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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무래기들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등신이, 라고 이즈가 날린 광역 도발을 시작으로 눈에 뵈는 게 없는 남자들의 난장판은 포문을 열었다.
클로드의 첫 수는 견제.
그는 검을 뽑지 않고 검집째로 호리호리해 보이는 엘프의 허리를 가격했다.
약하지 않으면서도 애매하게 강한 그 공격을 이즈는 양손을 크로스 해 만든 가드로 정면에서 방어했고 빠각, 하고 손목뼈에 둔탁한 통증이 왔음에도 기 싸움을 그칠 줄을 몰랐다.
“와, 이게 뭐야. 소리만 크고 타격감은 시원찮은데?”
“한 번은 방생하는 거지.”
“방생?”
한 번은 그냥 봐줬다는 발언이 자존심을 긁었는지 두 번째 공격에서 이즈는 커다랗게 도약하며 천장 끝까지 뛰어올랐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꽂힌 것은 기다란 세 개의 화살. 활도 없이 화살만으로 어쩔 요량인가 싶었는데, 바람의 정령 실프의 도움을 받아 맹렬하게 가속된 화살을 아래로 튕겨 냈다.
“날 잡으려면 목숨을 걸어야지!”
물리적으로 쏘아 낸 화살이 아닌 정령술의 힘을 받아 날아오는 화살은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는다. 약해지지 않고 계속 강해지기만 할 뿐. 게다가 정령들이 조정하고 있으니 피한다 해도 목표물을 쫓아서 방향을 틀 게 분명했다.
‘정령을 베는 건 처음인데.’
그래도 뭐 처음이 어렵지. 몇 번 맞아 주면서 상대하다 보면 대충 쉬워지겠지.
누가 들으면 미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클로드는 진심으로 이런 생각이었다. 처음엔 까다로워도 익숙해지면 다 될 거라고. 이제까지 인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실제로 다 되기도 했다.
손바닥 안에서 자유자재로 회전하는 검을 쥐고 그가 거꾸로 이즈의 공격권 안으로 들어갔다.
몸을 사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피하기 어려우면 맞아 주면 될 일이고, 맞고 난 후에는 그보다 더 때려 주면 끝날 일.
오러에 휩싸인 검의 외관이 순식간에 두 배의 길이로 늘어난다. 길이가 늘어난 만큼 검의 사정거리 역시 그만큼이나 길어졌다.
마법이 언어에서 오는 힘이라면 기사들의 오러는 의지에서 일어나는 힘.
때문에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는 정령들은 클로드의 검에 실린 오러를 본 순간, 자신들이 맞서야 할 세계관 최강자의 정신 나간 의지를 실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화살을 붙잡고 있던 실프들이 검과 충돌하기 전 다 같이 ‘꺄아아 무서워!’ 하고 소리를 지르며 흩어졌다.
맥없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세 개의 화살을 분쇄하듯 칼로 베어 버리고, 클로드는 탐색전 없이 곧장 이즈의 몸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끝장내려면 내가 들어가야 해.’
근접전을 유도해 저 성가신 원거리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한다.
군대의 첫 줄에서 말을 타고 돌진과 차징 기술을 주로 구사하는 기사들에게 궁수는 제일 짜증 나는 포지션이었다.
그러나 충분히 파고든 뒤 찔러 넣었음에도 이즈는 얄미울 정도로 날렵하게 몸을 물리며 회피했다.
“그 거리를 이 정도로 가깝게 붙어 와? 쉽게 안 죽을 것 같더라니. 근성이 있네.”
“너 좋으라고 붙어 온 줄 아나. 네놈 목 따려고 온 거다, 천박한 귀쟁이 자식.”
봐줄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으므로 클로드는 검신을 휘두르는 척하면서 약을 올리는 이즈의 턱을 있는 힘껏 주먹으로 가격했다.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이즈가 벽에 날아가 부딪혀 일부가 깨지면서 벽이 그만큼 움푹 파였다.
공격과 공격 사이의 사소한 빈틈 하나도 없이 클로드는 돌조각을 뒤집어쓴 채 휘청거리는 이즈의 어깨에 곧장 무자비한 발을 얹은 뒤 그대로 짓눌러 버렸다. 어깨를 박살 내고 아예 벽 안으로 처박아 버리겠다는 듯이.
“너무 약한데.”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말하는 거였다. 실내인 만큼 궁수에게는 다소 불리한 싸움이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이엘프가 동원할 수 있는 정령의 급이 이렇게나 낮다고? 말이 안 된다.
이즈가 소환했던 정령은 고작해야 바람의 하급 정령 몇 마리뿐이었다.
“날 상대로 힘을 숨기는 것도 아닐 테고…….”
하고 말을 흐린 순간이었다. 구멍이 난 것처럼 발이 아래로 빠지더니 밑에 깔려 있던 엘프의 신체가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분신이나 허상인가 싶었지만, 바닥을 쓰는 듯한 빠르고 얕은 발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하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바로 깨달았다.
‘이건 엘프의 방식이 아닌데.’
놀랍게도 그건 암살자의 보법이었다. 정령술사나 궁수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 그림자 기술.
인식한 순간 재빨리 대응하며 자세를 바꾸려 했지만 먼저 빈틈을 노리고 뒤를 잡은 것은 이즈. 그나마 순간의 기지로 각도를 튼 덕분에 단도는 그의 목덜미가 아닌 옆구리만을 살짝 스치게 됐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피가 붉게 스며 나왔다.
“날 호구로 알았나 본데 승부의 세계란 건 결국 다 결과주의 아니겠어? 최후의 승자는 나라고, 나.”
방심하게 한 뒤 급습을 가해 터트린 유효타.
물론 그렇게 자신하는 이즈의 몰골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니긴 했다.
털어 내지 못한 돌 부스러기가 머리에 잔뜩 껴 있고, 한쪽 어깨는 탈골됐는지 축 처져서 흔들거린다.
거기에다가 불러낸 정령들을 강제로 역소환당한 여파까지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을 테니 내상이 적진 않았다.
“벽에 갖다 넣고 파묻으려 할 줄은 몰랐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어깨 갈리는 줄 알았잖아.”
“뒤를 노리는 건 비겁한 짓이다.”
“비겁하다, 졸렬하다, 추하다. 다 잘한다는 뜻이지. 비겁한 짓이면 내가 안 할 줄 알았냐? 도대체 날 얼마나 개무시하는 거야? 어차피 내 손에 죽을 놈이 뭐라고 생각하건 중요하지도 않다고.”
기어이 피를 본 단도를 소매에 쓱쓱 문질러 닦으며 이즈는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음을 똑똑히 일렀다.
“이리 와. 와서 몸통 딱 대. 심리전에서 졌으면 칼빵이라도 한 대 더 맞아야지. 그게 싸움의 도리 아냐.”
“네 주제에 할 수 있으면.”
한쪽은 피가 새어 나오는 옆구리를 한 손으로 압박해서 눌렀고, 다른 쪽은 덜렁거리는 어깨를 신음을 내지르면서까지 억지로 끼워 맞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는 2차전을 예고하는 동작이었는데, 별안간 향긋한 음식 냄새가 그들 사이를 유유히 쑤시고 지나갔다.
짝짝!
그리고 이어지는 경쾌한 박수 소리 두 번.
붓으로 그린 듯한 억지웃음을 뒤집어쓴 안시가 쟁반 위에 지글지글 끓는 스튜를 들고 나오며 말했다.
“뭘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 공주님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처먹지 않을 방해꾼들은 이만 꺼져 주세요.”
말끝마다 작위적인 웃음이 붙어서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 포인트.
기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던 태리의 앞에 식기들을 착착 세팅하며 안시는 또 한 번 살벌한 경고장을 던졌다.
“거기 구제 불능 남성분 둘. 당신들은 이 길로 꺼져요, 당장. 공주님 식사하는 데 방해가 되면 심장을 몽땅 도려내서 오늘의 특별 메뉴에 올려 버릴 줄 알아요.”
“그냥 약간 싸운 거 가지고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나, 지배인.”
“그래, 얘만 죽이고 금방 끝낼 수 있다고.”
“아, 정말……!”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놈들 때문에 폭발한 걸까. 식사용 나이프를 흉기처럼 움켜쥐더니 그녀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출입구를 가리켰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다시는 이 안에 발도 못 들일 줄 아세요.”
다시는 못…… 들어오면.
클로드는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자연스럽게 태리를 찾아 눈길을 돌렸다. 숟가락 끝을 이로 깨문 채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길 못 들어오면 저 여자를 만나기는 더 어려워지겠지.
오늘도 행방불명이 돼서 하루 종일 사람 속을 태워 먹었던 여자다. 여기서 들어올 수 있는 구석이 더 좁아진다면 그건 정말 안 될 일이었다.
결론이 나자 클로드의 피 칠갑된 손이 바로 이즈리얼의 머리끄덩이를 콱 구겨 잡았다.
“나와.”
잡아서 출입구로 질질 끌고 간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머리를 잡혀 끌려가며 이즈는 핏발이 설 정도로 발광을 했다.
“이거 놔! 놓으라고! 미쳐 가지고 감히 내 머리채를 잡아?!”
“그럼 어떻게 하나. 네놈의 다른 곳은 죽어도 잡기 싫은데.”
머리끄덩이를 잡고 질질 끌며 그는 잠시 엘프의 손이라도 잡는 상상을 해 봤다.
웩. 토가 나올 것 같았다.
* * *
다행히도 1층의 식당에는 유달리 창문이 많아 밖에서도 안을 들여다보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쫓겨난 클로드는 멀리 가지 않고 바깥 창문에 붙어서 있었다.
거기에 서서 매의 눈으로 내부를 실시간 감시했다.
일찌감치 식사를 끝낸 기사들이 부서지고 뜯겨 나간 잔해들의 뒤처리를 하고 있고, 공주는 아직 지배인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을 지켜보며 그는 짧게 혀를 찼다.
‘또 저렇게 먹네, 또.’
스튜인지 뭐인지는 대충 떠먹고 구운 알감자만을 집어 먹고 있다. 보나 마나 맛없어서 저러겠지.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가슴팍에 넣어 두었던 비스킷을 꺼내서 확인했다.
싸울 때도 부서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모양이 온전하게 보존되어서 다행이었다.
‘이거 먹여야 되는데.’
그런 생각으로 작게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옆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갈빗대를 뜯던 이즈리얼이 참견하듯이 말했다.
“놔둬. 안쓰러워도 어쩔 거야. 입맛에 안 맞아도 먹고는 살아야 될 거 아니야. 공주 맘대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진가.”
대충 뭘 봤는지 알고 말하는 소리였다.
추방될 때 되더라도 본인이 주문한 고기만큼은 악착같이 받아 낸 그는 포도주를 병째로 들이켜며 술까지 콸콸 퍼마셨다.
“먹고살려고 저런다고.”
“그럼 어떡할 건데. 맛없다고 안 먹어? 굶어? 그런 배때기 부른 소리 하다간 굶어 죽기 딱 좋지.”
“다른 데 가서 먹이면 되잖아.”
“다른 데 어디. 아아, 너희 집? 그 마녀가 잘도 그러라고 보내 주겠다. 아까도 심장 파먹겠다고 지랄하는 거 못 봤어? 진짜 할 것 같던데.”
젠장, 젠장. 그래, 저 꽉 막힌 지배인이 문제다. 내가 데려가서 먹이면 잘 먹일 수 있는데 대체 왜!
클로드가 신경질적으로 호텔 벽을 차자 이즈가 입가를 쓱 닦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너 혹시 저 공주 좋아하냐?”
폐부를 찌르듯이 쑤욱 밀고 들어온 질문이었다. 클로드의 발이 허공에서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