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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이면 된다고 했잖습니까.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압니까.”
“나 얼마나 걸렸는데요?”
“30분 넘게 걸렸습니다.”
“바쁘면 그냥 가지. 혼자서도 다 되는데.”
“몇 번을 말씀드리지만 제가 곤란해질까 봐 그러는 겁니다. 공주님처럼 귀한 신분의 사람이 혼자 다니시다가 돌아가시면 제 책임이 가볍지 않아서요.”
봐, 난 네가 걱정되는 게 아니야. 내가 곤란해질까 봐 그런 거라고? 라면서 바락바락 주장하는데 뭐 그런 구차한 변명 같은 건 별로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근데 내가 여기로 오는 줄은 어떻게 알고 따라왔어요? 혹시 나한테 사람 같은 거 붙여 놨어요?”
“그…….”
대놓고 물을 줄은 몰랐던 걸까.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진 클로드가 아니라고 버벅대며 손을 내저었지만 인간이 연기를 못해도 정도껏 못해야지. 너무 못하니까 속아 주는 척을 하기도 힘들었다.
“맞구나. 나한테 사람 붙였구나.”
“그런, 게 아니라.”
“됐어요. 이미 붙인 걸 어쩌겠어요. 앞으로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럼 따로 말하진 않을게요. 어차피 다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보고 따라오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요.”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그냥저냥? 엄마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한 번 등장한 엄마라는 단어에 그는 뭔가를 엄청나게 따지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입을 벙긋댔지만 태리가 먼저 저만치 앞서 나가 버렸다.
후다닥 큰 걸음으로 따라잡은 그가 제 품 안에 안긴 야채 더미를 턱으로 가리켰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가져갑니까?”
“도둑질하러 온 건 아니니까 그냥 놔두죠.”
뽑긴 했지만 돌려주기로 하고 둘은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움막의 뒤쪽, 점술사가 항아리를 잔뜩 가져다 둔 곳을 찾아냈다. 각종 양념이나 저장 음식 같은 것들이 항아리마다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 서리한 야채들을 우르르 쏟아낸 뒤 태리는 총을 꺼내 그것들을 정조준했다.
“돌려준다면서요?”
“돌려주죠. 돌려줬잖아요? 하지만 이건 깨트리고 간다 이거예요. 기왕 부순 도둑의 멘탈, 제대로 바스러트리고 싶거든요.”
“멘탈……?”
“처벌.”
“아, 처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왜 이렇게 파괴적입니까.”
클로드는 태리를 보고 이거 순 파괴왕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은 또 성실해서, 잘 맞히라며 항아리들을 일렬로 맞춰서 세워 주기까지 했다.
“오오, 역시 동료가 될 자격이 충분해 보이는데요?”
“빨리 쏘기나 하십시오.”
대체 내가 왜 이렇게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고 있는지는 스스로도 모를 일이지만 그냥, 저렇게 신난 악당처럼 웃는 얼굴을 보면 어이없는 웃음이 나기는 했다.
시원스러운 몇 발의 총성이 터지고 난 후 테러범들이 유유히 떠난 현장에 얼마간 노인의 통곡과 절규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뒤로 장벽 마을 점술사의 말로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하루도 되지 않아 도시의 모험가들이 알음알음으로 있었던 이야기를 전했고, 삼사일이 지나갔을 즈음에 와인 바의 모든 귀족들이 그 화젯거리를 안주로 삼고 있었다.
발로란의 귀족들은 공주의 행동을 야만적이라며 떨떠름하게 여겼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태리는 그 후로도 거침없이 자신의 일거리들을 해치우고 다녔다.
마법사가 아니면 손대지 못하는 재앙의 흔적들을 지우거나 복구했고, 모험가들의 금품을 탈취하던 타락한 숲 고블린을 몰살시켜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아 오기도 했으며, 손수 제작한 검은숲의 지도를 배포해 사람들의 안전을 높여 주기도 했다.
또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도시의 망가진 기능들마저 고칠 수 있도록 해 구시가지는 전과 다르게 말끔해지기까지 했다.
괴도 루팡처럼 훌쩍 나타났다가 일을 해결하고 떠나 버리는 공주의 영웅담은 그렇게 서서히 주간 타블로이드(tabloid)지의 1면을 장식해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주를 설명하는 말 앞에 파수꾼, 수호자와 같은 호의적인 어휘들이 붙기 시작했고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에는 칼을 든 기사와 함께, 마법봉을 겨누는 공주의 역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었다.
* * *
똑똑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안시가 환한 미소로 들어왔다.
“공주님, 많이 바쁘신가요?”
“아니야, 괜찮은데.”
“브리짓이 뵙고 싶다고 찾아왔어요. 곧 올라올 거예요. 그리고 이건 오늘 배달된 팬레터고요.”
눈을 찡긋하며 안시가 두둑한 편지 다발을 내려놓았다. 고맙다고 끄덕인 태리는 그녀가 문을 나가자마자 만지작대던 것을 던져두고 서둘러 편지부터 살펴보았다.
한 장, 두 장, 세 장. 오전에 온 것만 벌써 세 장이었다.
구시가지 미네 3번가, 호텔 이자리스 221호. 공주님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