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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정말 어이가 없네.
내가 내 땅에서 무슨 짓을 해도 그건 내 자유가 아닐까. 아무리 대륙을 통일한 견줄 데 없는 강국이라지만 세상 전체를 자기 똥꼬에 집어넣으려 하는 것 같아서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후, 안 돼, 태리야. 진정하자. 감정 이입해선 안 된다.’
가슴이 뜨거워질수록 머리는 차가워지는 게 좋다. 덜어 낼 건 덜어 내고 챙길 건 챙겨 가는 게 이 만남의 목적.
태리는 스스로를 강하게 다독거린 뒤 다시 매끄러운 음성을 냈다.
“난 내가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부재하신 동안 저희가 이 땅에 투자를 한 게 있는데 그걸 몽땅 돌려 달라며 재산 환수를 요구하시는 건 욕심입니다. 애석하게도 저희는 자원봉사를 하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잖아요? 적어도 아직까지는요.”
“그럼 정확히 무엇을 원하시죠?”
원하는 거라. 머릿속이 컴퓨터 CPU처럼 왱 소리를 내며 돌아가면서 ‘나한테 당장 필요한 ○○○’이라는 리스트 제목 아래로 숫자가 주르륵 내려섰다.
지금 당장, 가장 먼저, 내 몫으로 챙겨 놔야 할 1번이라면…… 당연히 이것뿐이었다.
“총독이요.”
“……예?”
“저 사람이요.”
태리는 생글거리는 얼굴로 클로드를 단번에 지목했다. 아주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저 사람을 원해요. 그러니까 쓸데없이 괜한 트집 잡아서 괴롭히려고 하지 말고 그냥 여기에 놔둬요. 알겠어요?”
놔두기만 하면 내가 잘 키울 수 있다니까. 진짜 장난 아니게 멋있게 성장시켜서 눈부신 영웅으로 만들 수 있다고.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라. 응?
태리는 자신감이 뿜뿜한 태도로 곧은 허리를 더 곧게 펴고 반듯한 어깨는 더 예쁘게 펼친 뒤 ‘내 주인공한테 손대지 마’ 하고 부드러운 압력을 넣었다.
“풋췽!”
그리고 정확히 3초 후, 클로드의 입에서 잘 우린 홍차 물이 뿜어져 나왔다.
“콜록! 콜록콜록!”
키 큰 남자가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며 열심히 귀동냥하는 것도 아까부터 되게 웃겼는데, 급기야 차 하나도 제대로 못 마셔서 사레에 걸리면 그게 얼마나 귀여운 광경인지는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말해서 놀랐나 봐. 근데 소리가 어쩜 그래. 풋췽이 뭐야, 풋췽이.’
기침하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그의 등을 태리는 얼른 달려가서 토닥토닥 두드려 줬다. 마치 우유 먹고 수염에 흰 물이 잔뜩 묻어 버린 고양이의 턱을 닦아 주듯이.
그러면서도 공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으며 ‘내가 첫 번째로 원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 갔다.
“돌아가서 황제께 총독을 바꾸는 게 좋겠다고, 그렇게 말할 작정이었죠?”
둘이 대체 무슨 관계성인지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백작은 속내를 불쑥 찌른 그 말에는 태연하기가 쉽지 않았는지 전에 없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걸 어떻게 아신…… 아아니, 제가 주청 드린다고 폐하께서 들으실 분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렇게 말할 생각은 맞았잖아요. 이 사람을 미워하니까.”
“뭐, 날 미워해?”
네가 뭔데 날 미워해?
아직도 약간은 덜 정돈된, 거칠어진 숨을 쉬면서도 클로드는 자신을 미워한다는 백작의 속내에 그 즉시 발톱을 세우며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백작은 점점 더 크게 당황했다.
“그런, 게 아니라 저의 소견으로는 그…… 좀 더 냉정하고, 뭐랄까 이성적이신 분이 이자리스의 총독으로 더 적격일 것 같아서…….”
다급히 변명을 둘러놓으며 하는 얘기는 이랬다.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는 오합지졸의 기사단이 아닌 제국 최정예군 중의 하나이며, 그 선봉으로 있는 클로드의 무력이야 말할 것도 없다고.
그러니 마수 정복쯤이야 일찍이 정리하고도 모자람이 없어야 할 텐데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니 그가 이 일에 적합한 인재가 아닌 것 같다는 뜻이었다.
주절주절하는 소리를 유심히 잘 듣고 있다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태리는 심드렁한 한마디로 모든 걸 다 튕겨 냈다. 절대 내 주인공이 궁지에 몰리는 걸 두고 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아닌데. 일 잘하던데. 내가 다 봤는데.”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일어서려 했던 클로드는 그녀의 그 한마디에 우쭐해져선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이어서 그를 두둔하는 열렬한 변론이 술술술 흘러나왔다.
“기사단이 물론 뛰어나긴 하죠. 하지만 소속된 기사들 모두가 마수 소탕에만 열중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었잖아요. 행정 같은 실무 업무를 위해 분산했을 거고. 그런 와중에 명성에 미쳐서 몰려드는 용사들과 모험가들의 안전까지도 책임져야 했죠. 틀린가요?”
“그거야…….”
“잡업무 처리를 위해 수도에서 따로 제공한 편리가 있나요?”
“아니 저희는…….”
“그렇다면 시간이 걸리는 게 이쪽의 책임만이라고 우길 수 있나요?”
못 하지? 못 하잖아!
열성을 다한 혓바닥으로 유창한 열변을 끝냈을 즈음 백작의 어깨는 누가 망치로 내려친 것처럼 잔뜩 낮아져 있었다.
반대로 클로드의 어깨는 지상에서 한 2미터쯤은 치솟아 있었고.
기왕 올라간 내 주인공의 자신감, 두피 끝까지 치고 모근에까지 힘을 주라고 그녀는 열변의 정점을 찍었다.
“총독은 정말로 잘하고 있어요. 누구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요.”
그리고 그녀의 칭찬은 클로드를 불타오르게 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백작의 머리통을 마구 쥐어 때리고 싶었던 클로드는 놀랍게도 그런 못된 충동이 자신의 내면에서 말끔히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천사가 돼 버린 건가.
개소리란 걸 알지만 진짜 그런 기분까지 들었으니 뭘 더 설명해야 할까.
등 뒤에 날개가 달린 듯 훨훨 날며 그는 본인이 뱉어서 비어 버린 찻잔에 새 물을 콸콸콸 신나게 따라 부었다. 수압을 이기지 못한 찻잔이 다르르 떠는 소음이 음악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기에 자신감은 태리의 바람대로 진작 하늘을 뚫은 상태였다.
“어이, 백작. 들었나? 나 잘한다잖아. 가서 이런 얘길 전하란 말이다.”
“그, 그, 그럼 결과를 내십시오! 성과를 내시란 말입니다. 말뿐인 주장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구석에 몰려서 백작은 그렇게 항변했다. 결과물을 내보이라고. 지금껏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뭘 믿고 그를 계속 이 자리에 놔두냐면서.
‘역시 전개대로네.’
클로드는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와서 칼 들고 싸우라고 본래의 성격으로 금세 되돌아갔지만 태리는 뒤에서 조용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 모든 것은 내 계획대로다.
그녀는 조심스레 백작과 말다툼을 하느라 바쁜 클로드의 옆모습을 살폈다.
괜찮겠지. 저질러 버려도 되겠지. 그래, 어차피 일어날 일인데. 언젠가는 다 일어나게 될 일이다. 그녀는 아주 약간, 아주아주 조금, 그 시기를 당기는 것뿐.
“결과물, 곧 보여 줄 거예요.”
한 발 앞으로 나서는 듯한 태도로 그녀가 소란을 꿰뚫고 들어왔다.
“우리도 계획이 다 있어요. 폐성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요. 저주의 근원을 부수기 위해.”
“……!”
“그러기 위해서 이미 숱한 밑 작업들을 해 둔 상태고요.”
“……공주님?”
놀라움이 번진 표정과 아연실색한 부름. 태리는 일부러 두 쪽을 다 안 봤다. 클로드는 눈알이 커져서 두 손으로 받아 줘야 될 것 같은 안쓰러운 얼굴이었지만 그것도 애써 무시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숲의 저주는 폐성 안의 무언가와 연관이 있어요. 그래서 일단 성에 들어가 봐야 하는데 가는 길은 현재로선 두 가지예요.”
테이블 위의 꽃병, 찻잔, 주전자를 기물로 삼아 끌어와 지도 대용으로 만들어 설명했다.
“정공법은 모두가 다 아는 성의 정문. 하지만 몬스터가 가장 많이 몰린 곳이기 때문에 위험도가 높아요. 그리고 두 번째가 왕묘죠.”
공식 지명은 왕가의 정원이지만 역대 이자리스 왕족들과 저명한 마법사들이 묻힌 공동묘지이기 때문에 왕묘가 더 옳은 표현이다.
그 묘지에 있는 지하 수로가 성의 해자와 연결되어 있었다.
“어느 쪽이 유효할지는 직접 몸으로 시험해 봐야 해요. 그래서 우선 만만한 것부터 시도해 보기로 했어요. 우린 묘지를 돌파할 거예요.”
“왕묘……라면?”
“무덤이죠.”
그녀가 마녀처럼 씨익 웃었다.
“성공한다면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거예요. 분명 훌륭한 투자였다고 여길 만한.”
물론 최종 보스 몬스터까지 가는 시간과 거리를 엄청나게 단축하는 지름길(short-cut)인 만큼 당연히 그만한 희생을 각오해야 하긴 했다.
왕묘의 숏컷을 여는 조건은 묘지의 모든 언데드의 몰살.
즉, 싹쓸이였다.
그냥 시체도 아닌 살아생전에 최소 상위 클래스 이상의 경지에까지 도달했었던 마도사들과 국왕들의 언데드를 상대로 전멸 싸움인 것이다.
‘정신 나간 게임 같으니라고.’
그 미친 게임. 도저히 깨라고 만든 코스가 아니었다. 지름길을 이용하는 데에 대한 페널티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적어도 사람이 깰 수는 있게 만들어야지.
‘내가 거기서 몇 번을 죽었더라. 10번? 20번?’
태리는 자신의 경험을 들춰 보았다. 그녀 역시 몇 번을 죽어 가며 겨우겨우 넘어섰던 지독한 구간이었다.
통과했을 당시 남아 있던 생명력(HP)은 겨우 3. 기적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같은 수법에 또 당할 줄 알고. 그때는 혼자였지만 이번엔 혼자 가지 않을 것이다.
왕묘에서의 싸움이 힘들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머릿수’에 있었으니까. 인간적으로 언데드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러니 똑같이 머릿수로 되갚아 주면 된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엔 공식적으로 왕묘 토벌대를 모집해 볼까 고려 중이에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끌어모으는 거죠. 인원수가 든든해야 겨뤄 볼 만한―”
준비되어 있는 가면을 다시 쓰고 열렬히 주장하는데 클로드가 팔을 거칠게 낚아채며 말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빠르고 다급하게, 하지만 은밀하면서도 조용히 억눌린 소리로 따지는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