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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목표로 삼았던 건 그. 하지만 변수가 생겼으니 계획을 변경해야 할 때였다.
“저는 대제께서 파견하신 제국의 사령입니다. 일견 폐하의 의지를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해서 공주님을 뵙고 이자리스의 현 상황에 대해 잠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만. 관저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다른 곳은 보는 눈이 걱정되어서요.”
“지금 당장요?”
“무슨 개수작이야.”
클로드가 즉시 반발하며 튀어나왔다.
“분명히 나대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멧돼지처럼 손발이 통째로 묶여서 수도로 가는 짐마차에 실려 나가고 싶나?”
“그렇게 화부터 내지 마십시오. 저는 제국의 사절단이기도 합니다. 공주님으로선 당연히 절 만나실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자격이 있다고 했나?”
반문하는 클로드의 목소리에 불꽃이 튀었다.
자격을 운운해? 감히 그딴 표현을 써? 가슴속이 불쾌한 열기로 크게 출렁거렸다.
자격의 유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너 정도라면 나를 만날 자격이 있다, 너에게는 그럴 자격을 주겠다, 이런 식으로.
그 반대의 경우는 없었다. 그런 표현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의범절이 머리통에 거꾸로 꽂히지 않는 이상.
그러니 이건 그냥 죽겠다는 의지다. 적어도 클로드의 귀엔 그렇게 들렸다.
“죽여 달라고 용을 쓰는 자에게 굳이 가르쳐야 하나 싶지만 멍청해서 지가 왜 죽는지도 모를 것 같으니 설명한다. 일개 백작에게는 한 왕국의 공주를 사사로이 알현할 자격이 없다. 열받아서 한 번 더 말하니까 새겨들어라. 당장 꺼져.”
여차하면 사정 봐주는 법 없이 바로 조치하겠다는 위협에 백작은 눈을 크게 찢었다.
물론 자신의 예법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건 백작과 공주라는 신분의 구도로 봤을 때나 그런 거고, 대륙을 삼킨 대제국과 망해 가는 한낱 마법왕국의 구도로 설정해 놓고 보면 틀린 것도 없다고 판단했었다.
현재의 발로란은 이자리스보다 확실히 더 높은 곳에 있다. 이들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보호를 받는 대상이 아닌가.
마땅한 대우이거늘 저토록 이빨을 드러내면서까지 싸고돌다니. 뭔가 굉장한 걸 목격한 기분이었다.
“제가 여기서 보고 들은 것들이 폐하께 그대로 전해진다는 걸 모르고 이러는 건 아니시길 바랍니다. 총독이 당최 누구의 편인지 의심스럽다는 말을 보고드리고 싶진 않거든요.”
“잘못된 걸 바른 방향으로 고쳐 줬는데 거기서 왜 편 가르기가 나와? 그래도 말은 잘 꺼냈어. 말 나온 김에 밝혀 둬야겠다.”
클로드가 시선을 바꿔 태리를 바라보았다. 심오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그가 한 자, 한 자 진실된 목소리로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했다.
“이자와는 한패가 아닙니다.”
라고.
“당연한 소릴…… 내가 그런 걸 의심할까 봐요.”
당연히 아니겠지. 미래를 알고 있는 태리에게 그런 얘기는 의심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 그녀가 그에게 보내는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클로드는 ‘아, 그런가……?’ 하고 멍한 입술로 중얼거리더니 금세 씰룩거리는 볼을 급하게 손으로 가렸다.
그 사이에서 입지가 이상해진 건 백작이었다. 그의 머리 위에 물음표와 느낌표가 백만 개쯤은 켜졌다.
“총독?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와는 한패여야지요. 저와 한패가 아니라면 조국을 등지기라도 하겠다는 말입니까?”
“멋대로 해석하지 마라. 악마야.”
“저런, 제가 마왕이라고 했던 비난이 상당히 기분 상하셨던 모양인데.”
“아니야!”
상황이 더 묘하게 돌아가기 전에 태리는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예상에 없었지만 백작의 초대는 악재가 아니다. 밝혔듯이 이건 물어 줘야 하는 미끼였으니까.
오늘의 불씨가 어긋남 없이 더 큰 화재로 번지기 위해 자신이 부채질 역할을 해야 한다면 그녀는 에어컨을 뜯어서 짊어지고 올 마음까지도 있었다.
“좋아요, 갈게요.”
“갈 필요 없습니다.”
“정말 함께 가신다고요?”
백작은 자신이 제안하고도 놀랐다.
“내가 굳이 피해야 하는 자리인 것 같진 않아서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물론 나야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지만 말이야.
고결한 왕녀처럼 적의 초대에 순순히 응한 뒤 그녀는 막아서고 싶어서 들썩거리는 클로드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곤 최선을 다해 미래 지향적인 눈빛을 쏘았다. 소년 만화에나 나오는 멋진 친구들처럼.
너와 내가 함께라면 우린 무엇이든 해낼 수 있어, 두려워 말고 맞서 싸우자, 바로 지금이야 달려……와 같은 유의 감동이 부디 그에게 전달되기를 바랐다.
명색이 주인공이라면 이런 거짓 열정에도 쉽게 넘어와 줘야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주인공의 본분 아니냐고.
‘제발 넘어와라, 좀! 게임 마스터쯤 되려면 운영이란 걸 해야 한다고!’
두 손 모아 기도하길 얼마 후, 머릿속에서 ‘띠링!’ 하는 허상의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클로드의 눈 속에 강력한 전우애와 함께 의지가 용오름처럼 치솟는 게 보였다.
그가 단단해진 턱을 끄덕였다.
후, 됐다. 해냈다. 내가 주인공을 꾀어내는 데 성공했다.
태리는 그제야 긴장을 풀며 한결 편안해진 숨을 내뱉었다.
반대로 백작은 그녀가 고작 눈빛만으로 야생마를 길들인 것에 어떤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듯 콧잔등의 안경을 높이 치켜올렸다.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론이 나자 클로드가 먼저 시간과 장소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2시, 공관으로 와라. 자리를 만들어 놓도록 하지.”
“먼저 앞장서시겠습니까.”
“내가 미쳤다고 백작에게 등을 보여 주나.”
“그럼. 제가 앞으로―”
“아니. 난 오라고 했지. 같이 간다고 한 적이 없다.”
대체 어쩌라는 건지. 왜 또 심술인지 싶겠지만 클로드는 백작을 괴롭히는 데 성의와 정성을 게을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주아주 요만큼이라도.
그가 다른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 길로 와라. 나는 공주를 모시고 이쪽 길로 갈 테니. 참고로 약속 시간에 늦으면 못 들어올 줄 알아.”
반박할 만도 했지만 이 정도면 원하는 건 얻어 냈다고 판단했는지 백작은 알았다며 쉽게 수긍하고 떠났다.
그가 사라지는 걸 표독스러운 눈으로 끝까지 노려보던 클로드 역시 잠시 후 태리와 함께 떠나자 소란스러웠던 골목은 곧 본래의 한적함을 되찾았다.
내내 존재감을 죽이며 숨어 있던 제드가 수풀 속에서 얼굴을 쏙 내밀었다.
“아, 어떡하지?”
이거 왠지 어마어마한 태풍이 몰아칠 것 같은 예감인데. 그가 백작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갈팡질팡했다.
“알려 줘야 하나?”
저어, 백작님. 우리 대장이 지금 자기는 제일 빠른 길로 가고 백작님한테 뱅글뱅글 돌아서 가는 가장 먼 길을 알려 줬습니다만? 거기로 가시면 2시 안에 못 오실지도?
머리를 긁적여 가며 고민했지만 아쉽게도 그는 줄서기에 소질이 없는 편이었다. 줄을 갈아타는 일에도 마찬가지로 젬병이었고.
에라이, 모르겠다. 태풍이 몰려와도 뭐, 힘센 우리 대장이 다 알아서 이겨 먹겠지.
제드가 클로드의 뒤를 쫓아 쏜살같이 내달려 뛰었다.
* * *
약속한 2시보다 일찌감치 먼저 도착한 탓에 태리는 클로드를 따라 공관의 이모저모를 구경해 보게 되었다.
작지만 아기자기한 정원을 산책했고, 정원사가 멋지게 키워 놓은 사과나무에서 덜 익은 열매를 땄으며, 훈련장에 들어가 성기사들만 입는다는 멋진 기도문이 새겨진 갑옷도 만져 보았다.
클로드는 부족한 말솜씨로 설명을 더해 가며 열심히 그녀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쏘다녔고, 그녀는 어리둥절한 채로 그의 큰 보폭을 쫓아가며 바쁘게 설명을 주워들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다녀가고 가면 숨어 있다가 어딘가에서 부스스 나타난 기사들이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어떤 식이냐면.
‘아……. 집들이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아……. 선물은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아……. 힘자랑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이런 식으로.
왜냐하면 보고 있으면 도저히 그런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었으니까!
공주가 저 과일이 뭐냐고 물으면 그들의 단장은 그 나무를 발로 차 온 열매를 다 떨어트려 주었고, 예쁜 곳만 골라서 보여 줘도 될 것을 몇 달째 치우지도 않은 헛간까지 꼼꼼하게 구경시켰으며, 성기사의 갑옷은 멋에 치중하느라 내구성이 약하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 누군가의 갑옷을 칼등으로 때려 너덜너덜하게 망가트려 놨다.
그쯤 되니 처음에야 흥미롭게 모여서 관망하던 기사들도 하나같이 다들 답답해서 미치려고 하고 있었다.
‘아…… 제발 누가 가서 단장한테 말 좀 해! 여자한테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그리고 그것이 정점에 다다라 폭발했던 곳이 식당.
엉망인 것 같았음에도 자기 딴에는 나름 동선을 짜 두었던 건지 클로드는 마지막 장소로 태리와 함께 1층의 거대한 공용 식당에 들어섰다.
점심을 하기에는 다소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어디선가 ‘야, 단장이 여자 데리고 왔다! 식당이다!’라는 말이 퍼져서인지 홀에는 밥을 먹는 척을 하는 기사들이 매우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기사답게 정갈하고 조용하게 묵묵히 씹는 척을 했지만 실상은 모두 두 남녀의 대화에 귀가 쫑긋 선 상태였다.
“그만.”
“왜요.”
“버섯 좀 그만 골라내요. 벌써 몇 개째입니까.”
태리가 먹기 싫다고 접시 가장자리로 빼낸 버섯들을 자기 입 안으로 대신 털어 넣으며 클로드가 따끔하게 잔소리했다.
“어른이면 양심상 나머지는 다 드십시오.”
“내가 왜요? 그러는 자기도 아까부터 당근만 골라내고 있으면서.”
“그건…….”
“할 말 없죠?”
“당근은…… 익힌 당근은 무죄입니다.”
“익힌 버섯은 유죄고? 말 진짜 이상하게 하네.”
“저는 공주님 걸 대신 먹어 줬잖습니까.”
“그럼 나도 총독이 남긴 당근 먹어 줄 테니까 내 버섯 다 처리해요.”
“지금 누가 봐도 버섯이 더 많은데……!”
자기가 손해라며 완강히 거부하는 그를 무시하고 태리는 그의 접시에서 당근만을 골라 제 포크에 꼬치처럼 끼웠다.
나야 좋지, 뭐. 당근 세 개에 버섯 일곱을 퉁칠 수 있으면 완전 이득이고말고.
당근을 하나씩 빼 먹으며 그녀가 보란 듯이 꼭꼭 씹어 삼켰다.
클로드는 웬일인지 그녀가 그것들을 다 삼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더니 막판에 와서 멋대로 계약을 파투 냈다.
“살면서 당근은 좀 안 먹어도 됩니다. 그런데 버섯은 안 돼. 버섯은 유죄야.”
“이!”
이 못된 놈이! 사람을 등쳐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