베어 먹었다.
‘맛있다.’
그가 가져와 먹이는 것들은 이렇게 늘 예외 없이 맛있는 것들뿐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계속해서 손이 갈 만큼.
한 입, 또 한 입을 조금씩 베어 먹다가 너무 맛있어서 태리는 봉지 안에서 제일 큰 것으로 골라 크게 앙 하고 깨물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는 크기가 너무 컸던 탓인지 그만 조각이 몇 부분으로 깨져서 턱 밑으로 후드득 떨어지고 말았다.
“아, 아깝……”
……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턱 밑으로 다가온 건 클로드의 커다란 손바닥. 빛보다 빠른 동작으로 그는 부스러기를 한 손 안에 다 받아 내더니 아무렇지 않게 그것들을 자신의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걸 먹었어요?”
“예, 먹었는데요.”
“그걸 왜 주워 먹어요!”
“칠칠치 못하게 다 떨어트리니까.”
말 안 했는데 아까도 많이 떨어트렸다면서 그는 아예 그녀의 턱 아래에 자신의 손바닥을 턱받침처럼 갖다 붙였다. 떨어트리면 또 주워 먹으려고.
태리가 빨개진 얼굴로 하지 말라고 구시렁거렸다.
클로드는 그녀가 또 떨어트리지는 않는지 눈을 껌뻑껌뻑하고 지켜보며 비스킷이 전부 바닥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뒤 태리가 다 먹고 남긴 빈 봉투는 도로 수거해 가고 다른 물건을 무릎 위에 올려놔 주었다.
“낮에 백작이 이걸 남기고 갔습니다.”
크리스마스카드를 연상시키는 붉은색 편지 봉투였다. 여는 부분이 고풍스러운 봉인 도장이 찍힌 실링 왁스로 봉해져 있었는데 그 고급스러움이 왠지 달갑지 않아 태리는 섣불리 뜯지 못하고 물었다.
“열어 보기 전에 매부터 먼저 맞을래요. 뭔지 말해 줘요.”
“……초대장입니다.”
“백작이 날 초대할 리는 없고. 역시, 그분인가요?”
제 선에서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애썼으나 역부족이었던 듯 클로드가 미안한 태도로 눈꺼풀을 내리며 말했다.
“예, 아무래도 고모님이 당신을 직접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설마 했는데 제발 아니길 바랐던 대형 사건이었다.
황제가 날 보고 싶어 한다니. 그것도 직접 만나고자 초대까지 할 정도라니. 이건 어떡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예정에 없었던 미래 앞에 태리는 잠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게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자리스가 배경이었고 다른 지역을 방문하는 에피소드는 등장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초대에 응해 자신이 발로란을 방문하게 된다면 사전 정보라곤 하나도 없는 미지의 세계에 그냥 내던져지게 되는 셈.
이게 과연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걱정부터 앞섰다.
“정식으로 된 초대장은 아닙니다. 편지에도 그냥 평범한 안부 인사 정도만 적혀 있겠죠. 그렇다 해도 마음의 준비는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식 서한이 오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공식적인 절차를 밟는 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그럴듯한 구실과 자리도 마련해야 할 거고 공주님을 맞을 준비도 해 놔야겠죠. 대략 왕묘 토벌 이후쯤으로 잡히지 않겠습니까. 아마 백작이 그렇게 되도록 조율할 겁니다.”
토벌 이후라면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업적을 하나라도 더 쌓아서 가게 되니까. 하나라도 덜 꿇리게 될 테니.
지금까진 미래를 훤히 알고 있었던 곳에 눈에 익은 장소 안에서만 머물러 왔었다. 그러나 제국의 수도는 그 무엇도 미리 겪어 보지 못한 미지의 장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겁이 찔끔 난 태리는 본능처럼 손을 뻗어 클로드의 소매를 꼬옥 쥐었다.
“갈 때 나랑 같이 가는 거죠? 꼭 같이 있어 줘야 돼요. 나 두고 어디 가면 안 돼요.”
내 동아줄. 내 조력자. 내 계약서의 하나뿐인 주인공. 그가 없으면 뭘 해도 말짱 도루묵이며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지금과 같은 절대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위기의 상황일수록 더욱더 빛을 발휘하는 그의 존재를 태리는 두 손으로 꼬옥 잡았다.
“그, 그, 그…….”
빨간 물감이 펑 터진 것처럼 클로드는 순식간에 양쪽 귀를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얼굴을 푹 숙여 감춘다.
그래도 듣고 무시한 건 아니고 ‘당연한 소리 하지 마…….’라고 바람 소리보다 약간 더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해 주긴 해 주었다.
귀여워, 귀여워. 그걸 태리가 흐뭇하게 바라보자 추태를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어른스럽게 두어 마디도 더 추가했다.
“가도 어차피 전 거기서 할 일도 없고.”
거짓말이다. 줄줄이 있다. 아마도 줄줄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클로드는 그렇게 믿었다. 난 일이 없고 쭉 없을 예정이라고.
또한 그래야 하는 게 맞았다. 황궁에서 공주를 잡아먹으려고 쇳물을 펄펄 끓이며 대기하고 있을 텐데. 자신이라도 곁에 있어 주지 않는다면 그건 도무지 인간 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딜…… 혼자 보내겠습니까.”
어떻게 혼자 보내겠나.
이렇게나 마음이 쓰여서. 이렇게나 안쓰럽고 이렇게나 안절부절못해서.
“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혼자서는 자신이 없었거든요. 혼자 가야 되는 거면 안 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네가 있어 주면 갈 수 있지. 같이 있어 주면 난 자신이 있어.
공주가 그리 대답하며 조용히 웃었다.
남자의 손에 들린 빈 종이봉투가 바스락 부끄러운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 * *
며칠 뒤 ‘용사여 일어나라!’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포고문이 브리짓의 찻집 유리 전면에 붙었다.
스스로를 진정한 용사라 생각하는 자라면 모월 모일 모시에 숲에서 결집하라. 의기가 있는 자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나와 언데드를 척살하자! ……(중략)…… 비록 제국의 기사단은 실패했으나 이 글을 읽는 그대가 발로란의 기사보다 못할 게 무어냐. 항거하라! 명예는 도전하는 자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