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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올라서 핏줄이 도드라진 남자의 손등을 콱 꼬집어 버렸다. 그것도 무지무지 아프게.
클로드는 꼬집히자마자 홀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아!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태리의 접시에 버섯을 와르르 부어 버리는 것으로 보복했다.
“아…….”
“아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기사들은 입을 모아, 눈을 모아 참담한 총평을 내렸다.
‘아……. 연애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유니콘은 저래서 안 된다. 사람이 너무 순수하고 청렴해도 저럴 땐 문제가 됐다.
모두가 입을 아……로 대동단결하며 숙연해진 고개를 숙인 순간 식당의 커다란 괘종시계가 2시 5분 전을 알리는 커다란 태엽을 감았다.
동시에 극적인 등장을 한 제드가 바닥을 구르듯이 달려와 좋지 않은 소식을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대장, 도착했습니다. 5분 전입니다!”
현재 시각 2시 5분 전.
올 놈은 하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클로드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단호한 얼굴로 현실을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 정각이 되면 문을 닫아. 꽁꽁 걸어 잠가.”
“지금 이 앞까지 왔다니까요. 왔는데 어떻게 닫아요!”
이번에는 목소리가 제법 컸던 덕분에 동그랗게 뜨인 태리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차렸겠지.
“이 도움도 안 되는 자식이…….”
클로드가 참지 못하고 욕을 뱉자, 제드는 재빠르게 자기 살길을 찾아 태리의 뒤로 숨었다.
“아니, 야, 약속은 지키셔야죠. 공주님도 그렇게 알고 계시는데요.”
젠장, 알아. 나도 안다고. 내가 그런 것도 모르는 돌대가리인 줄 알아? 난 그냥…….
“백작이 왔대요?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네요. 우리도 얼른 일어나요. 나 다 먹었어요. 배도 든든해져서 잘 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냥…….
“그냥 여기에…….”
있어 주면. 그 말을 하려다가 차마 끝맺지 못했다.
그녀가 있어 주면 어떻게 할 건데? 붙잡고 있을 명분 따위가 있나?
없었다.
‘그 새낄 꼭 만나게 해야 하나. 못 만나게 하면 안 되나.’
보나 마나 헛소리나 찍찍 해 대면서 비위나 거슬리게 할 게 뻔한데.
거짓말처럼 갑자기 두뇌가 비상해지고 세기의 지략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똥찬 대안이라도 내 보게.
하지만 현실은 암전일 따름이다. 그녀를 붙들고 있을 단 하나의 명분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2시 말고 1시에 오라고 할걸. 아니, 그냥 처음부터 약속 같은 거 해 주지 말걸.
클로드는 억지로, 정말 싫어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겨우 모기만 한 소리로 세 글자를 토해 냈다.
“……열어 줘.”
“어휴, 이게 그렇게 오래 고민할 일입니까?”
“그리고 넌 가서 완전 무장 상태로 연무장 열두 바퀴 돌아.”
“제가 뭘 잘못했다고!”
억울한 부하의 항변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이미 기분이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클로드는 의자를 탕 소리가 나도록 빼고는 태리를 데리고 식당을 그대로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봄처럼 명랑했던 풍경이 가을 낙엽처럼 쓸쓸해졌다. 접시에 홀로 남겨진 버섯은 애잔하고 사람이 떠난 빈자리는 더없이 안타까워 보인다.
짧은 ‘아…….’로 뭉쳤던 기사들의 한숨이 더 길고 짙은 ‘아…….’로 바뀌었다.
탄식이 안쓰러움으로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 * *
“실례지만 먼저 목부터 축이고 으읍, 뜨거워!”
“설마 뱉는 거 아니지?”
“그런 게 아니라 너무 뜨거워서 혹시 차가운……”
“특별히 백작이 와서 개봉한 거야. 마시도록.”
“예…… 예…….”
얼마나 숨차게 뛰어왔는지 백작은 도착하자마자 허겁지겁 마실 것부터 찾았다.
그런 그에게 클로드가 마련해 준 건 펄펄 끓는 물로 지지듯이 우려낸 뜨거운 홍차.
최고급이다, 비싼 거다, 희귀한 거다, 라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하면서 강권하니 도리상 거절할 수도 없었다.
목이 타니 그거라도 안 마실 수가 없는데 마시고 나면 목구멍이 더 뜨겁게 타오르는 이열치열의 효과를 겪고 있었다.
한 모금 삼키고 앗뜨뜨! 하고 놀라고 후후 불어서 겨우 또 한 모금을 삼킨 뒤 더운 입김을 헉헉대는 백작을 보고 있노라면 말라비틀어진 동정심마저 솟아날 지경이었다.
숨이 차서 말을 못 하는 건데 클로드는 그런 사정을 훤히 알면서도 할 말이 없으면 가라고 어찌나 면박을 주던지.
일련의 상황이 너무 웃겨서 태리는 백작이 진정될 때까지 이를 깍 깨물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을 했다.
차가 어느 정도 미지근해지고, 버틸 만한 온도의 그것을 백작이 체면이고 나발이고 원샷으로 처리하고 나서야 상황은 그제야 대화를 나눌 만한 분위기가 되었다.
추태를 보였다고 여겼는지 얼굴이 시뻘게진 백작이 이전보다 더 굵고 강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큼큼, 뵙고자 한 건 다름이 아니라…… 공주님께서도 제국이 이자리스의 평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지원들을 해 왔는지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하, 굳이 그런 멘트로 목에 힘부터 주고 시작하시겠다?
그러면 우위라도 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지.
“그렇죠. 황제께서 많은 걸 투자하셨죠. 돈, 식량, 군대, 인력, 시간. 저는 그 모든 것들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뭐, 그래라. 태리는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네 말이 백번 옳다고 맞장구를 쳐 줬다.
상황이 어려워서 받게 된 도움이라면 딱히 궁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오히려 비굴하게 보여서 하나 줄 거 두 개를 준다고 하면 재롱을 떨 수도 있었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기쁜 일입니다.”
“천만에요. 당연한 일이죠. 전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제 의도를 곡해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제국이 이곳에 들인 지원이 적지 않은 만큼 차후 지도자가 되실 분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총독만 만나고 가선 의미가 없었지요. 이곳의 세력 구도가 그렇지 않습니까.”
흠, 세력 구도라.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마법사 대 기사. 구시가지 대 신시가지. 이자리스 대 발로란. 공주 대 총독.
현재 이곳의 모든 것들은 이등분으로 갈려 있는 상태다. 그리고 그녀는 그중 한쪽을 대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미래의 지도자? 차기 왕 후보? 그런 위험한 자리를 던져 두고 겨뤄야 하는 결투장이라면 거기에 반드시 한 명을 더 추가하고 싶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이 자리에 한 명이 더 참석했어야 했겠네요. 듀이 가문의 브리지테 양이요.”
“그 여인은 또 누구입니까.”
“그런 여잘 왜…… 별거 아니다. 그냥 공주님을 추종하는 잔당이야.”
“아니에요. 그녀는 대재앙 시절에 혁혁한 공을 세운 훌륭한 마법사라고요. 지금은 찻집 주인인데 왕이 되고 싶어 하죠.”
“듀이 가문은 전혀 들어 본 바가 없습니다. 왕실의 방계라도 되는 겁니까?”
“전혀요. 하지만 난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의 도전이라도 허용할 생각이라서요.”
“적법한 승계자가 아닌데도요.”
글쎄, 그런 게 중요할까. 적법을 운운하자면 애초에 클로드에게는 아무것도 넘겨줄 수가 없는걸.
태리는 일찌감치 황제 쪽에도 밑밥을 솔솔솔 뿌려 놓고 싶었다.
자신도 아니고, 황제도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이자리스의 왕관을 가져갈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 표적에 자신만을 올려 두어선 안 될 거라는 점.
그녀가 그 대상으로 낙점한 인물은 당연히 세계관의 법칙에 따른 주인공 클로드였으나, 정해진 엔딩이 내려오고 그녀가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난 뒤의 일은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적통, 순혈주의. 그런 전제들은 지금처럼 위험한 시대에선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소네티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고 그로 인해 이자리스는 어려움에 처해 있죠. 그럼 다음 차례엔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난 그런 가능성을 열어 두려고 해요.”
“그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개방성이군요.”
그거는 좋게 표현해 줘서 그런 거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무정부 수준인 거다. 약간 순한 맛의 춘추전국시대 느낌?
브리짓을 상의도 없이 링 위에 끌어들인 게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차기 왕위 후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고 하면 아마 그 용맹무쌍한 친구는 최고로 잘했다며 어깨를 흠씬 두드려 줄 것이다. 그런 위인이니 별로 걱정도 안 했다.
자, 이제 골치 좀 아파 보라지. 똥줄 타서 얼른 클로드를 쪼고 닦달해 서둘러 새로운 사건으로 넘어가야 한다.
태리는 2파전으로 알고 왔던 백작의 머릿속을 그렇게 은근슬쩍 3파전으로 헝클어트려 놓았다.
으음, 경계 대상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더 있을 줄은……. 백작은 홍차의 쓴맛을 음미하는 듯한 표정을 가장해 찌푸린 미소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긴 고민 끝에야 결단을 내렸는지 딱딱한 말투를 내놓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밝히죠. 그런 식의 포용력은 저희로선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내정 간섭이라고 여기시겠지만 이곳에 쏟아부은 돈과 인력을 감안하면 이만한 참견은 할 만한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태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문장으로 되받아쳤다.
“바란 적이 없는 도움인데도요?”
“바라신 적은 없으나 확실히 도움은 되었죠. 제국의 기사단이 없었더라면 이자리스가 과연 공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요?”
“음.”
“강력한 왕국이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힘은 모두 마법사들에게서 나온 것. 대재앙 때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사망한 지금 이자리스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현 상태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지나친 자만은 거둬 주시지요.”
역시나 고결한 발로란, 기사의 나라 발로란, 정의의 여신을 섬기는 발로란답다.
너희의 땅에 허락 없이 왔지만 품위도 챙기고, 품격도 갖춰서 오명 하나 없이 점거하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읽혀 들어온다.
그래서 이번에는 웃음기 하나 없이 대꾸해 줬다.
“칼을 든 신사로군요.”
“크흠. 양국이 협동하면 원만한 조율 선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공주님께서 과욕만 부리시지 않는다면요.”
“과욕, 이요?”
도를 넘은 침략자의 오만함 앞에 웃지 않으려던 결심이 자동으로 깨지면서 짧은 비웃음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