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86)


 

17

구매한 물건들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클로드의 어깨에 짊어 주며 주인은 뭐 하나를 더 얹어 주었다. 작은 깡통에 심지가 꽂힌 화약 정도로 보였다. 

“많이 사셨으니 이건 덤이요. 어두운 곳에서 쓰면 폭죽처럼 쓸 수 있소.”

“오, 섬광탄 같은 건가요? 적의 눈을 멀게 하는?”

“아니. 그쪽은 모든 물건들이 다 무기로 보이는 것인가. 그냥 불꽃놀이나 할 수 있는 정도요. 남녀가 같이 왔으니 주는 거고.”

“줄 거면 두 개를 줘야지. 사람이 둘인데 왜 하나만 줘.”

“총독은 언제나 봐도 참 싸가지가 없소. 그리고 여자 앞에선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요. 저렇게 무지해서야.”

주인은 클로드를 약간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볼일 끝났으면 얼른 나가라고 내쫓았다.

흔들 때마다 잘강잘강 소리가 나는 게 신기해서 태리와 클로드는 서로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원통을 흔들어 보았다. 모래알이나 작은 공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재미있는 소리가 났다.

“불꽃놀이 해 본 적 있어요? 난 구경은 여러 번 해 봤는데.”

“전 구경도 안 해 봤습니다.”

아직도 조금 삐쳐 있는 건지 대답이 시큰둥했다.

“아, 그러네. 총독이야 당연히 일만 했겠죠. 그 나이에 그 자리에 앉으려면. 아니면 귀찮은 일만 하다가 얼떨결에 영웅이 됐을지도 모르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묘하게 그에게 다 적중하는 표현이라 클로드는 걷던 걸음을 멈춰 섰다. 공주는 자신에 대해 제법 잘 아는 것 같은데 그는 그녀에 대해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다. 그런 기분이 들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공주께서는 왜 구경만 하셨습니까?”

“비슷한 이유죠. 일하느라 놀 시간이 없었어요.”

어린 나이에 프로로 데뷔한 그녀는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게임을 하는 게 직업이면 즐겁지 않겠냐 하겠지만 프로의 세계에 놀이란 건 없는 데다가, 조부모의 눈칫밥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홀로서기를 하려다 보니 애당초 쉼이란 걸 모르고 살아왔다.

수명이 짧은 직업이라는 생각에 더 휴식 없이 매달려 왔고, 재능을 웃도는 노력을 퍼부어 가며 버텨 온 지난날이었다.

덕분에 그만한 보답을 받긴 했다.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게이머가 되었고 돈도 제법 많이 벌었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결국엔 이런 꼴이 날 줄이야.

클로드에게서 자신의 짐을 가져오며 그녀가 손안에 있던 원통을 내밀었다.

“원하지 않는데 사 준 거니까 염치없어도 물건값은 안 갚을래요.”

“받을 생각도 없었습니다.”

“대신 이거 줄게요. 그래도 난 구경이라도 해 봤거든요.”

어차피 그의 돈으로 구입해서 얻은 서비스이니 소유권을 막 주장하기도 좀 그랬던 참이었다.

클로드가 섣불리 받지 못하고 멀뚱거리기만 했다.

“갖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신기해서 궁금했던 것뿐인데요.”

“그게 갖고 싶은 거죠.”

억지로 손안에 넣어서 넘겨주니 가만히 만지작대다가 꼭 쥐어 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순둥한 강아지처럼 보이던지 또 예의 없이 웃어 버릴 뻔했다.

“가져요. 그거 갖고 우리 앞으로 소처럼 열심히 일해 보자고요.”

소처럼? 그 말에 그는 등이 서늘해진 얼굴이었지만 태리는 완벽한 신뢰의 미소를 답례로 보내 주었다.

그가 때때로 나쁘더라도 아주 몹쓸 짓까진 못할 거고, 그런 짓을 하더라도 적어도 함께하는 동안에는 아닐 거라고. 그게 주인공의 설정값이니까.

“그럼 나중에 또 봐요.”

오늘은 이만 여기서 헤어지자고 그녀가 먼저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던 때였다. 힘차게 발을 뗐는데도 왜 안 움직이나 했더니 클로드가 팔꿈치 쪽의 옷 끄트머리를 꾹 붙잡고 있었다.

“왜요?”

“…….”

“뭐 할 말 있어요? 혹시 마음 바뀌었다고 돈 갚으라고 하려는 거면 그 얘긴 이미 다 끝났어요. 사실 나 돈 없어요. 아까 브리짓한테 다 줘 버렸다고요.”

“그런 게 아니라.”

입술을 뗐다가 붙이길 반복하며 심려가 깔린 눈썹을 떨구더니 클로드가 신중한 목소리로 전한 건 의외로 당부의 말이었다.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괜히 무기가 생겼다고 어디 가려고 하지 마시고 호텔에 가만히 계십시오. 일정이 잡히면 모시러 갈 테니.”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요.”

“숲에 혼자 들어가시면 위험합니다.”

아아? 그걸 걱정했던 건가? 혼자 용감하게 몬스터의 소굴로 들어갈까 봐?

난 또 뭐라고. 뭐 엄청나게 심각한 얘기를 하려는 줄 알았다. 그녀가 붙잡힌 옷자락을 빼내며 탈탈 털었다.

“또 그런다, 또. 또 그런 엄마 같은 소리 하려고.”

“엄마……?”

클로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표현이었다. 누가 누구의 엄마……. 그가 이를 꽉 악물었다.

* * *

마나 장벽은 몬스터 범람에 맞서서 마법사들이 기적에 가까운 방어전을 벌였었던 도시의 최전방으로, 현재는 검은숲과 구시가지를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장벽만 지나면 숲의 영역이자 이지를 상실한 몬스터들이 어슬렁거리는 지옥의 구간이라, 이 근처는 사람이 살 만한 장소가 못 되었지만 그럼에도 드문드문 생활하는 자들이 목격되곤 했다.

그들 대부분은 도시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로 어딘가에서 도망을 쳐 왔거나 추격을 피해 숨어 사는 경우였다.

늙은 점술사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왕성의 창고지기였던 그는 숲속의 성이 저주를 받은 틈을 타 몇 개 안 되는 은수저와 함께 성의 보물 창고 열쇠를 빼돌렸다가 그만 추포령이 내려진 죄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움막 뒷마당, 멧돼지가 쓸고 간 것 같은 텃밭의 한가운데에서 욕이란 욕은 다 퍼붓고 있었다.

“이런 씨부럴! 어느 도둑놈이 내 상추를 다 뽑아 간 거야!”

믿을 수가 없었다. 소중히 가꾼 상추와 당근이 모조리 뽑혀서 사라졌다. 그지 똥꾸멍에서 콩나물을 빼 가도 유분수지, 장벽 근처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범죄자의 텃밭 작물을 훔치는 도둑놈은 대체 어느 쳐 죽일 녀석이란 말인가.

골골대는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연신 흙을 파헤쳐 보았지만 씨알 하나 잡히는 것 없이 몽땅 다 털려 버렸다.

“아이고! 이 손모가지를 부러뜨릴 새끼 같으니라고! 처먹고 뒤져라! 먹고 뒤져 버려!”

휑하니 빈 텃밭이 도둑놈의 몸뚱어리도 되는 것처럼 점술사는 턱을 부들부들 떨며 거기에 침을 뱉고, 욕을 퍼붓고, 이끼가 낀 지팡이로 푹푹 찔러 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게 얼마나 괴기스럽고 못 견딜 정도였냐면 움막에서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 내다볼 정도였다.

“누가 할아범 상추를 다 뜯어 갔나 봐. 그럼 못쓰지.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면.”

베레모를 쓴 젊은 아가씨였는데, 장벽 주변에서 무료하게 돌아다니는 걸 발견하곤 싼값에 점이나 보고 가라고 꾀어서 데리고 온 거였다.

근래에 유명 와인 바 대리석에 구멍을 내 놓은 베레모를 쓴 어떤 공주의 소문을 접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장벽 마을. 도시의 소문이 빨리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녀의 허리춤에 걸린 도끼와 홀스터에 꽂힌 총 한 자루만 보고 평범한 사냥꾼이라고 판단한 점술사는 욕을 질겅질겅 씹으며 움막 안으로 들어왔다. 가뜩이나 먹고 살기 힘든데 장사라도 해야 했다.

“부지런히 모으면서 살았나 봐. 이런 곳에 도둑도 들고.”

“어느 처죽일 자식인지 몰라도 남의 것에 손댔으니 먹고 죽게 될 거다!”

“당연히 도둑놈의 말로는 그렇겠지.”

도회적인 얼굴과 다르게 사교적인 여자는 사근사근하니 말도 잘 받아 주었고 말하기도 전에 먼저 은화 한 닢을 꺼내 놓는 센스마저 지니고 있었다.

오호, 오늘 손님은 대어로구만. 불쾌했던 기분일랑 잠시 던져두고 점술사는 흘흘흘 음흉한 웃음을 훔치며 마른 손을 싹싹 비볐다.

“그래, 어떤 점을 보고 가겠나?”

“간단하게 운세나 좀 봐 주지 않겠어?”

“저런 저런, 어린 계집애가 벌써부터 운세 타령을 하는 건 전부 안 좋은 경우뿐이던데. 나야 돈 버는 게 최고니 당연히 거절하지 않을 거지만!”

“그런가?”

태리는 살짝 갸우뚱했지만 따지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사주이니 타로점이니 전에는 일절 궁금해 본 적이 없었다. 딱히 걱정되는 미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변했고 인생이 꽈배기처럼 꼬이고 나니 요즘은 종종 없는 신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

“맞아, 좀 절박해.”

“손님이 그런 마음이라면 좋지. 카드빨이 잘 받거든.”

어디서 나타난 건지 공중에서 수십 개의 카드들이 촤르륵 늘어서며 등장한다. 그냥 탁자에 펼쳐도 될 텐데 마법사 출신이라 그런지 확실히 쇼맨십이 좋았다.

“다섯 장을 뽑아 봐라. 신중해야 될 거…… 어이!”

“다 뽑았어.”

신중히 뽑으라고 했지만 태리는 되는 대로 팔을 뻗어서 손아귀에 잡히는 다섯 장을 한꺼번에 잡아서 던졌다.

불성실한 태도에 점술사는 본인이 잘하는 욕을 대뜸 박아 주려 했으나, 순간 자신을 보고 싱긋 입꼬리를 올리는 여자의 인위적인 미소에 저도 모르게 정수리의 털이 쭈뼛 섰다.

“운세나 읽어, 점술사.”

“어디 새파랗게 어린 것이 명령질인지…….”

괜히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적인 압박에 지지 않으려 애써 구시렁대면서도 점술사의 손은 착실하게 명령에 따라 움직여 첫 번째 카드를 뒤집었다.

“어디 보자. 너는…… 오호라, 현재 탑에 갇힌 달이로군?”

“좋은 건가?”

“그런 멍청한 질문은 하지 마라. 어느 쪽이 구더기인진 이거만 봐선 몰라. 널 가둔 탑이 나쁠 수도 있고, 탑에 수감된 네가 나쁜 녀석일 수도 있지.”

“난 아주 선량한데.”

뭐 이런 뻔뻔한 녀석이 다 있나. 심술맞은 점술사는 괜한 심보에 상의도 없이 곧바로 다음 카드를 깠다. 목이 매달린 남자, 사형수의 그림이었고 그걸 확인하자마자 노인은 손바닥을 치며 깔깔거렸다.

“역시 네가 나쁜 녀석이 맞는 것 같구나. 두 번째 카드는 네 현재의 기대를 보여 주지. 탑을 부수고 싶니? 탑에서 탈출하고 싶니? 그러려면 아주아주 거대한 희생과 시련이 필요할 거야!”

“완전 재수 없는 예언이네.”

“사실인걸!”

입을 삐죽 내민 태리가 어서 다음 카드나 읽으라며 콕콕 세 번째 카드를 찔렀다.

“세 번째는 네가 바라지 않는 일들을 보여 주지.”

“왜 연달아 안 좋은 얘기만 나와? 난 간단히 운세만 듣고 가려고 했는데. 재물운, 건강운, 사업운 이런 거.”

점술사는 먼저 열어 본 두 장의 카드와 세 번째 것을 일직선에 가져다 두고 고심하더니 눈구멍을 과장스럽게 키우며 말했다.

“저런, 저런. 가여워라! 이제 보니 혼자 남는 걸 몹시도 싫어하는 아가씨로구나.”

“아니, 난 솔로 라이프를 즐기는데. 딱히 외롭지 않아.”

“외로움이 싫은 게 아니겠지. 혼자 남았다는 죄책감이 싫은 거 아니니?”

그 지점에서 아주 잠깐, 아주아주 잠깐 태리는 멈칫했었다. 짧은 숨을 들이켰을 정도의 단발적이고 순간적인 찰나의 멈춤이었다.

그리고 곧 매끄럽고 반듯한 미소가 환한 입가에 그려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