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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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대단하다, 인정한 적은 없었지만 공주의 전투력은 여간한 제국의 기사들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편이었다. 

그것을 가리켜 그녀는 태생 덕분이 아니겠냐며 겸양을 떨었지만 글쎄, 그가 보기에 그녀가 떨치는 힘의 태반은 몸을 아끼지 않는 무모함에 있다고 생각했다.

죄책감이 키운 무모함 같은 것.

죄의식이 만든 간절함 같은 것.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더 열심히, 잘 살아야만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

그게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공이나 출세 같은 것엔 욕심도 없다는 사람이. 빼앗긴 땅이나 왕위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신의 몸을 혹사해 놓곤 저렇게 무심히 앉아 홀로 상처를 닦아 내는 꼴을.

‘무시해. 어찌 되었든 내게는 좋은 일 아닌가.’

알 수 없이 울렁거린 마음을 억지로 다스린 그는 제 눈치를 보며 허둥지둥 부츠에 발을 집어넣는 그녀의 곁에 몸을 수그리고 앉았다. 그러곤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덤덤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며칠간은 호텔로 찾아뵙지 못했군요. 주변에 별일은 없습니까.”

“크게 별일은…….”

있기야 있지. 호텔 코앞에 개원한 상또라이의 진료소가 태리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지나갔다.

그렇지만 ‘우리 앞집에 네 미래의 동료이자 사이코패스가 이사 왔어!’라는 말을 당장 해도 될까.

고민하면서 망설이는 사이, 딱히 대답을 추궁하려고 했던 건 아닌지 클로드가 발목을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앞질러 말했다.

“누가 독촉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서두릅니까.”

“뭘 서둘러요?”

“숲 청소 말입니다.”

“아아.”

그랬나? 하긴 요 며칠은 조금 무리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수면 시간까지 팍팍 줄여 가며 일했으니. 때마침 나오는 하품을 그녀가 하암 하고 삼켰다.

“빠르면 좋잖아요.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고. 그리고 요즘 나한테 팬레터가 얼마나 많이 오는데요. 원래 사람은 잘한다, 잘한다 하면 더 잘하고 싶은 거예요.”

“팬레터요?”

찡그리는 클로드의 표정에 태리는 ‘얘 좀 봐, 너 모르니? 나 인기인이 되어 가고 있잖아!’라는 뿌듯한 표정으로 으스댔다.

보고 있던 클로드의 미간은 더 심하게 파였다.

감시인을 붙여 둬도 사생활까진 간섭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는 조만간 호텔을 뒤져 그 팬레터라는 걸 검사 좀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먹었다.

“사람들이 공주님께 편지를 보낸다 이겁니까? 어떤 내용이죠?”

“총독이 그걸 알아서 뭐 하게요. 거의 다 좋은 내용이에요. 우리 공주님 잘한다, 우리 공주님 끝내준다, 멋있다, 다 그런 칭찬이죠. 원래도 열심히 할 작정이었는데 매일 그런 걸 받다 보니까 더 열심히 하고 싶어졌어요. 좋은 자극이죠.”

좋은 자극이라고? 글쎄. 그런 식으로 당신을 재촉하고 강요하면서 험지로 내모는 게 아니고?

클로드의 목소리에 약간의 화가 묻었다.

“사람들이 원한다고 그걸 일일이 다 들어줄 순 없지 않습니까? 공주가 초인입니까? 말만 하면 다 되게?”

“이곳 주민들로선 당연한 바람인 거죠. 하루라도 빨리 숲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하는 거고 그러려면 당연히 내가 분발해야―”

쯧. 못마땅한 듯 혀를 차 클로드는 그녀의 말을 예의 없이 끊어 버렸다.

저런 태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귀하디귀한 여자가 이런 곳에서 상처나 닦게 되는 것이다.

제발 좀. 그가 짜증이 섞인 숨을 내뱉었다.

“공주님께서 조금 늑장을 부린다고 해서 당장 이자리스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닙니다. 다들 적당히 좀 닦달하라고 해요.”

언제까지 과거에 발목 잡혀 살 건가. 삶에는 원치 않는 변화란 것도 있는 거다. 그는 고집스러운 이곳의 마법사들이 그 사실을 정도껏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면 했다.

나라가 망했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고, 그런 일도 있는 거고, 그런 삶도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너희들이 그렇게나 소중해하는 공주는 적당히 좀 괴롭히라고.

그가 단호한 말투로 선을 그었다.

“앞으로 이삼일에 한 번은 사냥을 쉬세요. 제가 호텔에서 죽치고 감시할 거니까 멋대로 숲에 들어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고.”

태리가 아앗! 하고 반박했다.

“안 되는데!”

“돼요.”

“안―”

“돼. 된다고.”

또 매섭게 말허리를 끊어 먹으며 클로드는 더 호된 말투로 가르쳤다.

“그걸 가지고 누군가 뭐라고 한다면 바로 남 탓 하십시오. 나라 꼴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왕을 말리지 못했던 인간들, 대비책도 없이 그냥 당한 놈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당신 뒤에서 박수나 치는 놈들.”

“…….”

“그렇게 한 놈씩 죄목 씌워서 입 다물게 하면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인생이 한가해집니다. 내가 많이 해 봐서 압니다. 그렇게 쉬면 됩니다.”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꾀병의 수법을 지시하면서 클로드는 알아들었냐는 엄한 눈짓을 했다.

그게 어이가 없고 황당한데 두 눈에 가득 찬 그의 얼굴이 너무 진지하고 열성적이라서 태리는 차마 딴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설혹 주인공 주제에 그가 저리 흑막 같은 대사를 날렸다고 해도.

조물주가 점지하길 명색이 세계를 구할 용사인데 엄숙하게 말하는 내용이란 좀 하다가 힘들면 남 탓 하고 쉬자, 였다.

“그쪽 기사들은 자기 대장이 이렇게 불성실한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

“마법사들은 압니까? 공주님이 저한테 이 땅 양도 계약서 쓰신 거?”

아, 그렇지. 계약서도 써 줬지. 머쓱해진 그녀가 물기를 옷에 대충 쓱쓱 닦으며 불만스럽게 중얼댔다.

“쉰다는 게 말은 쉽죠. 그런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고요. 총독이야 그렇게 살아도 잘 풀렸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운이 좋진 않아요. 나처럼 아등바등해야 겨우 뭔가가 될락 말락 한 인생도 있어요.”

그가 운이 좋다는 공주의 확실하고 분명한 장담에 클로드는 인상을 썼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에게 저런 말들을 하곤 했다.

미래가 어떻게 된다고 해도 너는 결국 다 이루게 될 거라고.

원하는 게 무엇이든 전부.

턱도 없는 소리였다.

“저를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인생이 공주님에 비해 편해 보인다면 그건 착각입니다. 멀쩡한 척하는데 자세히 보면 저도 망했습니다.”

차마 밝힐 수 없는 사정이었다.

날 때부터 불행과 축복을 동시에 지닌 몸이라곤.

황족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하는 신성력은 없고,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검술에는 타고난 재능을 보였던 이 모순된 삶을.

그의 삶에는 언제나 치부와 비범함이 함께했다.

그것을 세상으로부터 감추는 데엔 성공했지만 황제를 속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니 그의 인생이 망한 거였다. 조카의 재능을 묵히고 싶지 않았던 욕심 많은 황제의 목줄의 매여 그는 단 한 번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평생을 이용당해 왔다.

“남의 땅을 점령하고 있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게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사는 게 꿈입니다. 그런데 한순간도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착실하게 국가를 수호하는 영웅으로 거듭났고 빼도 박지도 못하게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되어 버렸다. 지나치게 요란하고 시끌벅적한 삶이었다.

“그쪽 황제 때문이에요?”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태리는 그가 얼마나 자기 고모를 혐오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이유마저도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척하며 질문했다.

“그래도 고모면 가족인데 그렇게까지 최악이에요?”

최악이냐고? 그가 말이나 되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최악이 아니라 그냥 악입니다.”

필살 미남 얼굴을 가지고 몸을 들썩이고 몹시 질색을 하면서 말하는데, 태리는 순간적으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전 대륙이 우러러보는 철혈 군주의 뒷담화에 이렇게나 진심일 일이라니.

대형견처럼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다 자란 성인 남자였지만 어쩜 이럴까 싶을 정도로 그는 정말 버릇이 없고 귀엽다. 너무 귀여워서 아까 전부터 묘하게 찰랑거리는 물소리마저 퐁당퐁당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래도 난 변함없이 총독이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그쪽이랑 같이 있으면 난 항상 운이 좋았거든요.”

“언제 그런 적이 있었다고……”

“지금도 그런데.”

그녀가 예고 없이 클로드의 팔을 잡아당기며 거의 붙도록 땅바닥에 몸을 수그렸다. 헐렁하게 땋아 가슴 앞으로 내린 머리가 그의 뺨을 간질였다.

“숨만 쉬고 움직이지 말아 봐요.”

갑자기 당한 일에 클로드는 당황했다가 숨만 쉬라는 그녀의 명령에 후욱 입김을 내뱉곤 곧바로 눈 밑이 화끈해졌다. 자신이 내뱉은 하얀 입김이 공주의 것과 지척에서 섞여 밤공기 속에 엉망으로 헝클어지는 게 또렷하게 보였다.

……미친.

자연 현상 따위가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비칠 줄이야.

실수로 고개를 돌리면 입술이 부딪치는 것쯤은 문제도 되지 않을 거리란 걸 알려 주듯이.

턱을 조금만 기울이면. 머리를 약간만 틀면.

“물속에 서펜트가 있어요.”

여기가 어딘지 장소마저 까맣게 잊은 채 그녀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만을 가늠하고 있던 클로드는 꺼림칙한 풍덩 소리와 함께 별안간 튄 찬물을 맞고서야 잡다한 생각에서 깨어났다. 참고 있던 줄도 몰랐던 숨이 한꺼번에 끌려 나왔다.

“방금 수면 밖으로 나왔던 꼬리 봤어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뱀이에요. 계곡물이 녹자마자 서펜트가 나타났다고요.”

태리는 흥분해서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예티만 잡고 끝나 버렸을 일이 서펜트 사냥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위험이 알아서 넝쿨째 굴러 들어온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죽일 만한 사냥감이 알아서 찾아온다니. 역시 주인공다운 행운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굉장했다. 그와 있으면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난다.

“봐요, 증명됐죠? 당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총독은 나한테 행운이에요.”

아이처럼 들떠 있는 속삭임에 제자리로 돌아오려던 클로드의 머리가 다시금 빙빙 어지러워졌다.

“가죠. 한탕 하러!”

이 여자는 자신을 놀리고 있는 걸까.

“싫으면 말고요.”

3초간 멈춰 있던 그는 태리가 잡고 있던 팔을 놓으며 사슴을 쫓는 토끼처럼 훌쩍 뛰는 걸 보곤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 비틀거리며 뒤따라갔다.

싫으면 말라니.

“싫다곤 안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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