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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대로 뚫고 나가요! 쫄지 말고…… 앗, 아니다, 아니야! 쫄아요! 쫄아! 뒤로 빼요! 위험하게 얼쩡거리지 말고 빠져나오는…… 척하다가 괜히 다시 얼쩡거려 봐요! 걸려들면 좌측 측면에서 공격!”
“지휘는 간결하게 해 줘야 될 거 아닙니까!”
시시각각 변하는 변덕스러운 요구 사항을 소화해 내며 클로드는 태리의 주문대로 왼쪽 수면 속으로 칼끝을 푸욱 찔러 넣었다.
정신없는 명령이었지만 일종의 심리전으로 작용했는지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에 꼬여 든 뱀은 신속하게 동선을 바꾸지 못했다. 눈 깜짝할 새에 푸른 칼끝이 배 아래를 긁고 지나가면서 옆구리 쪽에 출혈을 낸다. 거대 몬스터를 상대로 터진 첫 번째 치명타였다.
상처를 입은 뱀이 움츠린 찰나에 클로드는 고개를 돌려 후방을 맡고 있는 태리를 살폈다.
그녀는 수중에서 미친 듯이 자라 올라오는 식물형 마물들을 가르기 한 번에 여러 줄기씩 베어 내며 그것들이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는 중이었다.
언뜻 보면 미역 줄기를 닮은 저것은 식인 식물 포르기네이로, 먹잇감을 줄기로 휘감아 골절이나 질식사를 시키는 수생 식물이었다.
저 줄기에 발목이라도 잡히는 날에는 서펜트를 상대한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으나 그녀가 뒤에서 저렇게 완벽하게 지켜 주는 덕분에 클로드는 서펜트와의 전투에 전념할 수 있다.
도끼로 줄기를 끊고 총으로 뿌리를 쏴 망가트리는 오차 없는 연속 동작을 반복하며 그녀가 그를 향해 맹렬히 지휘했다.
“다음 공격은 얼굴로 올 테니 준비해요! 물려고 달려들 때 입 안쪽의 살을 잘라 버려야 돼요! 독니에 물리지 않도록 주의하고요!”
클로드가 알겠다고 대답할 겨를도 없이 공주의 예언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섭도록 적중했다.
하악, 하는 위협적인 쇳소리가 머리 위에서 퍼지고 곧이어 곡괭이처럼 휜 두 개의 송곳니가 번쩍인다.
괴물이 제 얼굴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을 직시하며 클로드는 투 핸드 소드처럼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원래라면 혼자서는 결코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의 마물. 그러나 어떤 공격이 다가올지 미리 알고 있으므로 쓰러트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가리를 쩍 벌리며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괴물의 주둥이 앞에서 그는 오러를 몇 겹이나 씌워 두꺼워진 칼날을 강하고 빠르게 횡 방향으로 그어 버렸다.
강력한 일격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가면서 뼈가 있는 경계선까지 입 안의 연한 살점들을 너덜너덜하게 찢어 버린다.
위턱과 아래턱이 분리된 것처럼 덜렁거리자 뱀이 성난 울음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전광석화 같은 지시가 화살처럼 뒤따라왔다.
“그다음은 눈!”
“알고 있습니다!”
뱀이 비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부위는 눈과 입 안, 그리고 배. 그중에 배와 입 안쪽에 치명상을 내 주었으니 당연히 남은 곳은 눈 하나뿐이다.
클로드는 제 얼굴 앞까지 내려왔던 뱀이 물러나서 도망가기 전에 재빨리 수면을 차고 뛰어올라 놈의 머리 위에 솟아 있는 뿔을 한 손으로 움켜잡아 고정시켰다.
그러곤 다른 손으로 송곳니가 빠져 나와 있는 틈 사이로 힘껏 칼을 밀어 넣은 뒤 허벅지에서부터 허리, 등, 어깨, 팔, 손목으로 이어지는 모든 근육을 사용해 노란색 눈알이 있는 곳까지 대각선으로 쳐 올려 베었다.
“하아아아악!”
검기가 베고 지나간 자리를 따라 괴물의 입천장이 터지고 뺨이 갈라지고 왼쪽 눈알이 한꺼번에 터져 나갔다.
함몰되듯 얼굴의 반쪽을 모조리 잃고 나서야 뱀은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연이어 세 번째로 터진 치명타로 만약 게임처럼 HP(생명력)를 볼 수 있는 표시 칸이 있었다면 절반 이하로 푹 깎였을 순간이었다.
하지만 서펜트는 아직까지도 죽지 않았다. 시력을 앗겨도 체온으로 먹잇감을 탐지하는 몬스터가 아닌가.
클로드는 다시 한번 난전에서 싸우고 있는 태리의 무사함을 확인한 뒤, 뱀의 옆구리에 냈던 상처에 단검을 꽂아 손잡이로 삼곤 거대한 등 위로 껑충 올라탔다.
그는 공주와 같은 세세한 약점 공격 같은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생명체라는 건 중추 신경계를 부숴 버리면 재생이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상식이라 이대로 등뼈를 밟고 타며 뼈 마디마디를 망가트릴 작정이었다.
괴물이 꼬리를 휘둘러 내려칠 때마다 풍압과 수압이 동시에 강타했지만, 능선을 타고 달리는 흑표범처럼 클로드는 뱀의 허리에서부터 유연하고 작은 척추뼈들을 차례대로 부서트리며 빠르게 머리끝까지 치고 질주했다.
마침내 단단함이 느껴지는 두개골을 밟고 올라서자 방금 전에 터트린 눈알이 발밑으로 내려다보였다.
한차례의 치명상을 입은 급소에 또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하면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클로드는 머리를 흔들어 그를 떼어 내려는 뱀의 발악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순응해 떨어지면서 피가 흐르는 동공 속으로 하얀 성검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검이 뽑히지 않게 힘을 준 팔 때문에 어깨가 뽑힐 것 같았지만, 꼬챙이에 꿰인 지렁이처럼 그가 추락하는 속도를 따라 거대한 괴물 역시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끌려 내려온다.
발바닥에 땅이 닿은 순간 물보라와 흙먼지가 사방으로 장엄하게 퍼져 나갔다.
마지막까지 펄떡이던 덩치가 꺽 소리를 내며 잠시 후 경련을 멈추자 폭포수처럼 튀었던 물들이 차차 가라앉았다.
한 줄기의 검이 서펜트의 눈구멍에서부터 턱을 관통해 땅바닥에 일자로 꽂혀 있었다. 괴물의 머리통은 핀에 꽂힌 나비 표본처럼 널브러졌다.
‘확실하게 죽었군.’
전력을 다해 싸우고 얻은 승리감이 거친 숨과 함께 기분 좋게 전신을 맴돌았다. 이 정도의 몰입감과 속도감이 넘치는 전투를 치른 게 얼마 만인지. 클로드 본인이 자각하기에도 스스로 한 단계를 뛰어넘은 듯한 성장감이 느껴졌다.
그가 여운을 다독이며 허리를 펴 일어선 그때였다.
“……!”
따뜻하고 아담한 무언가가 쏜살같이 달려와 품 안으로 퍽 하고 안기더니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와, 웬일이야! 잘했어요! 진짜 잘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죽일 생각을 했어요? 천재 아닌가?!”
투포환처럼 날아와 안겨 든 공주는 그의 널찍한 어깨와 등짝을 대견하다는 듯이 연신 두들기고 쓰다듬으며 폭풍 칭찬을 했다.
얼떨떨한 심정이 된 클로드가 무심코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려 마주 안으려는 순간 따뜻한 몸이 쏙 빠져나가며 이번엔 그의 뺨을 신나게 비비며 감탄했다.
“그냥 놔둬도 알아서 죽었을 텐데. 세상에, 뼈를 다닥다닥 쪼개서 죽였네!”
“……그만 쓰다듬으시죠. 제가 공이라도 물고 온 강아지인 줄 아십니까.”
젠장, 난 강아지가 아니야. 강아지가 아니라고!
남자답게 굵직한 목소리로 짜증을 내 보았지만 흥분의 도가니에 찬 공주에게는 조금도 먹혀들어 가지가 않았다.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눈앞에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이렇게 마무리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사실 서펜트는 약점 세 곳만 공략하고 기다리면 점점 기력이 떨어져서 대충 버티기만 해도 알아서 죽거든요. 그런데 추격해서 깔끔한 처리까지…… 진짜 잘했어요. 너무 잘했어, 정말. 최고예요.”
클로드는 고작 그런 걸 가지고 호들갑이라는 둥, 그 정도야 평상시에도 다 되는 일이라는 둥 목덜미를 붉히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태리는 그가 보여 준 무용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내 도움이 없어도 혼자 훌륭히 끝냈어. 앞으로는 더 잘해 줄 거 아니야.’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잘 싸울 줄이야.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귀향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
“이제 저것만 남았네요.”
“예?”
태리가 탁한 수면 밑에서 흔들거리는 굵고 긴 그림자를 가리켰다. 직전까지 그녀가 방어전을 펼쳤던 식인 식물 포르기네이였다.
“저것까지 처리하고 간다고요?”
반면에 클로드는 정신이 확 깼다. 번식력이 트롤 수준인 저딴 미친 식물. 베고 또 베어도 여간해서는 줄기가 생성되는 속도를 따라잡기가 힘들다.
물에 흠뻑 젖어 지칠 대로 지친 공주의 몰골을 보곤 그가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이 몇 신 줄이나 압니까. 충분히 늦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철수합니다.”
“나한테 기가 막힌 계획이 있단 말이에요.”
“무리하지 말라고 했던 얘기 어디로 들었습니까? 공주님은 이미 많은 체력을 소모했습니다. 서펜트만 해도 정석대로면 기사 대여섯은 모여서 싸워야 했다고요.”
“그렇긴 한데 난 당연히 총독이 이길 줄 알아서 별로 힘을 안 썼어요.”
물의 결정체처럼 순수하고 맑은 믿음의 눈이 빛났다.
봐, 네가 잘해서 난 뒤에서 하나도 안 힘들었어. 너 되게 잘하던데? 그런 청량한 마음의 소리가 눈으로 읽히는 바람에 클로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 참나…… 그런, 표정을 지으시면 제가 화를 못 낼 줄 아시나 본데.”
“표정이요?”
무슨 표정? 나 아무 표정도 아닌데. 이건 그저 사실을 읊은 것에 그칠 뿐인데.
태리는 영문을 모르고 갸웃했지만 클로드는 그다음에도 또 눈을 그렇게 떠도 소용없다면서, 자신도 거절을 아주 잘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며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다.
얜 도대체 내가 눈을 어떻게 떴는데 그래. 난 아무 눈도 아닌데.
“식물 종의 마물은 촉수가 무한대로 늘어나는 크라켄을 상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거하려면 뿌리를 쳐야 하는데 그 뿌리만 해도 적은 숫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내가 계획이 있다고 했잖아요.”
“무슨 계획이길래― 아, 아닙니다.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말하지 마요. 우린 그냥 집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계획이냐면―”
클로드의 커다란 손바닥이 헐레벌떡 다가와 입을 막으려 한다.
앗, 안 돼. 난 말할 거야! 남자의 손가락이 입술을 스치고 압박하려는 순간 태리는 입을 벌려 그의 길고 두툼한 손가락 마디를 앙 깨물었다.
“아!!!!!”
별로 세게 깨문 것도 아닌데 클로드는 손을 확 빼며 시뻘게진 얼굴로 펄쩍 뛰었다. 그러더니 앙칼진 고양이처럼 꼬리를 바짝 세워 소리쳤다.
“어딜 깨뭅니까! 이게 뭔 줄 알고 깨물어요, 겁도 없이! 미쳤습니까?”
뭐어? 미쳤냐고?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와, 억울하다. 태리는 이번만큼은 정말 억울했다. 누군들 그러려고 그랬나. 지가 먼저 나 말 못 하게 하려고 해서 그런 거 아닌가.
순간 욱하는 심정이 들었다.
“아니, 내 말을 안 들어 주니까 그런 거잖아!”
“들으면 거절 못 하니까 그런 거잖아!”
어어? 화를 내? 나보다 더 큰 소리를 냈어? 이런 건 못 지지.
빽 소리치며 받아치는 게 기가 막혀서 그녀는 쿵쿵쿵 걸어가 발꿈치를 높이 세운 뒤, 잘난 놈의 턱 밑에 이마를 바짝 들이대서 따졌다.
둘 사이에 삽시간이 불이 확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