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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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저것을 들었다가 놓으며 공주는 유리창 건너에서 양산을 고르고 있었다. 마음에는 드는 것을 골라 전신 거울 앞에서 펴 보기도 하고, 입고 있는 옷과 잘 어울리는지 몸을 좌우로 회전해 살펴보기도 한다. 

몸이 돌아갈 때마다 헤어밴드만 해서 길게 빗어 내린 잿빛 금발이 찰랑거리고, 짧은 리본 망토와 원피스의 밑단이 같이 팽그르르 돌았다.

클로드는 힘껏 당기려던 입구의 손잡이를 쥔 채 그대로 멈춰 섰다. 우습게도 그 순간 머리가 띵해지면서 생전 가져 본 적도 없는 주저함이 생겨났다.

들어가도…… 되나?

들어가면 뭐라고 하지? 만나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쇼윈도에 반사된 그의 모습은 잘 차려입은 그녀와는 정반대인 상태였다.

타이도 없고 베스트도 없이 딸랑 셔츠 하나만 걸친 데다가 오늘따라 유난히 겉옷은 칙칙한 색이었고, 젖은 머리는 뛰어오는 동안 헝클어져 있기까지 했다. 그런 것들이 갑자기 엄청나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딱히 볼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따지고 보면 특별히 공주를 만나야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근처에 있다고 해서 달려온 것뿐. 생각해 보면 그것도 정말 단순한 사고방식이었다. 근처 있다, 그럼 보러 간다. 딱 이런 생각으로 움직인 거였으니까.

보는 것. 그게 목적이었다면 이제 다 봤고, 다 봤으니까 돌아가면 되는 건데…….

그런데 클로드는 그러지를 못했다. 굳이 알은척이 하고 싶었다. 꼴이 이래서 문제지.

이걸 열어 말아. 갈등이 섞인 손아귀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힘이 실렸다가 풀리길 반복하던 때였다.

쇼윈도 너머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상자를 들고 나타난 점원이 그 속에서 넓은 창이 둥그렇게 둘러진 하얀색의 플로피 햇을 공주에게 건넨다. 그녀가 밝은 얼굴로 모자를 받아 쓰더니 다시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거울 속으로 비치는 상점의 유리창에서 뭔가를 발견한 듯 ‘어?’ 하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뒤를 확 돌아본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면 저렇게 웃어 주는 걸까.

그녀가 그를 향해 반가운 웃음을 보였다. 하얀 플로피 햇의 창을 양손으로 잡고, 생기를 띤 뺨을 보이면서, ‘거기서 뭐 해요?’ 하고 읽히는 장난스러운 입 모양으로.

그 한 컷에 클로드는 하고 있던 고민을 접고 미련 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이곳으로 달려왔을 때처럼 뇌가 단순해진 게 틀림없었다.

문 위의 종이 딸랑, 하고 귀여운 소리를 냈다.

* * *

“공주님.”

처음 만났을 때처럼, 허리를 살짝 숙여 손등 위에 입술을 대며 클로드는 무척이나 정중해진 모습으로 첫마디를 시작했다.

손을 내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태리가 재밌다는 말투로 돌변한 그의 태도를 콕콕 찔렀다.

“며칠 만에 다시 공손해졌네요?”

왜인지 즐거워 보이는 듯한 음색을 주의 깊게 들으며 클로드는 덩달아 삐쭉빼쭉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눌렀다.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쪽이 잔뜩 화가 나서 날 납치했었잖아요.”

“아, 그거요.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직도 신경을 쓰십니까. 저한테 당한 게 많이 속이 쓰리셨나 봅니다.”

“전혀요. 오히려 내가 총독한테 너무 심하게 대했나 걱정을 했죠. 아직도 삐쳐 있으면 어쩌나 했거든요. 그날 뒷모습까지 엄청 꽁해 보여서.”

꽁? 내가 꽁? 그게 그렇게까지 티가 났었나? 젠장.

속에선 당황했지만 겉으로만은 절대 그렇지 않다며 클로드는 과장된 목소리와 손짓으로 둘러댔다.

“전 아무렇지 않았습, 아니, 않습니다. 다 잊어버려서 정확히는 기억도 잘 안 나고요.”

“정말로요? 나한테 반말을 그렇게 찍찍 해 놓고도 기억이 하나도 안 나신다?”

“그건…….”

“어쩔 수 없네요. 그럼 그냥 이대로 지내요. 사실 난 반말 허락해 주려고 그랬던 건데. 막 기분이 나빴던 것도 아니고 쌍방 과실도 조금 있고―”

“기억이 납니다.”

“갑자기 말 바꾸는 게 어디 있어요.”

“기억이 아주 잘 납니다.”

이미 늦었다며 돌아서는 태리의 팔꿈치를 클로드가 질척대며 붙잡았다. 빼내면 붙잡고, 또 빼내면 다시 또 붙잡았다. 계산대에 있는 점원에게 들리지 않도록 그가 귓가에 붙어서 속닥거렸다.

“해도 되면 하고. 편하고 좋던데.”

이것 봐라. 퐁당퐁당 말을 받아 주던 태리는 그 지점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며칠 못 봤다고 클로드는 그사이에도 조금 성장해 있었다. 예전엔 이만큼 놀려 먹으면 혼자 발끈해서는 ‘아니거든요. 저 하나도 안 꽁했거든요!’ 하면서 얼굴이 빨개지는 걸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이것저것 혜택을 참 골고루도 받는다.

“어쨌든 지금은 하지 마요.”

그렇다고 내가 네 인생을 그렇게까지 편하게 둘까 보냐. 도로 쌩하니 팔꿈치를 빼내 오며 그녀는 다시 거울 속의 자신에게 집중했다. 양산을 손목에 걸쳐 본 뒤 꼼꼼하게 차림새를 점검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전체적으로…….”

“어때요? 나 어색하지 않죠? 마법사라고 얘기 안 하면 다들 감쪽같이 속을 것 같지 않아요?”

그랬다. 오늘의 그녀는 신시가지에 있는 다른 여성들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발로란식의 의상을 갖춰 입고 있었다.

챙이 크게 둘러진 모자부터 어깨와 허리를 강조한 원피스. 거기에 실크 재질의 짧은 리본 망토를 두르고 레이스를 아낌없이 사용한 망사 장갑과 양산까지 챙겼다.

트렌치코트를 갑옷처럼 몸에 꽁꽁 싸매고 다녔던 숲속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밝고 화사한 차림새였다. 친구들과 가든파티에 놀러 가는 딱 이 나이 때의 발랄한 아가씨 같았다.

‘젠장, 귀여워.’

긍정의 답을 기대하는 반짝이는 눈빛 앞에 클로드는 입을 살짝 벌렸다가 도로 꾹 다물었다.

보통은 하늘거림과 가녀림을 강조하는 복식인데 공주가 입고 있으니 똘망똘망한 돌멩이처럼 씩씩한 느낌이 났다. 그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 몰라도.

하지만 사람이라면 최소한 올바른 정신이라는 걸 차릴 줄 알아야 한다. 머릿속에 뭔가가 떠오른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내뱉어선 안 된다. 클로드는 그 정신이라는 걸 차리기 위해 잠시 내면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다.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사려고 오신 겁니까?”

신시가지에 위치한 양장점이니 당연히 제국식 의복과 소품을 파는 게 당연했지만 어째서 이자리스의 공주가? 라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맞아요. 다 사려고요. 기성품이라 별로 비싸지도 않더라고요.”

“왜 갑자기―”

“짜잔. 내가 오늘 엄청 근사한 결혼식에 초대를 받았거든요. 율리아라는 제국 수도에서 온 아가씨인데, 하객으로 가는 거니까 그쪽 양식에 맞게 입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괜히 마법사스럽게 하고 가면 나 혼자 너무 튈 거 아니에요.”

율리아? 누구야 그게.

클로드는 대답 대신 태리가 자랑처럼 꺼낸 청첩장을 머리 위로 뺏어서 부리부리한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돌려 달라며 그녀가 껑충 뛰었지만 높이가 부족해 벽돌 같은 어깨에 이마를 부딪치고 번번이 떨어졌다.

“율리아 엘더와 안드레 풀로소의 결혼식에 친애하는 공주님께서 참석해 주신다면 영광일 것입…… 지들이 뭔데.”

중얼거리듯이 읽는데 순간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든 감정이 그랬다. 초대한다고? 공주를? 감히? 지들이 뭔데?

“전혀 이름을 들어 본 바가 없는 자들입니다. 수상합니다. 가지 마십시오.”

태리는 단호하게 말하는 클로드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곧 그가 티끌 하나 없는 진심이라는 걸을 깨닫곤 어이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신부가 되는 율리아를 내가 알아요. 브리짓의 찻집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거든요. 마법사에 대한 이상한 편견도 없고 성품도 착한 아주 좋은 아가씨였어요.”

“율리아, 율리아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귀족이 아니라서 그럴 거예요. 평범한 꽃집 아가씨거든요.”

“귀족도 아닌 평민이 감히 공주님을 초대했단 말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어떻게라뇨? 난 지금 이자리스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인데요. 친한 사람이 유명인이기까지 하면 당연히 초대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유명한 걸로 유명한 유명인.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클로드가 반응한 지점은 이번에도 다른 포인트였다.

“친하다고?”

순간 유치하게도 손아귀에 들어온 청첩장을 구겨서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지들이 뭔데 친한 척이야.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어디선가 다투는 듯한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시선이 자연스레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다. 웅웅거리듯 울리던 말다툼은 서서히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더 크고 또렷해지더니 가게의 안쪽, 옷이 가득 찬 다른 방의 문이 뻥 차이듯 열리면서 종내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내 친구니까 내가 잘 알아. 쟤는 분홍색이 잘 받는다니까 그러네!”

“눈깔이 썩었나. 그딴 쪼꼬맹이들이나 처입는 옷은 네 집에나 가서 실컷 걸쳐. 저 녀석한텐 내가 골라 온 이 푸른색 스커트가 제일 낫다.”

“아, 진짜 열받게 하네! 여자 옷은 여자가 보는 거지, 댁이 뭘 알아?!”

“엘프의 심미안은 정확해.”

한 가지씩 마음에 드는 옷을 집어 들고 크르릉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하이에나 둘. 떽떽거림은 그들 사이에서 오고 가고 있었다.

클로드는 빠르게 사태를 파악해 혼자 온 줄 알았던 공주에게 사실은 두 명의 동행인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나는 익숙히 알고 있는 찻집 주인 브리짓이었고, 다른 하나는 풍문으로만 접했던 은발에 뾰족 귀를 움직이고 있는 희귀 생명체 엘프였다.

서로 내가 더 잘났다며 고함을 내던 그들 역시 곧 클로드를 발견하곤 가위로 줄을 자르듯 말소리를 뚝 그쳤다.

그렇게 협소하고 한정된 공간 안에서 기묘한 긴장함이 깔리기 시작했다.

태리를 제외한 세 명은 번갈아 가며 상대방의 위아래를 사정없이 훑어보고 평가하길 서슴지 않았다.

이 정도야 기본이라는 듯이. 네깟 것들에게 차릴 예의가 있다면 내가 입으로 먹고 똥으로 싸겠다는 듯이.

상대방을 못마땅하게 관찰하는 모습도 똑같았고 품고 있는 생각도 비슷했다.

‘이것들은 다 뭐야. 줄줄이 사탕처럼.’

‘저 고자는 갑자기 어디서 또 튀어나왔대? 여자 옷 보러 오는데 왜 시꺼먼 놈들이 둘이나 스토킹을 해. 이거 문제가 있네, 문제가 있어.’

‘허여멀겋고 좀 강해 보이는 인간? 뭐야, 시발?’

가시 돋친 클로드의 눈이 브리짓에게서 이즈리얼이 서 있는 방향으로 스르르 움직였다.

“하나는 왱알왱알 독방구고 이쪽은…….”

“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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