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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그래, 인생의 성공이 더 중요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고 있을 무렵 클로드가 뚜하게 말했다.
“남의 얘길 들었으면 본인 얘기도 하는 게 공평한 거 아닙니까.”
“나요?”
내 얘기?
내 얘기가 듣고 싶다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러보니 다들 당연하다는 시선으로 자신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것보단 총독의 과거가 더 중요하지 않나. 나야 뭐…….”
시스템의 오류로 탄생한 틈새시장 같은 인물일 뿐인데. 저쪽은 여기 세계의 주인공이고.
“왜 그렇게 단정합니까?”
“고자 녀석 과거야 백지장이겠지. 너무 깨끗해서 하얀 나라 맑은 세상이라잖아.”
“더 들을 얘기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아.”
쏟아지는 관심에 태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 너희들 생각보다 나한테 관심이 많구나……?
재촉하는 부담스러운 눈들에 떠밀려서 태리는 과거의 기억들을 더듬더듬 짚어 나갔다.
“나도 많이 만나 본 건 아닌데. 두 명? 세 명?”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클로드의 주름살은 늘어났고, 브리짓은 열심히 만났다고 칭찬해 주었으며, 이즈리얼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감상을 늘어놓았다.
“인간들은 참 신기하단 말이야. 엘프들은 한번 마음을 주면 몇백 년 이상을 가서 상대를 바꾸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인데. 너희들은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아, 그런가. 그런 얘길 하니 좀 죄책감이 드는데.
특별히 가슴 아픈 사랑이나 대단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기는 했다.
“그래도 꽤 오래 만난 사람도 있었다고.”
“그 사람은 어떻게 만났는데?”
“그냥 어렸을 때.”
가난하고 돈이 없던 학생 시절에 만났던 첫사랑이었다.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무작정 밤길을 걸어가는 자신을 시시때때로 바래다주던 착한 남자애였었다.
“가까이 사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나랑 집이 엄청 멀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 날 데려다주고 막차…… 음, 마지막 운행마차를 놓치면 그냥 먼 길을 걸어갔다는 것도.”
그걸 알게 되었던 날,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왜 말을 안 했냐는 말에 그는 그저 멋쩍은 웃음을 보였었다.
너무 미안해서 첫차가 올 때까지 정류장에 같이 앉아 기다려 줬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좋은 애였지.”
추억을 되새기는 그녀의 모습이 편안해 보여서 클로드는 반대로 마음이 몹시 불편해졌다.
“그냥 좋은 사람이라서 만나 줬던 겁니까?”
“어느 정도는요? 사실 그 전에는 큰 감정이 없었는데 그날 들은 말에 마음이 흔들리긴 했거든요.”
“그 남자가 뭐라고 했는데요?”
태리가 그를 바라보며 짧게 내뱉었다.
“좋아해.”
“……!”
“당연히 좋아해, 라고 하죠. 고백할 때 하는 말이야 뻔한 거 아니에요?”
……그게 어떻게 뻔한 말이야.
얼굴을 바라보고 하는 그런 말이 어떻게 뻔해.
클로드는 하마터면 그렇게 대꾸할 뻔했다.
때마침 결혼식의 시작을 알리는 연주 소리가 경고처럼 흘러나오지 않았더라면 입 밖에 냈을지도 모른다.
‘망할.’
주먹 안에 힘이 꽉 들어갔다.
* * *
결혼식은 별 탈 없이 아름답고 평화롭게 잘 끝이 났다.
축하사를 건넨 공주는 상냥했고 덕담을 덧붙인 총독은 무뚝뚝하긴 했지만, 평민의 소박한 결혼식에 이만큼이나 대단한 커플이 참석해 준 것만으로도 부부는 충분히 행복해했다.
피로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즈리얼은 도중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브리짓은 하객들 사이를 누비며 총독에 대한 허튼 소문들을 독처럼 퍼트리고 있는 중이다.
그걸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면서도 클로드는 움직이지 않고 태리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가 봐도 되는데. 가서 막아야죠.”
“싸우는 거 싫다면서요.”
“웬일로 말을 듣고 그래요?”
“가서 싸우면 또 성가신 기자들이 달라붙을 겁니다.”
하기야 쉽게 이목을 끄는 조합이었으니까. 작은 곳이라서 화젯거리가 있으면 금방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오늘따라 유독 껄끄러운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고.
날 배려해 주는 건가 싶어서 그의 표정을 들여다보는데 순간 정신없이 달려온 누군가가 먼지를 일으키며 클로드의 앞에 나타났다.
“대장―!”
“뭐야, 너.”
정체는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는 제드였다. 오자마자 클로드의 팔을 꽉 잡은 그는 옆에 함께 있는 태리를 보더니 입술을 왈칵 깨물었다.
아오, 둘이서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으니까 소문이 다 났지, 하는 중얼거림이 들리긴 했지만 꾸벅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춰 주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 그는 곧바로 클로드를 다그쳤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됩니다!”
벼르고 있었던 참에 마침 잘 나타났다고 판단했던 클로드는 한 대라도 쥐어박으려다가 태리를 의식하곤 도중에 멈칫거렸다.
보여 주기에 별로 긍정적인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아니다.
“나중에 와라, 제드.”
운 좋은 줄 알아라. 살려 준다. 살아 있을 때 잘해라. 그가 강한 힘으로 부하의 어깨를 잡아 밀어 내려 했을 때였다.
제드가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빨리 여기서 도망치십시오. 두 분 모두!”
서둘러 도망치라니. 갈급한 표정이며 대사며 분위기가 꼭 그런 느낌이었다.
정략결혼을 앞두고 야반도주를 하는 금지된 연인에게나 할 법한 소리라고.
언제 그런 사이가 됐지?
하지만 태리는 당장에 그런 걸 따지기보단 지체하지 않고 일단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양산은 도망가는 데 거추장스러우니 과감히 버리고, 모자는 벗겨지지 않도록 턱밑에 끈을 야무지게 묶었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클로드의 손목을 확실히 낚아채 챙겼다.
“퇴로는요?”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탈출로 확보 정도는 해 뒀겠지.
들어왔던 출입구를 통해 다시 나가기엔 사람들이 빽빽해 속도를 내기가 어려워 보였다.
“외곽 쪽으로 돌아 나가는 샛길이 있습니다. 담장이 가로막고 있긴 한데 대장이라면 그 정도 높이 넘는 거야 일도 아니니까요. 저기, 근데요.”
“왜요?”
“어째서 공주님이 대장의 손목을 붙잡고 계신 겁니까?”
장황하게 혓바닥을 놀리던 제드는 한발 늦게 눈앞의 기이함을 알아차렸다.
씩씩하게 기사의 손목을 움켜쥔 공주와, 부끄러워하는 소녀처럼 조신히 제 손을 내어 준 저 키 크고 늠름한 얼간이의 꼴을 보라.
심지어 그의 대장은 지금 수줍음마저 타고 있었다.
열심히 아닌 척하려고 하는데 얼어 있는 게 다 보인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을 들들 볶고도 남았을 인간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도 못 마주쳤다.
“미쳤습니까, 드디어?”
아니, 이거 왜 역할이 바뀌었냐고.
그가 경악한 눈으로 결합된 부위를 내려 보자, 공주는 그걸 어떻게 이해했는지 더 단단하고 강하게 조여 잡는 방향으로 행동을 수정했다.
그러곤 ‘이제 됐음?’ 하는 눈빛이라 제드는 숨이 넘어갈 뻔했다.
아니, 아니야! 난 그런 뜻이 아니야!
“두,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제발 저희 대장을 그런 취급하지 말아 주십시오. 인간이 점점 이상해진다고요!”
지금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저 자세도 그렇고 말이다.
한 손목을 공주에게 내어 준 클로드는 남은 빈손으로 제 가슴 부근을 누르고 있었다. 심박 수라도 확인하듯이.
“보좌관이 오해한 것 같은데 우린 이상한 사이 같은 게 아니에요. 난 그냥 총독을 지켜 주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이상한 거라니까요. 저희 대장은 무쇠로 만든 인간입니다. 무쇠를 지키는 건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짓이라고요.”
“그렇지 않아요. 총독을 노리는 세력은 생각보다 많아요. 오늘도 봐요, 입술이 두 방이나 얻어터졌는데.”
“예……? 아앗, 그러네! 대장, 입술이 왜 그래요!”
“맞았어요. 피가 많이 났고요.”
“헉!”
“그래서 그래요. 지켜 줘야 해요.”
클로드를 때렸다면 상대는 죽음을 맛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상처 낼 수 있는 인물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제드는 이미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저런 무쇠 괴물을 때렸단 말인가……! 무지막지한 무쇠 인간을 때리는 일이 가능했단 말인가……!
“그, 그, 그렇다면 확실히 지켜 주셔야죠. 예……”
“그럼 어서 안내해요. 급하다면서요. 가면서 자세한 상황 설명도 들을 수 있겠죠?”
“옙, 물론이죠. 이쪽입니다!”
제드가 가르쳐 준 샛길은 덤불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복잡하고 헷갈릴 뿐만 아니라 폭이 협소하기까지 했다.
한 사람씩 기차놀이 하듯 지나가야만 해서 제드-태리-클로드 순으로 걸었는데. 태리는 걸으면서면서도 틈틈이 클로드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을 했고, 그럴 때마다 클로드는 본인이 얼마나 얌전히 잘 쫓아가고 있는지를 굳센 걸음걸이로 티를 냈다.
앞에서 긴급한 대화가 오고 갔다.
“대체 무슨 일인 거예요?”
“도시 전체에 두 분 얘기가 다 퍼졌거든요. 둘이 어디에서 뭐 하고 있다고 소문이 쫙 깔렸다 이 말입니다. 뭐 전적으로 우리 대장이 잘못한 거니까 제가 할 말은 없습니다만.”
가장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이파리와 가지들을 걷어 내며 제드가 앓는 소리를 냈다.
“문제는 그 소식을 접한 골치 아픈 상대가 있다는 거죠. 마주쳐선 대장에게나, 공주님께나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요. 그 인간이 자기 수하들을 이끌고 여기로 달려가는 것 같아서 제가 앞질러 온 겁니다.”
“혹시 누군지 알려 줄 수 있어요?”
제드는 잠깐 망설이더니 별생각이 없는 자신의 대장보다 그녀가 훨씬 더 지혜로우며 사리 분별이 옳을 거라는 판단을 하곤 속 시원히 털어놓았다.
“황제 폐하의 눈과 귀죠. 충신인 건 맞는데 대장과는 좋은 관계가 아니에요. 거기다가 대장이 강불로 지지고 기름에 볶아 놓고 오기까지 했거든요. 아마 약이 바짝 올라 있을 겁니다.”
가만히 있는 꿀벌도 건드리면 날갯짓을 하는 법인데, 아예 독침을 쏘려고 작정까지 하고 온 말벌을 그리 뭉개 버려 놨으니. 제드가 끙 하고 시름했다.
“어떻게든 뭐라도 흠집을 잡으려고 할 겁니다. 그리고 그런 빌미를 줘서 보내면 분명히 황궁에서 제재가 내려올 테고요. 황제께서 이곳에 직접 개입하시면 이로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