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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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전에 말도 없이 갑자기 이런 식의 전개는 당황스럽겠지. 

당혹스러움이 얹히다 못해 거기에 덮여 버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태리는 어쩔 수 없이 파렴치한 말을 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그게…… 내가 미래로 가서 대략 백만 가지의 경우의 수를 따져 봤는데요. 진짜 이거밖에 없었어요.”

믿기 힘들겠지만 진짜야, 진짜라구. 이 길이 제일 빠른 길이야.

“나한테 의논도 없이?”

으, 으응. 그래, 그랬지. 내가 너한테 말도 안 하고 냅다 물부터 엎질렀지.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똑같이 어쩔 수 없었다, 라는 파렴치한 말을 되풀이해야만 했다. 그것조차도 일부러 그랬으니까.

보통 주인공에게 어떤 극적인 일이 벌어질 때는 대부분 이렇게 진행되는 거 아니었던가.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오토바이 엔진을 부르릉 켜고 나타나선 “네가 △△△이지? 시간이 없어, 서둘러야 해. 빨리 타!” 하면서 정신없이 어디로 막 데려가던데.

‘아니, 그렇게 하면 다 통하던데…….’

태리는 눈치를 살금살금 살피며 무릎 위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으, 미안해라.

그렇지만 이렇게 안 하면 방법이 없었을 거다. 미주알고주알 알려 줘 봤자였다. 엄마처럼 구는 클로드의 성격상 그런 위험한 짓을 꾸미자고 하면 눈을 막 요렇게 못마땅하게 뜨면서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할 게 뻔하지 않나.

좀 겪어 봐서 아는데. 분명히 그는 그러고도 남았다.

‘널 이용하는 날 미워해도 좋아. 하지만 이건 사실 다 널 위한 거라고!’

내가 널 너무 사랑해서 헤어지는 거야, 라는 못된 말을 하고 여자를 차 버리는 나쁜 남자처럼 태리는 굳센 마음을 먹고 말했다.

“우리의 계약 조건을 기억해요.”

내가 처음에 뭐라고 했었는지를.

쥐구멍으로 들어가서 드래곤의 머리를 깨자고 했었지. 그때 언급했었던 쥐구멍이 바로 여기라는 걸 유념하라고.

계약.

그 말에 클로드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낯빛이 확 흐려졌다. 그래서 하마터면 때와 장소를 잊고 태리는 그의 뺨에 손을 올릴 뻔했다.

갑자기 덜컥 걱정이 되어서.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그래……?

클로드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한 차례 억누른 것처럼 단단해진 눈빛을 드러내더니 물러서지 않고 얘기했다.

“그래도 거긴 안 돼.”

“왜 자꾸 안 된다고만.”

“묘지를 통하면 가깝다는 걸 이제까지 몰라서 안 갔을 것 같아? 그 안에 언데드가 가득 차 있다고. 당신은 겁도 없어?!”

“나도 알아.”

“……!”

“거기 뭐가 있는진 나도 안다고.”

내가 더 잘 알지. 내가 거기서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그녀는 냉정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다그치는 클로드를 밀어 낸 뒤, 차분히 백작에게로 몸을 되돌렸다.

“다시 말해요. 난 왕묘로 가는 길을 뚫을 거고 그걸 위해 토벌대를 모집할 계획이에요. 언데드의 밭이거든요, 거긴. 수가 많아서 소수로는 힘들어요.”

“흐음.”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포고문을 내려고 해요. 그러니 황제께 보고해야 할 말이 있다면 이걸로 해 줬으면 좋겠네요.”

다부지게 들릴 수 있도록 말의 속도와 어조까지 섬세하게 조절했다.

백작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이벤트에 당연히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훌륭한 계획이라고 사료됩니다. 이런 힘든 시기에 다수가 협동해 가며 위기에 맞서 싸운다면 좋은 그림이 나오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그가 안경 너머로 야비한 눈을 가늘게 떴다.

“발로란의 기사들이야 당연히 정의의 부름에 응하리라 의심치 않습니다만 이자리스의 마법사들이 참여해 주겠습니까. 도저히 화합이란 게 불가능해 보이던데요.”

앙숙이나 다름없는 사이에 더불어 도모? 가당키나 하냐는 거였다.

그 정도로 마법사들의 원한과 불만의 골은 깊은 상태였다. 비단 제국의 기사들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자신에 땅에 들어와 있는 모든 외지인에 대한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구시가지의 폐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는 것으로 압니다만. 그들에게 왕가의 묘지를 부수려 하니 기사들과 힘을 합쳐라, 전장에 나와 싸우라, 그런 이야길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내 일이에요. 백작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죠.”

“보통내기가 아닌 분이시군요, 공주님.”

“당장 이 순간에 처리해야 할 적이 누군지 헷갈리지 않는 것뿐이에요.”

사냥꾼이 총구를 들이밀며 포위를 좁혀 오는 숲에서는 제아무리 독립적인 여우라고 해도 결정을 내려야 한다.

앙숙인 늑대의 손을 잡고 우선 사냥꾼을 영역에서 쫓아낼 건지 아니면 자살 폭탄을 터트리고 다 같이 그 자리에서 궤멸할 건지.

그걸 명확하게 결정해야 하는 법이다.

“때가 달라지면 그 상대가 변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대담함에 백작은 감탄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과연 일국의 왕녀다웠다. 그녀는 상대를 제압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소네티들이 이런 느낌이었던가?’

이상하군. 아닌 것 같은데.

이자리스인들은, 그러니까 마법사들은 같은 사람이면서도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던 대상이다. 마력을 타고난다는 태생적인 차이도 그랬지만 성격도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 강력한 힘을 가지고도 ‘보통의 나라들’처럼 정복 활동을 일절 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만하지 않은가. 그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콧대가 높은 것이지 호전적이진 않았다.

그러니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좁은 왕국에서 마나를 연구하고 세상이나 탐구하며 조용히 살 수 있었던 것.

‘전대 왕도 지략가라기보단 순수한 탐구자에 더 가까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눈앞의 공주는 그런 떼 묻은 고정 관념을 걷어차기라도 하듯 전혀 다른 언동을 보이고 있었다.

아예 다른 나라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좋습니다. 그렇게 알고 가겠습니다. 성공한다면 폐하께서도 한층 더 협조적으로 나오시겠죠. 그건 공주님께, 나아가 이자리스의 모든 이들에게도 다 좋은 일일 겁니다.”

그러면서 백작은 아까부터 입을 꾹 닫고 말을 하지 않고 있는 클로드에게 넌지시 눈길을 던졌다.

동의하냐는 뜻이었다.

‘저 자식이.’

클로드는 무릎 위의 손등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자신이 이 계획을 반대한다는 걸 알고 저러는 것이다.

하기야 그런 실랑이를 보여 줬는데 대화를 듣진 못했어도 상황만으로 낌새를 눈치 못 채면 그거야말로 바보겠지만.

하지만 그가 열받는 건 다른 것 때문이었다. 백작은 지금 그의 앞에서 공주를 인질처럼 삼고 있었다. 그게 열받아서 어금니가 으득으득 씹힌다.

네가 동의를 해야만 그녀가 무언가를 더 얻어 갈 것이며, 그녀의 조국이 지금보다 더 괜찮은 이득을 볼 것임을 저 재수 없는 눈웃음으로 협박하는 것이다.

‘확 죽여 버릴까.’

다리를 하나 분질러 놓고 마차에 태워 보내면 가는 동안 무리 없이 잘 죽지 않을까. 후에 남는 시체 처리야 내 알 바 아니고.

지글지글 끓는 눈이 찻잔 옆의 티스푼에게로 고정됐다. 저걸로 머리통을 깨서 부숴 놓으면 뇌진탕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으니. 가여운 티스푼이 그의 힘을 버텨 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왕묘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클로드는 애꿎은 입술을 떼었다 붙이며 달싹거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건 죽어도 동의해 주기가 싫어서다.

싫었다. 그는 정말로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고집을 피울 수도 없다.

왜?

아니까. 다 알고 다 봤으니까.

이 땅을 위해 그녀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안심하지 못하고, 안도하지 못하고, 위험을 무릅써 가며 매일같이 어떻게 달려왔는지를.

싫은데. 진짜 싫은데. 죽어도 싫은데.

내가 싫어하는 게 그것들보다 더 의미가 있을까? 나의 내키지 않음이 그녀의 근심과 시름보다 더 가치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들로 가슴이 꽉 차 있어서 괴로웠다.

힘을 준 주먹 위로 살며시 가벼운 온기가 얹어져 클로드는 말없이 고개를 내렸다.

뺨을 어루만지는 건 망설였지만 손등을 덮어 주는 건 망설이지 않겠다는 듯이 그를 걱정하는 듯한 공주의 손가락이 그의 손등 위를 조심스레 덮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작은 입술에서 들리지 않는 소리가 눈으로 읽혀 들어왔다.

미안해.

너를 이렇게 대해서 미안해. 너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강하고 가장 착한 사람이야.

‘……미치겠네.’

자신보다 몇 배는 더 작은 손바닥 안에서 클로드의 주먹은 더 팽창하고 더 단단하게 변했다.

누가 와서 미친놈아 이건 네 환청이니까 정신 차리라고 말해 줬으면. 돌아도 아주 단단히 돌아 버려서 이러는 거니까 뺨이라도 한 대 쳐 줬으면.

“……해. 한다고. 하면 되잖아. 거길 다 쓸어버리면 만족하냐?”

맹세컨대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쳐다봤을 뿐.

그런데도 견딜 수 없는 거라면 분명했다. 이건 자신의 문제였다. 자신에게 어떤 큰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 * *

어두워진 복도에 덩그러니 남겨져서 태리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클로드의 동의가 떨어지자, 백작은 보고드리겠다는 흡족한 말과 함께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클로드가 얼굴색이 변한 것은 그 지점이었다. 그가 갑자기 자신의 팔을 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우더니 대뜸 방 밖으로 등을 밀어 내보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공주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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