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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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리는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죠.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워낙에 신경 쓰이는 사람이니까.”

“아, 역시!”

기사의 얼굴이 곧장 해가 뜬 것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더니 곧 묻지도 않은 것들 바쁘게 재잘대기 시작했다.

“전 단장과 올해로 3년을 함께했는데 원래는 근위대 출신입니다! 단장을 따라서 신성 기사단으로 들어왔죠. 제가 드라크라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을 때 단장이 혈혈단신으로 절 구하러 오셨던 일화는 굉장히 유명한데 혹시 들어 보셨나요?”

“어…… 아니요, 미안해요. 들어 본 적이 없네요.”

“혼자서 적진 끝부터 성문까지 뚫고 들어오셨는데 전신(戰神) 그 자체였었죠. 정말 소름 돋게 멋있으셨는데 말입니다.”

“음, 네.”

“혹시 이것도 아시나요? 저희 단장은 점령지에 들어가도 민간인을 일절 건드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상부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더라도 그러지 않으셨죠.”

“아아, 네에.”

그래그래, 알겠어. 그런데 너 왜 지금 나한테 그런 사적인 일화들을 줄줄이 자랑하는 거니?

태리는 추임새 같은 짤막한 대꾸를 해 주면서도 어리둥절한 티를 팍팍 냈다. 좀 느끼라고. 그런데도 기사는 시종일관 밝은 목소리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겉만 무뚝뚝한 거지 속정이 깊은 분이십니다. 경험이 없어서 모든 게 서투르실 뿐이에요. 하지만 뭐든 금방 배우는 분이니 금세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시간을 주고 조금만 기회를 주세요!”

으, 응?

“잘생기고 몸도 좋아요! 당연히 능력도 있죠! 숙맥인 게 마음에 걸리시겠지만 그 부분은 차차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눈 깜짝할 새에 그렇게 될걸요? 처음엔 다들 그렇죠. 미숙하고 서투르고. 하하하!”

아, 알겠다.

주접이네. 이건 주접이다.

하지만 기사의 주접은 울적했던 태리를 웃게 만들었다.

클로드가 주변 이들에게 무척이나 사랑받는 것 같은 느낌이라,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이 여실히 느껴져서 실금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짧게밖에 보지 못했지만 공관의 기사들은 대부분 클로드를 닮아 친절하고 선했다.

적국의 공주인 제게 건방지거나 무례하게 굴지 않았으며 날을 세우거나 경계하는 태도도 없었다. 격식을 갖출 줄 알았고 배려를 해 주었다.

‘다행이야.’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든다.

엔딩으로 가는 길이 당겨지면 헤어짐의 순간도 그만큼 빨리 오겠지만 이런 걸 보면 마음이 든든해졌다.

클로드의 인간 됨됨이가 이러하니 빠른 결말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그는 혼자 남아 이후로도 계속 잘해 나갈 것이다.

역시 그와 계약하길 잘했지. 태리가 훨씬 편안해진 미소를 기울이며 기사의 자랑에 맞장구를 쳤다.

“총독은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더 잘할 거고요.”

“아, 역시!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공주님은 정말로 아름답고 너그러운 분이세요!”

사람을 바로 코앞에 두고선 그런 소리라니.

태리가 쑥스러워하며 걸음을 빨리하는데도 기사는 주접을 멈추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나오는 걸 기다렸나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태리는 나가는 도중에 많은 기사들과 일꾼들을 빈번하게도 마주쳤다.

어디에서 틈틈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녀에게 다가와 일일이 눈인사를 했고, 개중에는 종종 인사와 함께 가벼운 말을 섞는 이도 있었다.

예를 들면 또 오십시오, 라거나.

다음번에는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라거나.

저희가 어떻게든 책임지고 그 인간을 바꿔 보도록 중얼중얼, 이라거나.

아무튼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어떻게든 클로드에 대한 좋은 인상을 제게 전달하려고 애쓴다는 것만은 분명해서 태리는 티 없이 맑은 웃음으로 보답해 줄 수 있었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 수 있어요.”

각 잡고 경호원처럼 수행해 주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녀는 대문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기사가 손발을 마구 흔들며 야단스럽게 반대했다.

“예에? 안 됩니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호텔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했습니다.”

“데려다줬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난 괜찮으니까.”

“안 됩니다! 그런 짓을 했다간 단장이 절 죽일 겁니다.”

“그 사람이 그러는 건 말로만 그럴 뿐이라면서요.”

“아니요, 행동으로도 그러는 분이신데요.”

일단 좋은 사람은 맞긴 한데 그런 데선 또 자비가 없다면서 기사가 뒤를 돌아 대문을 닫으며 투덜거렸다.

“자기가 찜한 걸 건드린다거나, 소홀히 대하는 걸 보면 상대에게 죽음을 간접 체험 하게 하는 습관이…… 공주님?”

문을 닫고 고리를 거는 단 몇 초였을 뿐인데.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만을 공주에게서 눈을 뗐을 뿐인데.

“공주님! 어디 계십니까, 공주님!”

주접의 기사가 다시 뒤를 돌아섰을 때 그곳에 풀꽃처럼 미소를 짓던 공주는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말 그대로 눈앞에서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다.

헐레벌떡 길의 중앙으로 나가 좌우를 살펴봤지만 길은 숨을 곳도 없는 탁 트인 대로.

뭐지? 마법이라도 부리신 건가?

“공주님! 착한 공주님! 천사 같은 공주님! 우리 단장을 책임져 주실 공주님, 어디 계십니까!”

공주님, 공주님, 공주님…….

빈 골목에 그녀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 * *

이로써 두 번째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검은숲으로 떨어졌을 때 느꼈던 뭔가에 흡착되는 듯한, 블랙홀로 전신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그 느낌을 다시 겪게 되는 게.

문을 닫는 기사의 등이 점점 작아지고 멀어지더니 소용돌이치듯 주변의 풍경이 뒤바뀌어 간다. 순식간에.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번에도 태리는 역시 휘말릴 뿐.

그러나 처음 어두운 숲속에 떨어졌던 것과는 반대로 그녀가 이번에 의식을 차린 곳은 햇살이 잘 드는 가지런한 돌계단 위였다.

“뭐야, 여긴?”

무릎 살을 꼬집고 가볍게 뺨을 때려 봤지만 눈앞에 들어오는 상황은 변함이 없다.

치렁치렁한 원피스의 밑단을 잡고 일어선 순간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재잘대며 옆을 스쳐서 지나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여자를 보고도 놀랍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아예 보이질 않는 건지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돌계단 위에 자리한 건물로 들어가고 또 나오고 있었다.

홀린 듯 따라 올라섰던 태리는 겨우 몇 계단을 올랐다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저건 도서관이잖아.’

언덕처럼 솟은 계단 위에 도서관이 있었다.

마법사의 탑처럼 제법 높이 늘어서선 아래를 굽어보듯이 위로 쭉 뻗어선 건물이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더 탑처럼 느껴졌다.

태리는 그 자리에서 더 움직이지 못하고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자박자박. 자박자박.

차분한 발걸음이 귓가를 울린다.

신발 굽을 규칙적으로 울리며 홀로 흐름을 역행하듯이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귀한 댁의 도련님 같은 복장으로. 모직 반바지에 스타킹을 신고, 깔끔한 셔츠 위에 니트 조끼를 입은 채 옆구리에 책 한 권을 끼고 단정한 걸음걸이로 내려온다.

소년이 앞으로 가까워져 올수록 태리는 뒤로 걸음을 물렸다.

그러나 그녀가 한 발을 물릴 때 소년은 두 발을 좁혀 왔다. 아예 도망치려 등을 돌렸을 때에는 이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상태였다.

“왜 내 편지에 답장 안 했어? 누구냐고 물었는데.”

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태리는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 나 이 애가 누군지 알아.

“내가 이름을 안 써 보내서 그랬나? 난 빌이야. 부를 게 없으면 그렇게 불러도 돼. 어차피 네 아빠가 붙여 준 이름이니까.”

너는…… 폐성의 드래곤이잖아.

게임의 최종 보스이자 태리로 하여금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겪도록 해 그녀를 이 세계로 끌어당긴 존재.

소악마처럼 예쁘장하고 서늘했던 소년의 얼굴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떻게 드래곤이 여기에 있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닐 텐데. 이건 말도 안 되는 건데.

설마. 목소리가 토막 난 시체처럼 썰려 나왔다.

“아까부터, 날…… 지켜보던 게.”

“아까? 아아, 결혼식에서 말하는 거야? 맞아, 나야. 그걸 느꼈어? 감이 좋네. 맞아. 그때부터 널 보고 있었어. 지켜본 건 그보다 더 오래됐지만 직접 만나기로 마음먹기까진 나도 시간이 필요했거든.”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이 비수처럼 다가오는데도 태리는 피하지 못했다.

소년은 작은 발의 뒤꿈치를 들어 그녀의 턱 끝을 잡고 이리저리 얼굴을 돌리며 뜯어보았다. 단순히 외양을 보는 게 아니라 안까지 낱낱이 들여다보는 듯한 섬뜩한 느낌으로.

뱀처럼 길쭉한 동공이 피부를 훑을 때마다 두려움이 등골을 내달렸다.

“그렇네. 진짜야. 진짜 소네티가 맞잖아. 아, 어떻게 내가 널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지? 아무리 기억이 불안정해도 널 잊었을 리가 없는데…….”

아이는 기이하다는 말투로 중얼거리면서도 눈가에 그리움과 비슷한 감정을 언뜻 내비쳤다. 닿아 있는 손끝도 처음보단 미지근해져 조금이나마 온기가 어렸다.

“결혼식에서 같이 있었던 그 기사 말이야. 사이가 가까워 보이던데 친하게 지내고 있어? 아니면 친한 척 위장?”

클로드를 말하는 건가. 벌써부터 드래곤이 그에게 관심을 가져선 안 된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끊어 내야 하는데 입 안이 가뭄 난 땅처럼 갈라져서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게…….”

“괜찮아. 어느 쪽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난 무조건 네 편일 테니까. 난 너의 편이고 이자리스의 편이야. 세상이 이대로 멸망한다고 해도 말이야. 그 전에 누군가 막아 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난 끝까지 널 도울 거야. 네가 이기도록 해 줄 거고. 네가 정말 소네티가 맞는다면.

말끝에 그런 말이 생략된 것 같은 기분은 단순한 착각일까.

자신을 빌이라고 밝힌 소년은 태리만큼이나 앞으로 벌어질 일을 훤히 다 아는 것처럼 말했다.

“결국 왕묘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모양이지? 거기엔 언데드가 아주 많아. 죽은 마법사들의 크립트(crypt)가 쌓여 있거든.”

“크립트……?”

“시체 구덩이 말이야.”

“……!”

본래 이 세계에서 정상적인 장례 절차란 건 관에 사람을 넣고, 땅이나 건물의 밑 벽돌을 파 보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역병이나 재난이 돌아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으면 관과 묘지가 부족한 경우가 생겼는데,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공터를 깊게 파 시신을 한꺼번에 쏟아붓고 흙으로 매장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곳에선 그런 식으로 쌓아 올린 봉분을 크립트라고 불렀다.

“재앙 때 죽은 사람들을 거기에 묻어 버린 거야?”

“그래.”

“……누가?”

“내가. 너무 가여워서.”

슬픔을 담담하게 읊조리듯 말하더니, 소년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그녀에게로 건넸다. 손으로 제본을 한 것 같은 두꺼운 양장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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