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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게, 아니다, 이건.”
그가 자기 암시를 걸듯 고개를 흠칫 떠는 걸 보며 이즈가 코웃음을 쳤다.
“맞는 것 같은데.”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공주께 마음이 있나. 왜 자꾸 주변을 맴돌지.”
“그건 네 얘기 아니야.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졸졸졸.”
“아니라고 했다, 난.”
“하, 진짜 뭐 이런 등신이 다 있어. 너 그러다가 언젠가 후회…… 아, 아니다. 이딴 얘긴 해 줄 필요가 없지. 그래 뭐, 보다시피 나도 아냐. 조금밖에 못 사는 것들 좋아하게 되면 인생이 얼마나 골치 아파지는지 알아? 내 손으로 고생길을 자처할 순 없지.”
끽해야 육십, 칠십 정도 먹으면 아파서 골골대다가 쉽게 죽어 버리는 게 인간이다. 그에 반해 엘프는 수백 년은 거뜬히 산다. 때문에 그 둘이 맺어지면 그건 재앙이었다.
인간을 반려로 맞은 엘프의 말로는 단 두 가지뿐이다. 자신보다 먼저 죽은 반려의 환생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눈물로 버티거나 아니면 그 전에 그리움에 미쳐서 정신이 나가 버리거나.
이즈는 어느 쪽도 극구 사양하고 싶었다.
“어이, 인간 공주를 좋아하지 않는 인간 기사.”
“…….”
“그러면 너 왜 안 가고 여기 있냐?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이렇게 벌서면서까지 기다릴 이유가 있나? 아니면 나랑 사생결단 한 번 더 내고 싶어서?”
“내가 왜 가야 하지.”
“볼일이 없으면 집엘 가야지. 한 판 더 싸워서 서로 인생 조져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오늘은 내가 선약도 있고 하니까 승부는 다음에 보자고.”
“볼일, 나도 있다.”
지기 싫어서. 절대 용건도 없이 온 건 아니라는 걸 피력하기 위해서 클로드는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안간힘을 줘서 말했다.
“공주님께 할 말이 있다고.”
“뭔데?”
“단둘이 있을 때 따로 말할 거다.”
“그래?”
가볍게 대꾸하곤 손에 묻은 소스를 혀로 핥더니 이즈가 엉덩이를 탈탈 털며 일어섰다. 접시는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고 빈 술병에선 텅텅 소리가 났다.
“그럼 나 끝날 때까지 기다려라.”
“……?”
“내가 먼저니까. 기다리라고.”
재수 없는 비웃음이 픽 귓가를 스쳤다.
* * *
넌 나 다음이야, 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클로드는 속아 넘어가는 척도 하지 않았었다.
내가 귀쟁이보다 후순위라니. 내가 저거보다 밀릴 거라니. 어디 그런 개소리가 다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개소리는 공주가 공구 통을 들고 호텔을 빠져나온 순간 믿을 수 없게도 명백한 사실로 증명되었다.
“아,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약속한 거 잊지 않았지? 커튼 꼭 달아 줘야 돼.”
안에서 어떤 과정이 있었던 건지 여러 겹의 신체 보호 마법을 겹겹이 두른 그녀는 귀쟁이 놈의 성화에 인상을 찡그리긴 했지만 끄덕거리며 뒤를 따랐다.
그녀가 제 옆을 지나칠 때 클로드가 반사적으로 움직여 가느다란 손목을 붙들었다.
잡힐 걸 알고 있었는지 태리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치료 좀 했어요? 안 했죠? 이걸로 얼른 상처부터 살펴봐요.”
아마도 몰래 숨겨 온 듯한, 공구 통 속에 쑤셔 넣어 온 붕대와 약 꾸러미, 힐링 포션 주사기를 잽싸게 내민다.
얼른 약이라도 바르라는 재촉에 클로드는 고집불통 같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약. 혼자 못 바릅니다. 혼자 바르면…… 덧나.”
물론 말도 안 되는 억지였고, 곧바로 그녀에게 찰싹 등을 후려 맞았다.
“혼자 못 바르긴 왜 못 발라요. 등이라도 다쳤나! 정 그러면 가서 누구한테 봐 달라고 해요. 알았죠? 난 바빠서 먼저 가 볼게요.”
그런 식으로 그녀는 대충 약이나 떠넘기며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건 안 되지. 그런 식은 못 참지. 절대 못 보내지. 클로드는 또다시 지나치려는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내 얘기도 안 들어 보고 어딜 갑니까. 나도 할 말이 있단 말입니다. 줄 것도 있고.”
“뭔데요. 급한 거예요? 아니면 좀 기다려요. 저 집에 커튼만 달아 주고 올게요. 코앞이니까 금방 끝날 거예요.”
여기서 기다리면 저것만 먼저 후딱 해결해 주고 온다는, 그건 태리로선 최대한의 타협과 양해의 표시였다.
그러나 듣는 클로드는 다르다. 다시 한번 사실로 증명되는 2차 확인 사살 앞에 그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기다리라고? 기다리라고? 나 보고 기다리라고?”
그 한 문장에 왜 그렇게까지 꽂혔는진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그는 그랬다. 뇌가 단단히 망가진 것처럼 사고가 삐걱대더니 사리 분별이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
“놀러 가는 게 아니잖아요. 해 주고 얻어 낼 게 있어서 그래요. 금방 올 테니까 치료부터 하고있어요. 꼭 해야 돼요.”
급한 불부터 끈다는 심정으로 태리는 잡혀 있는 손목을 털어 냈다.
그런데 아무리 흔들고 빼내려고 해도 손목이 안 빠진다.
여기 접착제라도 발라 놨나. 왼쪽으로 빼면 오른쪽으로 잡아당기고, 앞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면 뒤로 움켜잡고. 흔들면 흔들수록 악력이 점점 더 강해져서 도무지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아, 왜 이래요!”
“…….”
“안 놓을 거예요?”
으으…….
으으으……!
클로드는 최대한 자신을 절제하고 다스려 보았다. 내면의 열이 끓어올라서 정수리로 화산이 폭발할 것 같았지만 참고 또 참아서 가지 말라는, 사람 꼴 우스워지기 딱 십상인 그 구질구질하고 질척대는 대사만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참아 내는 데 성공했다.
“데려가.”
그리고 치열하게 머릿속을 뒤진 끝에 마침내 그것과 비슷한 문장까지도 찾아냈다.
“뭐라고요?”
“데려가라고.”
여기다가 버려두고 갈 거면 차라리 주워 가란 말이다. 사람 처지 비참하게 여기 혼자 세워 두지 말고!
“와서 뭐 하게요. 와 봤자 쓸모도 없어요. 몸도 성치 않은데 괜히 고생만 할 게 뻔하고.”
“……쓸모가 없어?”
그러나 삶이란 건 그런 것이다. 인생이란 게 그렇다. 도무지 만만한 게 없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있다.
넌 쓸모가 없다. 그 말이 그랬다. 그 말이 그에게 산이 되고 바다가 되어서 앞을 탁 가로막았다.
……상처인데. 이거 엄청 상처인데.
대체 그게 왜 상처가 되는지 모를 정도로, 어째서 그런 말에 상처를 입는 건지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을 정도로 그 말은 그의 가슴에 생채기를 입혔다.
순간적으로 심장 한구석이 얼음덩어리에 얻어 맞은 것처럼 시큰거려서, 태어나 처음으로 겪어 보는 낯선 경험 앞에 그는 또다시 고장이 났다.
“쓸모가 없어? 쓸모가 없어? 쓸모가 없어? 내가? 내가 당신한테 쓸모가 없다고? 내가, 내가…… 왜…… 내가 왜 쓸모가 없어.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한테 상처 주지 말라고. 그 점을 확실하게 항의했어야 했는데 널뛰는 감정이 통제가 잘 안 돼서 말이 제대로 잘 안 나왔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해서 입술만 꾹 물고 있으려니 놀란 태리가 알았다며 가자고, 같이 가자고 손을 내밀었다.
“아, 알겠어요, 따라와요. 오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요. 근데 일하는데 뭘 따라온대, 굳이!”
“따라가는 게 아니잖아. 날 데려가라고.”
“그래, 알았다고, 데려간다고!”
기분이 살짝 나쁠 수도 있는 거야 그녀도 예상을 좀 하긴 했다.
유치원에서 친구랑 치고받고 싸웠는데 선생님이 와서 친구 먼저 봐 주고 네 얘긴 그다음에 들어 줄게, 라고 한다면 당연히 속이 상할 수도 있지.
그래,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럴 수도 있기는 하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그러니까 그 선생님이 어디 사탕이라도 주는 거였으면.
‘아니, 진짜 왜 굳이……?’
쫓아와선 사서 고생을 하나? 게다가 데려가라니.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녀가 붙들고 있는 손을 꽉꽉 꼬집듯이 클로드를 잡아끌었다.
* * *
‘내가 왜 처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의 침실을 정성 들여 꾸며 주고 있어야 하지. 그것도 알록달록하게!’
나사를 박아 고정시킨 커튼 봉에 고리를 하나하나 꿰어 넣으며 클로드는 흡혈귀 같은 섬뜩한 눈을 치켜떴다.
“여기가 아닌 것 같아. 왼쪽, 좀 더 왼쪽으로. 그렇지.”
이즈는 원 플러스 원처럼 끼어 들어온 클로드를 내쫓지 않았다. 오히려 일꾼이 한 명 더 늘었다고 반기더니 그에게는 커튼 달기를 냉큼 일임해 버리고, 본인은 태리와 함께 액자 달기에 집중했다.
“이쯤이 가운데가 맞는 것 같은데. 그냥 여기 걸자.”
“안 돼.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고. 얼룩을 가리면서도 정중앙일 수 있는 자리에 놔야 된단 말이야.”
그래서 현재 그녀는 이즈와 함께 사이좋게 벽의 정가운데를 찾아 좌우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중이다.
“좀 더 내 쪽으로 와 봐.”
“왔는데?”
“더 가깝게 붙으란 소리잖아. 기울기가 안 맞으니까.”
그리고 그 꼴을 보다 보다 못 참으면 클로드가 손에 든 뭔가를 이즈의 머리통으로 날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흉기에 가까운 스패너가 공중을 가르며 은빛 머리칼을 스쳤다.
“이 미친! 아까부터 뭘 자꾸 던져!”
“혼자 해라, 귀쟁이.”
“혼자 잡으면 얼마나 무거운지 알아?”
이걸 얼른 처리해야 원하는 정보를 챙기고 저 둘을 떼어 놓을 텐데. 발을 동동 굴린 태리가 들고 있던 액자의 귀퉁이를 내려놓고 벽의 높이와 너비를 가늠해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사다리가 있어야겠는데. 그게 빠를 것 같아.”
“사다리?”
“혹시 있어?”
“아, 사다리. 그거 내 창고에 있지! 전에 주워다 놓은 거 있어. 어느 집에서 멀쩡한 걸 앞마당에 내놨길래 주워다 놨었거든.”
멀쩡한 걸 마당에 내놨다면…….
“그건 버린 게 아니지 않았을까?”
“훔쳤군. 도둑놈.”
“뭐래. 버린 게 아니면 잃어버리지 않게 고이 집 안에 모셔놨어야지. 밖에 내놔서 간수 못 한 놈이 잘못 아니냐.”
도둑질을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다니. 설마 진심인가 싶었는데 엘프의 창고에 가고 나서야 그녀는 그것이 농도 100%의 진심이었다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게 됐다.
창고 안에는 남의 집 마당에 보관하는, 이즈의 입장에선 버린 것으로 간주되어 그냥 막 들고 온 게 분명한 온갖 잡동사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