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86)


 

18

멋대로 떠벌리는 헛소리 주제에 맞는 것도 있고, 틀린 것도 있는 걸 보니 평범한 돌팔이가 확실했다. 

“그래, 나 그거 싫어. 되게 싫어해. 어쩔 수 없잖아. 죄책감이란 건 혼자 살아남은 대가였거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죄책감이 널 죄수로 만든 것 같은걸. 그 녀석이 너를 이 탑에 가둔 거지!”

흰자위가 반이나 열린 광기 어린 눈으로 점술사는 불길한 소리들을 신나게도 떠들어 댔다.

내용 자체는 어지간히도 창의력 없는 뻘소리였지만 연기력 하나만큼은 몇 수 접고 들어가야 할 만큼 기가 막혔다.

“자, 지금까지 너의 절망적인 현재 상황을 들여다봤으니 이제 원하는 대로 미래를 봐 주마. 과연 그게 좋을진 모르겠지만! 흐흐흐!”

“일부러 그렇게 웃는 거 정말 짜증 난다, 할아범.”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가 있지. 가까운 미래는 두 번째 카드와 연관된다. 어디 한번 보자. 오호? 너무 낙담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왜, 다 잘된대?”

“아니, 이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딱 중립적인 카드야. 네가 노력하는 만큼 얻게 된다는 소리지.”

뭐야, 그게. 그거야말로 이제까지 들었던 해석 중에 제일 비위에 거슬리고 제일 빈정 상하는 소리였다.

하는 만큼 된다니. 그럼 안 되면 다 내 탓이란 소리 아니야. 어디 돈 낸 사람한테 책임을 전가해? 그래 봤자 고작해야 카드 따위가?

아니꼬워서 더는 이 얼렁뚱땅한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했는데 뼈다귀만 남은 노인의 손등이 머나먼 미래를 뜻한다는 마지막 카드를 확 뒤집어 버렸다.

그리고 곧이어 소름 끼치는 불길한 웃음소리가 움막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아하하하! 이 카드를 뒤집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마지막 다섯 번째 카드에는 낫을 든 죽음의 사신이 그려져 있었다. 노인이 한 건지 누가 해 놓은 건지 모를 빨간색의 알 수 없는 낙서까지 끄적여져 있어 한층 더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이빨이 빠져 검은 구멍이 보이는 앞니가 태리의 앞으로 쓱 가까워져 오더니, 마귀처럼 긴 손톱이 그녀의 미간 사이를 톡 짚었다.

“넌 죽을 거다.”

“그래?”

“그래! 넌 죽을 거야! 끝내 죽고 말 거라고! 킬킬킬!”

“굉장히 즐거워 보이네, 점술사.”

손님이 죽을 운명이라니 아주 좋아 죽는다. 께름칙하게 끼룩대는 꼴이 어찌나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지, 솥단지 하나 걸어 놓고 어둠의 주문을 외는 늙은 마법사로는 아주 딱이다. 그래서인지 별로 화도 안 났다.

“암, 운명은 못 바꾸거든! 운명과는 논쟁할 수 없다.”

“어떻게 죽는다는데? 그런 건 안 써 있나?”

“글쎄다. 너는 탑에 갇힌 죄수이니 탑의 간수가 널 끝장내러 오겠지. 내 짐작에는 말이야, 그건 아마 산 마법사이거나 죽은 마법사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 이자리스에선 마법사 놈들이 제일 위험하거든! 호시탐탐 내 목숨을 노리는 것들도 그들이지! 그러니 너도 조심하려무나!”

지나치게 본인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쪽이야 당연히 살아 있는 마법사든 죽어 있는 마법사든 마법사가 제일 겁나겠지만 말이다.

태리가 웃음으로 흘려보내자 점술사는 더 심각한 목소리로 설교했다.

“마을에선 산 놈들을 조심해야 되지만 숲에서는 죽은 놈들을 조심해야 돼. 저 숲속에서 얼마나 많은 마법사들이 죽어 나갔는진 알고 있겠지? 마법사가 한을 품으면 지독한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

“그냥 있어도 힘들어 죽겠는데 죽은 사람 눈치까지 보면서 살아야 되는 거야?”

태리가 하찮아서 내쉬는 한숨을 낙담하는 거라고 여겼는지 점술사가 슬그머니 수상한 솥단지를 꺼냈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내가 개발한 특제 묘약이 있다. 불운을 멀리해 주는 효과가 있으니 가져가는 게 좋아. 너는 불행한 아가씨이니 재룟값만 쳐서 저렴하게 받으마.”

아아, 슬슬 그런 이야기를 꺼내시려고. 익숙하게 이어지는 약장수 발언에 푸근한 눈웃음을 내보이며 대충 시간을 확인했다. 이쯤이면 클로드가 뒷마당에 이어 앞마당에 있는 상추까지도 모조리 다 뽑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탕 뽑는 수법이었구나. 하지만 난 안 사. 그런 걸 사서 액운을 막기엔 첫째로 이미 난 충분히 불행하고 둘째로 할아범이 돌팔이라서 싫어.”

“뭣이?”

노인이 발끈했다.

“내가 돌팔이라니! 누가 그래!”

“신뢰할 만한 남자가. 그 남자 말은 믿어도 되거든.”

그러고는 태리는 자연스럽게 클로드를 떠올렸다.

며칠 전에 그에게 엄마라고 한 번 했다가 엄청나게 혼났는데, 그런 꾸중이 무색하게도 오늘의 그는 자신을 진짜 엄마처럼 돌보고 있었다.

여기에 오려고 했던 건 어떻게 알았던 건지 길목을 먼저 지키고 서선 ‘혼자 다니지 말라니까!’ 하면서 화를 내곤 동행해 줬고, 밖에서 기다리는 김에 텃밭 좀 쑥대밭으로 만들어 주면 안 되냐는 부탁에는 ‘그걸 제가 왜!’ 하면서 성질을 내더니 결과물을 보니 무척이나 열심히 해 주고 있는 모양이다.

감시가 목적이라며 부득부득 뒤따라온 성실함과, 딱 20분만 기다릴 거라더니 30분이 넘어가도 기다리고 있을 다정함, 그리고 뒷마당에 이어 앞마당의 텃밭도 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그의 근면함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그녀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텃밭 테러범.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클로드밖에 없어.’

그러니 넌 아니다, 점술사. 설령 당장 내일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할아범의 화법이 너무 별로야.”

“내 말투가 어때서 그러냐!”

“넌 죽는다.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면 누가 믿어. 사람은 불리한 얘길 들으면 오히려 상대를 사기꾼으로 몰고 싶어지는 법이라고. 그러지 말고 애매모호하게 얘기를 해 봐.”

그녀가 상체를 기울여 뽑았던 카드 다섯 장을 팔꿈치로 지그시 짓누르며 은밀하게도 속삭였다.

“겁도 없이 왕의 열쇠를 갖고 튀었으니 할아범은 오늘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열쇠……?”

“응.”

“여, 여, 여, 열쇠?!”

“응.”

“너, 혹시?”

“물론 마법사지. 아, 살아 있는 마법사야.”

짧은 순간이었지만 긴박한 숨결이 들이쉬고 나가면서 평화로웠던 움막 안은 1초도 되지 않아 폭풍 같은 급물살에 휘말렸다.

노쇠한 몸이라곤 믿기지 않는 순발력으로 물러난 점술사는 품속에서 꺼낸 붉은 카드를 비수처럼 세워 정면으로 튕겼다.

날아오는 카드의 표면에 ‘실명’이라는 단어가 깜빡이는 것을 캐치한 태리는 즉시 테이블을 방패처럼 들어 올려 막았다.

마법의 잔파동이 전해지긴 했지만 대충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라, 테이블을 들어 올린 상태 그대로 어깨를 밀어 점술사를 넘어트리기까지 했다.

“어이쿠!”

마치 태클과 같은 플레이였고 부딪친 덕분에 점술사는 연속 공격을 저지당했다. 최후의 발악인 듯 그가 엎어진 채로 불완전한 속박 마법을 시전했지만 미완성된 마법은 그냥 물리적인 힘으로도 찍어 누를 수 있다.

반경 안으로 도끼를 뽑아 뛰어들면서 태리는 비어 있는 왼팔 하나를 속박의 제물로 내주었다.

덕분에 한쪽 팔밖에 쓸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능숙히 천장에 매달린 램프를 깨트리고 점술사가 엎어져 있는 바로 옆 맨바닥을 찍을 수 있었다.

“으아아악!”

실제로 상해를 입힌 건 아니고 살짝 겁만 준 건데, 노인은 기겁을 하며 도망치려 했다. 그가 버둥대며 일어나는 것을 본 태리는 잽싸게 허술한 무릎을 발로 차 도로 꿇린 뒤, 방패로 썼던 테이블을 밀어 퇴로를 차단시켜 버렸다.

“헉! 이 괴물……!”

“내가 괴물이 아니라, 주문을 외우는 데 시간을 쓰느니 가서 때리는 게 그냥 더 빠를 뿐이야. 마법사가 주먹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는 이유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여야 하는 거 아니냐……?”

“아니지. 난 지팡이를 고집하지 않았잖아? 하지만 당신의 시도는 참 좋았다고 생각해.”

이만한 습격이 언젠가는 닥칠 줄 알고 대비를 하고 살았다는 뜻이겠지. 공격하는 대신 실명과 속박으로 묶으려고 했던 걸 보면, 근처 어딘가에 위급 시 도망갈 퇴로라도 마련해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그 다리로 어디 도망이나 가겠어? 이 움막 대강 봐도 구조가 허약해 보이는데 지지대 하나만 부숴도 금방 무너지겠지? 나야 깔려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지만 그쪽 사정은 또 잘 모르겠네. 뼈가 약할 나이 아닌가.”

그렇게 말하면서 기둥 하나를 발로 툭툭 밀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음새에서 삐걱대는 소음이 울렸다.

“세상에, 저런 썩을 것 같으니라고! 무서운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너는 할미 할배도 없냐! 아이고, 노인네 살려!”

“아까 그랬었지. 도둑놈의 끝은 당연히 비참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당신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그러게 왜 남의 걸 훔쳐?”

“먹고살려고 그랬다! 쫄딱 망해서 돈도 한 푼도 없는데 그럼 어떡하냐!”

“한 번 망한 거 가지고 남의 걸 훔쳐? 그러다가 목이 날아가서 영영 망한 놈이 되어 보려고?”

예상했지만 막다른 길에 다다랐음에도 노인은 곱게 순응하지 않았다.

네가 가난의 설움을 아느냐, 일자리가 날아간 황당함을 아느냐, 눈앞에 금덩이가 보이는데 그럼 챙겨야지 두고 나오냐. 억울함이 절절하게 맺힌 목소리로 호소했다.

흠, 침음을 삼킨 태리는 잠시의 고민 끝에 도끼를 제자리로 회수하고 지저분해진 코트를 툭툭 털었다.

저렇게 억울해해서는 훔쳐 간 물건을 고이 반납하진 않을 것 같았으니. 하지만 그 정도의 문제야 금방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이 당장 그녀의 머리 위에 있었다.

손도끼를 집어넣는 동작에 눈가를 움찔했던 점술사는 뒤이어 베레모를 벗어 던지는 태리의 행동에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두렵고 고귀한, 불길하도록 아름다운 주홍빛 눈동자가 램프가 깨진 어둠 속에도 음침하게 빛났다.

“고, 고, 고, 공주……님?”

“이제 안 억울하지? 내 열쇠 어딨니? 반납해라, 당장.”

* * *

움막을 나와 쥐 떼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텃밭을 꾹꾹 밟아 일정 거리 이상을 벗어났을 무렵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던 태리의 손목을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 불쑥 잡아채 커다란 나무 뒤로 끌고 들어가 숨었다.

“아,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범인은 서리한 당근과 상추를 한가득 안은 채 얼굴에 흙을 묻히고 있는 클로드였다. 무사한 걸 확인하는지 그가 위아래로 빠르게 그녀를 훑어보더니 주변을 휙휙 살피며 재빠르게 속삭였다.

“잘 끝냈습니까?”

“당연하죠. 이거 봐요.”

되찾은 카드 열쇠를 짠 하고 자랑하듯이 보여 주니 클로드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돋았다. 그러더니 표정 관리를 하려는 듯 목을 큼큼 다듬으면서 급하게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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