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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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태리는 그의 우려를 잘 이해했다. 

현재의 동맹 상태는 그녀와 클로드 사이에서 합의된 거였지 나라와 나라, 즉 이자리스의 대표인 그녀와 발로란의 대표인 황제 사이에서 정식으로 체결된 사항이 아니었다.

황제는 이런 방식의 평화가 못마땅할 수도 있을 테고, 만약 그렇다면 적국의 공주와 놀러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오해받을 수도 있는 클로드의 행위는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진짜 진짜 상황이 안 좋아져서 이곳의 총독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면 그거야말로 최악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피할 수 있는 사고라면 당연히 피하는 게 좋고.

꼬불꼬불한 샛길을 조금 더 달려 마침내 막다른 담장에 다다랐다.

제드가 먼저 돌 틈을 잡고 올라가서 넘어갔고, 태리는 간단한 플라이 마법을 걸기 위해 허공에 찍찍 손을 그었으나 보쌈하듯 그녀를 안아 든 클로드에 의해 작대기 두 개까지 긋고 바람과 한 몸이 되어 날았다.

고대의 생물 하이엘프와 일대일로 혈전을 벌였어도 전혀 밀리지 않았던 주인공 파워.

단숨에 담장의 정상을 찍고 뛰어내리려던 순간이었다. 다급한 제드의 만류가 비명처럼 터졌다.

“넘어오지 마세요!”

공중에 막 한 발을 내디디려 했던 클로드는 재빨리 다리를 물려 냈다. 자연스럽게 높은 곳에 선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게 되었고 왜 넘어오는 것을 말렸는지 곧 알게 되었다.

“금방 또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총독.”

낯선 이의 인사말이었지만 태리는 그 한마디에 모든 상황 파악이 다 되어 버렸다.

‘수를 읽혔네.’

어디로 빠져나올지 계산하고 나오는 길목을 딱 지키고 있었으니 그냥 주둥아리에 갖다가 바친 셈이다. 게다가 한 방에 일타쌍피이니 얼마나 좋을까.

아니나 다를까 상대의 목소리에 승리의 기운이 가득했다.

“역시 정문보다 뒷구멍을 먼저 살펴보길 잘했군요. 보좌관이 갑자기 사라진 게 이상해서 주변에 다른 길이 없는지를 수색하던 중이었지요. 길이 엇갈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칭찬 좀 해 주시죠.”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백작.”

“그랬다간 영원히 안 오실 것 같아서요. 아, 결혼식에 초대받으셨으면 미리 말씀을 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그랬으면 기다렸을지도 모르지요.”

낮게 욕을 중얼거리는 클로드의 열기를 느끼며 태리를 궁여지책으로 그의 옷 속에 눈 코 입을 쑤셔 넣어 얼굴을 숨겼다.

‘제발 내가 공주인 것만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겠다.’

평범한 여성쯤으로 봐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 1% 정도 기대했는데 어림도 없다는 듯 운명의 여신은 99% 쪽으로 저울을 기울였다.

“그런데 안고 계신 여성분은, 호오― 정말로 제가 생각하는 그분이 맞습니까? 세상의 모든 신비로움의 기원이자 최초의 마법사 일족의 후손.”

얄미운 음성의 상대는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음에도 이미 그녀가 누구인지를 대강 짐작한 상태였다.

망했다. 한숨을 푹 쉬자 따뜻한 숨결이 가슴에 닿았는지 클로드가 팔 안에 힘을 강하게 실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저놈 실력으론 죽었다 깨어나도 이 정도의 높이는 못 올라옵니다.”

그러니 본인이 충분히 따돌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가 고개를 꺾어 고압적인 시선으로 백작의 머리꼭지를 깔아 보았다.

“다시 경고하는데 기다리라고 했던 장소에 가서 얌전히 기다려라. 허튼짓하면서 나대지 말고.”

“허, 참. 제가 살면서 이만큼 홀대를 받은 날은 오늘밖에 없을 겁니다. 말세로군요.”

클로드는 눈가를 잔뜩 찌푸리더니 백작을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태리를 안아 든 자세를 더 안전하게 고쳐 잡고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려는 거였다.

협박 같은 말투가 창처럼 등 뒤에서 날아왔다.

“총독, 그렇게 하시면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그냥 제 쪽으로 내려오시죠.”

“뭔가를 착각하나 본데. 난 겉치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백작이 어떻게 보든 상관도 없고.”

“총독이 체면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제국민도 있습니까. 전 두 분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린 겁니다.”

백작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건 좀 중요할 거라며 깐족거렸다.

“그렇게 공주님을 안고 다녀서야 오해를 사기에 적당하지요. 총독이 공주님을 납치하며 함부로 대한다거나, 혹은 저를 따돌리셔야 할 만큼 그분께 눈이 멀었다거나. 마왕과 공주 아니면 로미오와 줄리엣. 둘 중 하나죠. 저야 당연히 두 분 사이의 불편함을 고려해 전자로 생각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모습이 꼭 그렇지 않습니까?”

“나오는 대로 지껄이지 마라.”

“그럼 후자 쪽입니까? 그건 그것대로 또 낭패일 텐데요. 지금 돌아서서 사라지시면 어느 쪽이든 제 임의대로 간주하겠습니다. 폐하께 이러한 오해를 전달하여도 괜찮으신지요.”

한껏 찌푸려진 미간 사이에서 망설임이 느껴져 태리는 클로드의 옷깃을 붙잡았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내려가도 돼요.”

“공주님.”

“황제께 우리가 그런 사이라는 이상한 얘기가 전달되면 총독한테는 불리하잖아요. 얕은 수작이지만 어쩔 수 없죠.”

“저는……”

말끝을 흐리며 고심하던 그는 곧 놀라울 만큼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을 납치하려던 게 아닙니다. 앞으로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겁니다. 저놈한테 이 점을 똑똑히 알려 줘야겠습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당당히, 떳떳하게 아래로 뛰어내린다. 태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아, 네가 걱정하던 쪽은 그쪽이었니……? 마왕과 공주?’

* * *

전혀 다른 전개 방식으로 땅을 딛게 되었지만 태리는 빠르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래, 나 같은 유령공주의 견해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주인공의 해석이 몇 배는 더 중요한 거지. 그가 현실적인 로미오와 줄리엣보단 더 극적인 마왕과 공주 쪽으로 해석했다면 그렇구나 해야 한다.

주인공 우선 제일주의 법칙을 되새기며 그녀는 철옹성 같은 클로드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황제 쪽 사람이 저리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 이상 서로 가까이 있는 건 이득 될 게 없어 보였다.

기왕 드러난 정체, 품격이라도 챙기자는 마음에 그녀가 짓눌리도록 쓰고 있던 모자의 끈을 풀고 얼굴을 선명히 드러냈다.

“이럴 수가.”

밝은 햇살 아래에 이목구비의 형태가 완전히 드러나자 놀라움이 파동처럼 퍼져 나갔다.

“소네티……. 정말로 소네티가 살아 있었다니…….”

성배에 담긴 술처럼 주홍 빛깔로 타오르는 눈동자가 백작을 향하자, 그가 중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두려움과 권위에 못 이겨서 뻣뻣한 자세를 굽혔다.

살아 있는 전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공포 비슷한 걸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여러모로 이 이름에 악명도 높고 명망도 높은 덕택이겠지만.

‘어?’

그것보단 다른 장면에서 머리를 더 크게 띵하고 부딪혀 버렸다.

‘이 사람, 그 사람 아냐?’

마주쳐선 좋을 게 없는 인간이라더니. 백번이고 옳은 말이었다. 이런 자라면 충분히 도망칠 만했다. 그의 얼굴을 인식한 순간 놀라서 딸꾹질이 튀어 나갈 뻔했으니.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는 스토리 속에서 한 차례 등장을 했었던, 지금을 기준으로 삼자면 등장하기로 정해진 인물이었다. 단역임에도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건 그가 어떤 사건의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했었기 때문.

‘그 차례가 왔구나. 언데드 토벌전.’

앞으로 벌어질 미래가 가상 현실처럼 머릿속으로 펼쳐지면서 두뇌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미끼는 안 물면 섭섭했을 거다. 도망칠 만했지만 도망치지 않는 게 좋았고, 도망갔더라도 결국 정해진 사건을 향해 미래는 달려가게 되어 있다.

태리는 뇌에 힘을 바짝 주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남자가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신비로움은 이자리스로부터.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트레인 오거스. 팔틴의 백작이자 대제국 발로란의 내각에서 대제를 모시고 있는 궁정 관료입니다. 폐하의 전언을 전달하기 위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인사드리지 못한 점 용서하십시오.”

역시나 똑같은 흐름이다. 그놈이 맞았다.

삐끗한 머릿속이 들키지 않도록 태리는 호흡까지 섬세히 조절해 가며 또박또박 발음해 대답했다.

“나는 이자리스의 공주예요. 짐작한 대로 생존해 있는 유일한 소네티고요.”

“소네티 왕가의 후손을 이리 직접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또한 실로 놀랍습니다. 작고하신 선왕 전하를 정말 많이 닮으셨습니다.”

……죽은 이자리스 왕을 많이 닮았다고? 그 광란의 대마법사를?

“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를 알아요?”

“아,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저희 대제께서 그리신 초상화에서 여러 번 뵈었던지라.”

“황제께서 아버질 그렸다고요?”

“그림은 대제의 취미이십니다. 그림 속에서도 굉장히 수려한 미남이셨지요. 오늘 공주님을 만나 뵈니 그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단 걸 알겠군요.”

백작은 순수한 의미로 감탄하고 놀랐다.

마력의 유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마법사 일족답게 이자리스의 왕족들은 극소수의 혈육만을 후계자로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니 서로 닮을 확률이 높아지는 건 당연지사였지만 전대 국왕의 모든 힘과 재능을 한 몸에 물려받은 공주는 그 부모가 가졌던 분위기 그 이상을 풍기고 있었다.

“총독이 어째서 저렇게 고장이 났는지 이해가 될 만도 하군요…….”

누가 감히 이 아름다운 공주를 가리켜 그녀가 세상에 저주를 불러온 미치광이 마법사의 딸이며, 꺼림칙한 주술사들의 우두머리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난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요정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거기까지.

넋 놓고 현혹되어선 안 된다. 제국의 자랑거리인 저 까칠한 기사단장이 ‘남자’란 걸 확인시켜 준 점만은 물론 대단히 고마운 일이긴 했으나, 공주의 존재는 제국의 야망이 이 땅에서 실현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만 없었더라면 더 빨리, 더 쉽게 갈 수도 있었을 것을. 백작은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클로드를 향해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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