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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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신 대로.” 

“내가 숲에서 당장 하고 싶은 건 청소예요. 몬스터 청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드래곤 사냥이죠. 그런데 드래곤은 성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그걸 잡으려면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거의 일생일대의 소원 급이라 직설적으로 토하면서도 진정성은 남부럽지 않게 담긴 고백이었다. 이게 안 되면 집에도 못 가고 이세계에서 미아가 되는 입장인 건 그녀였으니까. 누구라도 감히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하기 어려울 만큼 고백은 진실됐다.

청소? 드래곤? 사냥?

그러니 맞은편에서 그 진정성의 폭격을 후려 맞은 남자는 혼돈과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요동치게 되었다. 그의 눈 속에서 물음표가 붙은 낱말들이 맹렬히 돌아다녔다.

역시 한 번에 다 소화를 시키기에는 사이즈가 큰 얘기겠지. 그의 마음을 고려해서 태리는 잔 안에 있는 와인을 버리고 물을 따라 주었다. 이거 마시고 일단 진정 좀 하라는 의미에서.

주는 대로 단숨에 받아 꿀꺽꿀꺽 삼킨 클로드는 얇은 유리잔을 탕 소리 나도록 내려놓았다.

“확인을 좀 해야겠습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그래요.”

“그 청소라는 게 제가 이해한 뜻이 맞습니까? 학살?”

“학살이라니. 표현이 과하네. 난 그냥 토벌 정도…….”

“그리고 드래곤이라니. 저 숲에, 아니, 성에 드래곤이 있다 이겁니까?”

“맞아요.”

“하…….”

충격이 컸는지 클로드는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도 묻지 못하고 이마만 짚고 있었다.

망치로 2연타, 3연타를 와다다 맞은 그의 얼굴이 조금 가엽게도 느껴졌지만 태리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그것이 진실임을 거듭 강조했다. 어차피 그는 차후 드래곤 슬레이어가 될 운명, 먼저 맞는 매가 덜 아플 것이다.

“혹시 숲에서 드래곤 본 적 있어요? 흔적이나 소문이라도.”

클로드는 그게 지금 말이냐 될 것 같냐는 듯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아니요, 없습니다. 봤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고 죽었으면 소문도 남지 않겠죠. 혹시라도 드래곤이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면 그건 숲의 멸망을 예고하는 거니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죽어야죠.”

“그렇구나. 아직인가 보네.”

“아직인가, 라고요?”

클로드는 기가 막혀서 돌아 버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태리는 줄곧 품어 왔던 생각에 슬슬 시동을 걸었다.

주인공이 제아무리 무적이라고 해도 게임에는 단계라는 게 있기 때문에 당장에 모든 어려움들을 헤쳐 나갈 순 없다. 그를 가로막는 역경들은 종국에는 사라지겠지만 당장은 쉽지 않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먼저 한 차례 게임을 돌려 본 자신이 옆에서 도와준다면 어떨까. 그를 단숨에 1층에서부터 저 꼭대기로까지 뛰어 올려 줄 수 있지 않을까?

‘불가능하지 않잖아.’

속전속결의 엔딩.

그녀는 한 가지의 완벽한 가능성을 점쳤다.

“전부는 아니지만 저주에 대한 내막을 조금은 알아요.”

탐스러운 미끼를 던지자 예상대로 그의 눈빛이 단번에 번뜩이는 것이 포착됐다.

“발로란은 정의의 여신인 아가사를 숭배하는 기사의 나라죠. 그래서 총독이 가진 성검도 아가사의 검이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신에게 의지하지 않아요. 우린 공학과 마나의 법칙에 삶을 기대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중받는 신이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이자리스에도 신으로 대접받는 존재가 하나 있어요. 바벨이라고.”

“진리의 신 바벨.”

어음, 바벨이 진리의 신이었구만? 몰랐던 지식을 잽싸게 주워 먹으면서도 태리는 고개를 끄덕여 자연스럽게 아는 척 말을 이었다.

“검은숲의 저주는 그 바벨이 내린 거예요. 이자리스 왕이 신의 금기를 침범해서 재앙이 내렸다는 얘기 들어 봤죠? 그건 바벨의 금기예요. 그리고 드래곤은―”

“바벨 신의 상징이죠.”

“그럼 성 안에 왜 드래곤이 남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갔을 거라고 생각해요. 드래곤이야말로 숲에서 쓰러트려야 할 최후의 마수이고 신이 남긴 저주의 표식 그 자체죠.”

이 모든 이야기는 마지막 보스인 드래곤과의 혈투에서 드래곤이 직접 자기 입으로 나불거린 대사에서 유추한 내용이었다.

태리는 문제의 그 용을 잡다가 수도 없이 죽어 봤고, 다시 태어나 새롭게 도전할 때마다 항상 똑같은 대사를 들었다.

보스전이 있는 방에 들어가면 웬 책을 읽고 있는 어린 소년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 아이가 먼저 경고를 한다, 기사여 물러서라고.

거기서 그래도 무시하고 가겠다는 선택지를 택하면 소년이 순식간에 거대한 몸집의 용으로 변하면서 포효를 하는데 거기서 ‘감히 전지전능한 나의 친구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대사를 들을 수 있었다.

앞서서 깔린 다른 무수한 떡밥들과 연결하면 더 정확한 해석이 가능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스토리보단 전투에 더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게이머라 당장 던질 수 있는 미끼는 여기까지였다. 그래도 이걸 가지고 클로드와 거래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용을 죽이지 못하면 저주는 영원히 끝나고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용 사냥 없이 숲의 정상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요.”

예전의 평화로운 모습을 복원하려면 숲의 생태계를 원래대로 돌려놔야 된다. 말하면서도 상당히 그럴싸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랑 같이…… 용 잡으러 안 갈래요?”

들려주는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 상태로 빠져 있었던 클로드는 태리의 제안에 또 한 차례 주먹으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손가락을 꼼지락대면서 수줍게 망설이길래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나 했더니, 용을 잡으러 가잔다. 분위기는 딱 데이트 신청인데 말하는 내용은 ‘어이어이, 거기 친구. 나랑 같이 지옥 구경 안 갈래?’였다.

일일이 황당해하는 것도 기력이 빠져서 대꾸를 못 했는데, 세상 태평한 공주는 남의 머리 위에서 폭탄을 터트려 놓곤 손이 미끄러지는 건지 눈앞에서 빵에 발라 먹을 잼 뚜껑을 열지 못해서 낑낑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저런 것도 못 따면서 어디에 뭘 잡으러 가자는 거야.’

달라는 말도 없이 무작정 병을 뺏어서 한 번에 팍 까 줬더니 오! 하면서 작은 환호와 함께 박수를 쳐 준다. 그런 반응에 자동적으로 우쭐해지는 자신이 싫어서 클로드는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향해 으르렁댔다.

미친놈아, 좋아하지 말라고. 지금 뭘 처좋아하고 있는 거야.

그의 불친절한 친절을 받은 그녀가 활짝 갠 얼굴로 채근했다.

“생각 좀 해 봤어요?”

“했을 거 같습니까.”

“해 봐요, 좀.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요.”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이미 후회 중인데요.”

“계획을 들어 보면―”

“하지 마십시오. 안 들을 거니까.”

“아아, 그러지 말고. 부탁이에요.”

부탁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다 되는 줄 아나.

지글지글 끓는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한 번만, 하면서 검지손가락을 세워 흔드는 통에 힘을 준 눈빛이 살짝 풀리고야 말았다. 저런 황당무계한 소리는 상대를 해 줘선 안 되는 건데 공주는 그가 약해진 틈을 타 재빨리 자기 할 말을 뱉어 버렸다.

“계획은 간단해요. 성의 숨겨진 뒷구멍으로 급습해서 용의 머리를 깬다. 우리가 거기로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모를걸요?”

당신이란 여자는 정말이지…….

“무식하고 해괴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길뿐이에요. 뒷구멍이 어딘지는 내가 알고요. 이 계획의 핵심은 속도에 있어요. 물론 드래곤을 잡는 일이니까 초가삼간 다 태워 먹을 각오정돈 해야겠지만요. 어때요?”

“어떻냐니요. 말하신 대로 무식하고 해괴합니다. 설마 제가 그런 파괴적인 계획에 동의를 할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대가를 지불한다면요? 섭섭지 않게 보수한다면 동의하지 않을까요?”

“안 합니다, 절대.”

내가 왜 말할 기회를 줘서는. 이건 기회를 준 자신의 잘못이다. 공주에겐 죄가 없다. 그녀의 태생이 어쩔 수 없이 환상을 추구하는 마법사란 걸 잊어선 안 되었던 건데. 천생 기사인 그는 꿈과 현실을 명확히 구분하는 편이었다.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몬스터 청소부터 도와줘요. 그럼 진짜로 원하는 걸 넘겨줄게요.”

됐다는데도 굴하지 않고 제안하는 것이, 자신감만으로는 혼자서도 능히 드래곤의 대가리를 깰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걸 준다고? 클로드가 작게 코웃음 쳤다.

“제가 원하는 게 뭔 줄 알고.”

“몰락해 가는 왕국이지만 이곳에는 영토와 지위가 있죠. 아까 보니까 총독을 소공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던데, 그건 부모로부터 얻은 호칭이죠? 하지만 내가 넘겨주는 걸 받으면 부모보다 더 높은 직위를 얻을 수도 있을 거예요.”

“……!”

“이자리스를 지배해 온 소네티가는 천 년을 이어 온 왕가이고 그 이름에는 전통과 명예가 담겨 있어요. 그러니 당연히 이 땅을 갖게 되는 주인도 거기에 걸맞은 권력을 쥐게 될 수밖에 없죠.”

“무슨…… 말씀이신지.”

“넘길게요. 땅도, 왕위도. 그쪽의 황제가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완전하고 독립적인 소유권이죠. 이게 당신이 원하는 거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가로막고 싶었지만 입이 얼어서 움직이지가 않는다. 공주가 넘기겠다고 하는 물건의 가치도 놀라웠고 그가 원하는 것이 정확히 그것이라는 걸 짚어 낸 점도 충격적이었다.

“지금은 솔직히 칼 든 강도 수준이잖아요. 게다가 총독의 권위란 건 황제에게 위임받은 힘일 뿐이고.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 아니에요? 난 그런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걸 당신이 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한 번 소리 내 본 적도, 누구에게 제대로 드러내 본 적도 없는 열망인데. 손안이 무형의 욕망으로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참…… 엄청난 거래를 제안해 오시는군요.”

말이 띄엄띄엄 나온 건 심장에서부터 폭발할 정도로 퍼지는 열기 때문이었다. 공주가 건넨 의뢰에 클로드의 가슴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뜯어먹으려고 했는데 먹지 말고 손을 잡아야 하나.

열기에 달아오른 붉은 입술이 보기 좋게 올라갔다.

“그걸 제게 다 주시겠다고요. 떨릴 틈도 없이 좋은데요.”

“거짓말 아니니까 부담 없이 설레면 돼요.”

웃기지 마라. 내가 설렐 것 같냐, 라고 다짐했지만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맑은 얼굴에 주홍빛 별이 박힌 눈가가 반달로 접히는 것을 본 순간 뺨이 확 달아올랐다.

그 숨김없는 미소가 묻고 있었다. ‘너, 이래도 나랑 같이 안 갈래?’라고.

‘젠장, 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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