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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30분 정도 잡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세 시간이 넘게 지나가 있었으니까. 그녀는 대략 그만큼의 시간 동안 실종된 상태와도 같았다.
거기에다가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걸 봐 버린 주접의 기사까지 있었으니 그쪽은 난리가 났을지도.
드래곤을 만난 충격이 너무 커서 미처 그 부분을 고려하지 못했다.
“저희도 걱정이 돼서 저녁이 되어도 안 오시면 찾으려 나가려고 준비 중이었지 뭐예요.”
“아니야. 괜한 걱정을 하게 했네. 그냥 혼자서 산책을 좀……. 돌아 왔으니까 별일 아니라고 그쪽에도 전달해 주면 좋을 텐데.”
“흥, 그걸 우리가 뭐 하러 알려 줘요! 애초에 공주님을 제대로 호위하지 못해서 잃어버린 걸 텐데요! 얼굴이라도 할퀴어 줄걸. 앗차차, 내 정신 좀 봐. 공주님 시장하시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드셨을 텐데.”
“괜찮아, 괜찮아. 공관에서 많이 먹었어.”
정확히는 많이 먹인 거지만.
한쪽 턱을 괴고 셋이서 떠드는 소리를 불만스럽게 듣고 있던 이즈가 더는 못 들어 주겠는지 또 한 번 테이블을 쿵 내리쳤다.
“시끄러운 꼬맹이들. 손님 말 못 들었냐? 양고기 한 접시 주문했잖아. 주문 안 받을 거면 가서 접시나 닦든가!”
꺄아, 저런 마귀 같은 엘프!
소녀들은 동시에 읏! 하면서 그를 노려봤지만 이즈는 고깝게 비웃으며 콧김으로 무시한다.
실제로 앞치마에서 마법봉을 꺼낸 릴리가 저걸 돼지로 변신시킬까 염소로 변신시킬까 고민하며 파르르 떨기까지 했음에도 그는 스스럼없이 제 할 말을 다 했다.
“미리 경고하는데 쓸데없는 짓 말고 그냥 굽기만 해. 불 피우고 생고기 올리고. 올리브유에 소금과 후추 약간. 그것도 어려워서 요리를 망쳐 놓으면 이 호텔 주방을 몽땅 부숴 놓을 줄 알아. 다리미질한 것처럼 밀어 준다고.”
그렇게 불만이면 다른 데 가서 먹을 것이지. 왜 애들한테 그러는 거야.
태리는 이즈를 못마땅하게 쳐다본 뒤, 불편한 분위기를 감지해 릴리와 마치를 그로부터 분리해 냈다. 소녀들은 턱을 떨며 분해하면서도 그녀가 배고플 것을 걱정해 군말 없이 물러갔다.
“뭔 일이야. 말해.”
단도를 꺼내 나무토막을 쓱쓱 깎으며 이즈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까부터 네 얼굴이 죽상인 이유. 기사 놈들이 너 찾으러 쏘다니는 거랑 관련 있지?”
“그런 거 없는데.”
“그럼 평소대로 떠들지 왜 안 해. 전엔 말 안 시켜도 앵무새처럼 잘 떠들었잖아. 내가 친분 관계가 얕아서 널 통해 인간 사회를 간접 경험 중이니까. 떠들라고.”
아니, 근데 이놈 자식이 말하는 것 좀 봐라. 상또라이만 아니면 어떻게든 한 대라도 때려 박는 건데.
태리는 자꾸 오므려지는 주먹을 연신 펴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무 일도 없거든.”
“그런데 왜 그렇게 힘이 없냐고. 말도 없고.”
그가 손에서 가지고 놀던 칼을 내리더니 대뜸 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나 뭐 달라진 거 없냐?”
“달라진 거?”
“내 머리 어때?”
“아아, 잘랐네.”
“그것뿐?”
“음, 잘 잘랐네.”
“해 줄 말이 진짜 그것뿐이라고?”
“잘 잘랐고 잘 어울리네.”
“…….”
“와, 최고로 예쁘고 단발의 여신 같다.”
“…….”
“이렇게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 아니 엘프는 처음 보는걸?”
“…….”
“무슨 칭찬을 원하는지 말해 주면 그쪽으로 최대한 맞춰 볼게.”
긴 생머리에서 숏컷으로 스타일을 바꿨는데 바로 알은척을 안 해 줬다고 지금 저렇게 날 죽일 듯이 쳐다보는 건가.
‘저 망할 놈이 내가 지 남자 친군 줄 아나.’
하지만 태리는 겉으로는 애써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맞췄다. 굴욕적이어도 어쩔 수 없었다. 저 보석 같은 눈이 지금 날 죽이겠다고 시위를 겨냥하고 있었으니까.
이즈는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노려보더니 갑자기 ‘짜증 나.’ 하고 신경질을 내면서 쥐고 있던 칼을 테이블 위에 팍 내던져 꽂았다.
꽂힌 단도의 손잡이가 충격에 팽그르르 진동을 했다.
어우 씨, 깜짝이야. 저걸 설마 내 목으로 던지려고 했던 걸까.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아부를 하라는 건지.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서 그녀가 마음먹고 한 소리를 뽑아내려던 순간이었다.
식당 바깥이 술렁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어수선해지기 시작한다. 뭔가가 밀려오는 것 같다고 직감한 순간 식당의 문이 펑 열리면서 무장한 기사들이 그 사이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 틈에는 투숙객들의 놀란 비명 소리도 섞여 있었고, 질서를 외치는 안시의 분노한 호통도 간간히 울려 퍼졌다.
그러나 태리의 오감을 옴짝달싹 못 하도록 묶어 버린 존재는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오직 하나.
기사들의 선봉에 서서 아주 빠르게, 적진으로 짓쳐들어오듯이 밀고 들어오는 남자가 그녀를 향해 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을 찾으러 어디까지 다녀온 것인지 머리에는 초록색 이파리가 붙어 있고, 다리는 진흙까지 더덕더덕 묻혀선 거친 숨으로 가슴을 들썩이며 가까워져 온다.
태리는 자동으로 그에 맞춰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 그녀를 힐끗 보더니 이즈가 박아 두었던 칼의 손잡이에 더 힘을 주어 밀어 넣으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저건 왜 가는 곳마다 튀어나와?”
* * *
“어디 갔었어.”
맞다, 그렇지. 화가 나면 반말을 하는 성격이었지.
“자꾸 이럴 거야? 이런 식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놔? 사라졌단 말에 놀라서 찾으러 다녔는데 아무도 못 봤다고 하지. 시간은 계속 가는데 호텔에는 아직도 안 왔다고 하지!”
아, 맞다. 나 혼내는 것도 되게 잘하는 사람이었지. 그것도 맞다.
“숲에 갔었어? 혼자 들어갔었어? 왜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을 안 해. 나한테 뭐 얘기해 주는 게 그렇게 싫어?!”
“그게…… 어딜 간 게 아니라.”
나도 내가 그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단 말이다. 진정 좀 해 봐. 태리가 물을 먹이려고 잔을 갖다 대 주자 클로드가 지금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가게 생겼냐며 밀어 냈다.
“설명해. 어디 있었는지 제대로 설명해야 될 거야.”
“오는 길에 그냥 누굴 좀 만났어.”
“누구.”
“어…… 내 팬? 그 친구가 마법을 되게 잘 쓰더라구……. 나한테 무슨 마법을 걸었는데. 아마 그래서 내가 안 보였었나 봐.”
속 시원히 다 설명을 못 하는 그녀도 미칠 노릇이었다. 이걸 대체 뭐라고 얘기하면 납득할까.
드래곤 님이 이제까지 코앞에서 우리가 뭐 하는지 다 보고 있었다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도와줄 테니까 뭐든 계속 해 보라고 하는데, 이야 신난다! 하고 말하면 되나?
스스로도 뭐 하나 이해되는 구석이 없는데 남에게 설명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한다고 해도 당장은 가능한 일도 아니라서 우선 그의 옷을 잡아다가 억지로 제 옆에 앉혔다.
“흥분 좀 가라앉히고. 할 수 있는 만큼은 설명해 볼 테니까. 우선 여기에도 식사 좀 가져다줄래? 릴리, 마치? 다른 기사분들 식탁에도 부탁해.”
뭐라도 일단 입에 물려서 얌전해지도록 만들어야겠다.
클로드가 못 이기고 자리에 앉자 완전 무장을 하고 서 있던 기사들도 그를 따라 남는 자리에 하나둘씩 착석했다.
그제야 살벌했던 분위기가 한결 잠잠해졌다.
“그러니까 우연히 어떤 마법사를 만났고, 그놈이랑 같이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 마법에 걸렸다.”
놈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클로드는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확하지는 않은데 대충 비슷해. 실력이 엄청난 친구였는데 날 도와주려고 만나려고 했나 봐.”
“그놈이 당신을 뭘 도와주는데.”
“공부하라고 책을 주더라고.”
진짜 진짜고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는 증거로 태리는 빌에게서 받은 책을 빼꼼히 꺼내 보였다. 겉표지에 아무런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그건 누가 봐도 마법서였다.
“…….”
눈썹 사이가 접힌 클로드는 여전히 성이 다 풀리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나마 납득 정도는 된 것 같았다.
“그럼 다음.”
“다음?”
“이건 뭔데.”
그가 이거라고 지칭한 것은 사물이 아니라 대상이었다.
맞은편에서 처키 인형처럼 칼로 나뭇조각을 까득까득 갈고 있는 예쁜 엘프.
이딴 놈이 왜 여기 있냐, 하는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눈빛을 받고 이즈는 픽 웃었다.
클로드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따박따박 잔소리를 하는 반면, 이즈는 앞뒤 구분 없이 바로 인신공격으로 들어가 버리는 편이다. 둘 다 본질은 같더라도 한쪽의 표현법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데에 큰 차이가 있었다.
“총독인지 뭔지 너 여기 사냐? 엄청 얼쩡거리네. 왜 이렇게 자주 나타나. 보기가 좀 뭣 같은데.”
바로 이렇게.
이런 식으로 하늘 끝에서 지구 내핵으로 바로 뚫고 가는 직행 화법. 중간도 없고 타협도 없었다.
그리고 싸움은 그 한마디에 화르륵 점화가 되었다.
“어딜 감히 단장한테!”
“버릇이 없는 놈이로군.”
“일어나라, 상대해 주지.”
주변으로 퍼져 앉아 있던 수십의 기사들이 동시에 일어나 일제히 발검을 함으로써 식당은 한순간에 전쟁터가 되었다.
수십 명의 최정예 기사와 자신을 향한 수십 개의 검. 그리고 맹수처럼 눈을 야만스럽게 빛내고 있는 클로드.
오금이 저릴 만도 한데 이즈는 그걸 보고도 즐겁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뭐, 날 상대해? 아하하, 진짜 미치겠네. 진심이지, 얘들아? 안 그래도 이 자식한텐 미용값을 받으러 가려고 했는데 뭐, 여기서 돈 대신 피로 치러도 좋아. 강한 녀석의 피는 거둬 가는 가치가 있지.”
“글쎄, 앞으로는 미용 따위 할 일도 없을 텐데. 머리카락이 잘렸으면 목이 잘리는 순간도 각오했겠지.”
일대일로 팽팽하게 대치하는 순간이 오면서 식당에는 때 아닌 빙하기가 몰아닥쳤다.
달달 떨던 손님들이 먹던 식사도 내팽개치고 도망가 버리자 남은 것은 살얼음판 같은 정적과 고요.
구경거리를 놓치기 싫었는지 설거지를 하고 있던 릴리와 마치가 포르르 주방에서 빠져나와 홀을 지켜보며 옹알옹알 의견을 주고받았다.
“릴리, 넌 누구를 응원할 거야? 난 그래도 궁수보단 기사가 더 좋아. 싸울 땐 당연히 활보단 칼이 더 세지 않겠어?”
“뭐어? 마치, 너 배신자구나! 썩은 치즈와 상한 치즈 중에 골라야 한다면 그건 당연히 상한 치즈랬어! 욕쟁이가 그나마 더 낫다고.”
“무슨 소리야. 저 마귀 엘프는 우리 공주님한테 함부로 대한단 말이야! 게다가 기사는 공주님을 좋아해. 내 눈은 틀림없어.”
“그렇다면 더 용납할 수 없는걸? 감히 기사 주제에 우리 공주님을 좋아한단 말이야?”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주방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대일 매치에 다들 하던 일을 관두고 국자를 든 채, 혹은 뒤집개를 든 채 한마디씩 거들고 있었다.
“어느 쪽을 밀어야 되는 거야? 가망성이 있는 건 저 허연 놈이 아니었어?”
“그랬던 것 같은데. 단발이 찰랑찰랑한 게 오늘은 왠지 저쪽을 응원해 주고 싶기고 하고요. 아련하잖아요.”
이쪽이니 저쪽이니 줄을 서느라 난리가 났고 드문드문 재미로 돈내기를 하는 사람까지도 생겨났다.
그런 꼴을 도저히 못 봐 주겠는지 식전 빵과 쿠키를 덜던 안시가 집게를 탕 내려치며 소리쳤다.
“다들 조용히 안 해요? 응원하길 누굴 응원해요. 둘 다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