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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가 이룬 것들은 당연히 그녀의 몫이다. 그걸 위해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데.
그는 태리가 가진 사명감의 무게에 대해 이미 느낄 만큼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아닌 척하지만 공주는 정에 약하고 자신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위해 자기 몸을 더 부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사람이다. 희생과 노력이 습관처럼 배어서 갖지 않아도 될 미안함과 죄책감까지 지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날, 얼음장 같은 계곡 속에서 시린 줄도 모르고 태연히 잠겨 있었던 그 하얀 발목처럼.
그런데 그걸 뺏어 먹어? 가로채서 왜 나 좋은 일을 안 했느냐고?
그는 진심으로 백작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공주의 행동은 우리 제국에 대한 무력시위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총독이 가만히 손 놓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이건 잃는 건 많고 실속은 적어요.”
기사단도 정기적인 토벌에 나선다. 하지만 다수의 싸움과 혼자의 싸움은 평가가 다른 법이다.
같은 양을 해치워도 공주는 혼자. 같은 위기를 극복해도 공주는 혼자 해낸 것으로 인식된다. 단지 혼자라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쉽게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원하는 결과를 못 내면―”
“못 내면 어쩔 건데.”
클로드가 다리를 꼰 채로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결론은 내가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 같은데. 불만이면 남 시키지 말고 자기가 와서 하면 돼. 해 봤는데 쉬우면 신이 내린 적성이니까 계속 쭉 잘하면 되고 못 하겠으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지.”
언제 목숨이 잘려 나갈지 모르는 최전방이나 다름없는 몬스터의 소굴. 정작 와서 일하라고 하면 무서워서 손가락이나 쪽쪽 빨면서 들어오지도 못하는 것들이 입만 살았다.
“와서 총독 해. 솔직히 난 안 하고 싶거든.”
클로드가 선뜻 비켜 주겠다는 의향을 밝히자 백작이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사양했다.
“총독과 총독의 군대가 아니라면 누가 저 숲속 마물들의 팽창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흥분하지 마시지요. 전 단지 미친개는 적당히 묶어 뒀으면 하고 바란 것뿐입니다.”
“미친개?”
“세상에 남은 마지막 소네티 말입니다. 이자리스의 공주요. 그녀의 손발을 묶고 함부로 나다니지 못하도록 억압하세요. 그 정돈 어렵지 않잖습니까.”
까닥까닥 흔들리던 발목이 그 지점에서 뚝 끊어지듯이 굳었다. 대충 건성으로 상대해 주던 클로드의 낯빛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돌변했다.
“죽고 싶나?”
“……예?”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한다.”
“총독.”
“공주가 범죄자가 아니야. 그녀는 이곳에서 어떠한 잘못도 저지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저토록 자기 맘대로 누비고 다니도록 놔둔다고요? 오는 길에도 왕녀가 이쪽 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걸 봤습니다. 적진에 들어와서도 전혀 위기감이 없어 보이더군요!”
뭐…… 어디?
“공주가 지금 여기에 와 있어?”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다고?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해지면서 고개가 휙 뒤로 돌아간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 제드를 찢을 듯이 겨냥했다.
‘헉!’
추궁을 피해 뒤늦게 시선을 천장으로 도망 보내 보지만 벌써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클로드에게 멱살을 잡힌 뒤다.
백작에게 보이지 않도록 멱살을 끌고 구석까지 몰고 간 클로드가 억눌린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어디에서 뭘 하는지 일일이 보고하라고 했지. 요즘 들어서 부분 부분 누락된 것 같은 기분이 들더니…… 너 계속 이런 식으로 빼돌렸었냐?”
“아, 하하……. 그, 그게 대장이 씨, 씻고 있었잖아요? 나오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럼요!”
“지금 어디 있어. 당장 말해.”
당장 토설하라고 멱살을 주리처럼 틀어 비트는데도, 어지간히 알려 주기 싫은지 제드는 입을 뻐끔거리며 저항하고 저항하다가 목이 졸려서야 사실을 실토했다.
“공원 근처 양장점에…….”
클로드는 원하는 답을 듣자마자 제드를 팩 내팽개치곤 의자 위에 널려 있던 겉옷을 잡아당겼다.
낌새를 알아차린 백작이 허둥지둥 따라 일어났다.
“총독, 설마 지금 어디를 나가시려는 겁니까.”
“어, 그렇게 됐다.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가니까 백작은 그냥 여기 있도록 해. 나 언제 올지 모르니까 기다리다가 지루해져서 그냥 돌아가면 더 좋고.”
예고 없이 이루어진 방문이긴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황제가 보낸 전령인데 이렇게 버려두고 간다고?
백작은 기가 막혀서 선 채로 얼었다. 그간 황제의 명을 가지고 이곳저곳을 숱하게 다녀 봤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취급을 받아 본 일례가 없었다.
“그게 저보다 중요한 일입니까?”
자의식이 팽배한 발언에 겉옷에 팔을 껴 넣던 클로드는 그만 청량하고 경쾌한 비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백작이 나한테 뭐라도 된다고 생각해? 뭐, 애인? 부하? 동료?”
“총독!”
“여기서 날 더 기분 나쁘게 하면 난 아예 당신이 여길 왔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릴지도 몰라. 그럼 나갔다가 오늘 돌아올지 내일 돌아올지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지지.”
“지금 제게 얼마나 무례한지 알고는 계십니까? 저는 폐하의 사자입니다!”
“그래,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발닦개지. 그래서 안 쫓아내고 만나 줬잖아. 얘기도 들어 줬고. 아니었으면 보자마자 창밖으로 던져 버렸을 거야.”
“아직 제게 물 한 잔도 내어 주지 않으신 거 압니까?”
“그래서 목마른가? 그럼 가서 떠 먹든가 말든가 알아서 해라. 물까지 떠다 달라는 요구는 총독인 내게 과하군. 고작해야 차관보 따위가. 나는 고모님이 보내신 발닦개를 정성스레 돌보는 취미가 없다.”
방망이로 정신을 흠뻑 두들겨 맞은 백작은 거기서 더 대꾸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좋아, 이겼군. 해치웠다. 저딴 쓰레기 새끼. 그걸 빤히 보며 클로드는 접힌 목깃을 빳빳이 세우곤 보란 듯이 방을 나가 버렸다.
“대장!”
후다닥 쫓아 나온 제드가 발을 동동 구르며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폐하가 보내신 백작을 저대로 놔두고 간다고요? 돌았습니까?”
“내가 이랬던 게 한두 번인가. 난 늘 이랬다. 그리고 들었잖아. 쟤 별로 중요한 사람도 아니야.”
“그럼 공주는 중요한 사람이고요?!”
“그게 비교가 되나.”
“비교가 되죠!”
“안 돼.”
엉겨 붙는 팔을 단호히 떨쳐 내고 클로드는 다시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빨리 가 봐야 된다면서.
야, 이 미친아! 제드는 다시 몸을 던져 그의 탄탄한 허리를 필사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대장. 다시 돌아갑시다, 예?”
그는 자신의 대장이 왜 이런 엉터리 짓을 하는지 남녀 간의 사정으로 일찌감치 눈치를 챈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공주의 행적에 대해 말을 안 하고 숨긴 것도 있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정이 붙을 게 뻔하니까. 덜 보면 그만큼 마음도 멀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이건 뭐 며칠 건너뛰었다고 급발진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가 그렇게 쫓아다니면 얼마나 헤퍼 보이는 줄 알기나 할까. 그런다고 없던 관심이 생기고, 그런다고 여자가 자길 좋아해 주는 줄 아냔 말이다.
“후, 속 터져! 무슨 마음인진 알겠는데요. 이건 좀……!”
“이게 무슨 마음인데?”
“그걸 모르는 게 더 미치겠습니다만?!”
“꺼져라. 걸리적거리니까 허리 놔.”
“싫어요!”
달라붙는 놈을 계속 떼어 내는 것도 귀찮았는지 클로드는 그냥 제드를 매단 채로 두 칸, 세 칸씩 계단을 건너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절도 있는 기사들의 인사를 끄덕여 받고, 잠그지 못한 단추를 막 꿰어 넣으며 거의 달리는 듯한 보폭으로 돌진해 나갔다.
“천천히 좀 가요.”
“천천히 가잖아.”
“아직 머리도 하나도 안 말랐잖습니까. 그렇게 다 젖어선 어딜 나갑니까.”
“아, 그러네. 쯧, 수건 들고 올걸. 너 갖다 올래?”
“대장이 이런 식으로 공주를 신경 쓴다고 해서―”
“신경 쓰는 게 아니야.”
“……????”
이게 신경 쓰는 게 아니야????
그럼 세상에 있는 신경이란 신경은 다 나가 뒤져야 되는 거야??????
솜사탕을 물에 빠트린 오소리처럼 제드는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 눈먼 인간이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 아니야!
공관의 대문이 코앞으로 닥쳐왔다.
“제발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대장이 이제까지 관심을 안 둬서 그렇지 세상에는 여자가 정말로 많거든요! 얼마나 많냐면 인구의 절반이나 되거든요! 그런데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는 그 많고 많은 여자 중에서도 하필이면 적국의 공주고요!”
이게 지금 말이나 됩니까? 그렇게나 많고 많은 여자 중에 고른 사람이 하필이면 인생 최대의 라이벌이라는 게?
문턱까지 끌려가선 제드는 거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읍소했다. 님아 그 문을 건너지 마시오, 제발!
그게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었던 건지 클로드의 다리가 기적처럼 문턱을 넘기 전에 멈춰 섰다.
“드디어 정신이 드셨습니까?”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진중하고도 성숙한 얼굴이 그를 향했다.
“제드.”
“예, 대장!”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내 임무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러곤 당당히 문을 열고 사라졌다.
얼빠져서 넋을 놓고 있다가 그만 클로드를 놓쳐 버린 제드는 한 박자 늦게 의식을 차리곤 애꿎은 철문을 빵 걷어찼다.
“알긴 뭘 잘 알아. 당장 돌아와요, 이 망할 인간아!”
* * *
공원의 한가로운 분수대를 지나자 바람이 젖은 앞머리를 시원하게 쓸었다. 따뜻한 햇살 아래 피크닉을 나온 사람들이 옹기종기 풀밭에 모여 있었다.
여기서부터 공원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늘어선 상점 거리가 신시가지의 메인로드다. 호사스러운 귀족들이 바글거리는 와인 바도 브리짓의 수상한 찻집이 장사를 하는 곳도 이곳이었다.
클로드는 완만하게 경사가 진 공원의 언덕을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다른 곳보다 약간 지대가 솟아올라 있는 덕분에 앞뒤로 전망이 탁 트였다.
올라온 방향의 뒤로는 그가 머무는 공관과 신문사, 귀족들이 몰려 사는 타운하우스가 있고 앞으로는 레스토랑이나 가게, 도서관 그리고 저 멀리로 강 건너의 구시가지가 보인다.
이 근처의 양장점이라면 대략 여섯 곳 정도. 클로드는 조사를 나온 탐정처럼 거리의 옷가게들을 불쏘시개처럼 푹푹 쑤시고 다녔다.
간판이 보이면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 신속하고 빠르게 가게를 뒤진다. 구석까지 찾아봤는데도 태리가 없으면 곧바로 다음 가게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남자가 가게에 불쑥 들어갔다가 범인이라도 검거하듯 샅샅이 훑어보곤 바람처럼 쌩 떠나 버리는 광경이란 보통 희한한 구경이 아니라서,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마다 사람들의 눈이 호기심 많은 참새처럼 쪼르르 따라왔다.
‘찾았다.’
그렇게 한참을 불도저처럼 밀고 다닌 끝에 그는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아냈다.
이번에는 들어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거리의 쇼윈도 너머로 익숙한 뒷모습이 어른거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