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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그런데.”
“왜요?”
“머무시는 호텔의 음식은 입에 좀 맞으십니까? 거기, 소문이 좋지 않던데요.”
“아, 난 예민한 편이 아니라서 그럭저럭 먹을 만해요. 남한테 권할 정도는 못 되지만. 그때는 손님맞이가 서툴러서 미안했어요.”
“괜찮습니다.”
“그 초콜릿은 별로예요?”
“예, 제 입맛에는.”
“여긴 잘 오지 않나 봐요. 유명한 곳이라던데.”
“술을 입에 대지 않으니 올 이유가 없습니다. 더 정확히는 이곳을 즐기는 사람들과 성향이 안 맞습니다.”
저 지긋지긋한 귀족 놈들.
수도에 있던 시절부터 클로드는 귀족들 사이에서, 특히 남자들 사이에서 온갖 부정적인 평가를 한 몸에 받아 왔었다.
술이나 놀음을 일절 즐기지 않고 음담패설을 할 줄 모르며 즐겨 찾는 매춘부 하나도 없는 재미없는 기사라고.
신이 축복한 영웅에 푸른 피를 가진 고위 황족이면 대체 뭘 하냐며, 여가 시간이 날 때마다 햇빛 아래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그를 향해 남자들이 얼마나 한심한 눈초리로 쯧쯧거렸는지 모른다.
그럴 때면 저걸 다 쥐어패 버릴까 심각한 고민에 빠지곤 했었는데 가문의 명성을 고려해서 어렵게 참아 온 인생이었다.
그런데도 망할 귀족들은 여기까지 와서도 끊임없이 그를 찾아와 ‘놀자고’ 하고 있었다. 싫다는데도 굳이.
급격하게 갑갑함을 느낀 그가 앞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저도 모르게 불만을 토로했다.
“여기 오는 인간들은 저만 보면 놀 줄 모른다고 혀를 차는데 그럴 때마다 혀를 뽑아 버리고 싶습니다. 대체 남자가 뭘 어떻게 해야 잘 노는 겁니까? 술 대신 차를 즐기는 남자는 매력이 없습니까?”
“어? 차 좋아해요?”
“……예.”
짜증이 치밀어서 주절주절 나불대다가 역으로 질문하니 눈길을 쓱 피하며 뚱하니 대답하는 모습이란.
새침데기 고양이도 아니고, 솔직히 귀여워서 웃음이 터질 뻔한 걸 태리는 허벅지를 꼬집으며 간신히 참아 냈다.
더러는 혹시 차를 좋아해서 브리짓이 보낸 독마저 덥석 삼켰나 싶기도 했고.
“어떤 차 좋아하는데요?”
“그냥…… 홍차 정도입니다.”
어떤 걸 좋아하느냐고 콕 집어 물으니 약간 쑥스러워하는 기색까지 느껴진다.
태리는 좋은 취미를 가졌다고 새침해진 그를 아낌없이 두둔했고, 클로드는 겸양을 떨며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엄지를 치켜세울 때마다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고 눈가에 화색이 도는 게 보였다.
이런 시대에, 그 정도 되는 지위에 오른 남자가 스캔들도 하나 없이 깔끔하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냐 하겠지만, 아니. 절대로 아니다.
태리는 다른 건 몰라도 그의 사생활이 백조처럼 깨끗하고 완벽하다는 점만은 백 프로 신뢰했다.
‘그래서 고자라는 소문이 났었구나.’
이건 좀 많이 안타깝네.
주인공은 그저 주인공답게 건전한 취미 생활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밖의 멍청이들이 달라붙어서 음주가무를 하자고 지독히도 권유해 대니 당연히 성가시고 짜증이 날 수밖에.
이것도 주인공의 운명을 타고난 시련이라면 시련이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아무리 봐도 내 취미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요?”
그가 너무 성숙하고 어른스러워서 태리는 자신의 여가 생활을 까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휴일에는 이불 빨래해서 말리고 배달 음식 시켜 먹은 다음에 종일 낮잠 자요. 예쁜데 불필요한 것들 수시로 사들이고.”
“…….”
“내가 재밌는데 상관없잖아요.”
내가 재밌다는데 뭔 상관인지?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별로 신경 안 쓴다.
넌 이 세계에서 서열 0위이니 굳이 저 밖의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그들의 이해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태리는 클로드의 손등을 톡톡 다독이듯이 쳐 줬다. 들어오기 전에 브리짓의 등을 위로하던 그 박자 그대로.
편안히 손길을 받던 클로드는 불현듯 그 점을 깨달았는지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공주님께선 어째서 여기에 오신 겁니까? 편한 장소가 되기 어렵다는 건 이미 알고 계셨을 텐데요. 혹시 처음부터 계획을 하셨던 건―”
“그런 건 아니고 나는 그냥 뭘 좀 해 볼까 해서요.”
그 말에 느긋했던 클로드의 인상이 굳었다.
뭔가를 한다? 왜.
그냥 있지, 왜.
가만히 있지, 대체 왜.
그는 진심으로 공주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와는 도저히 싸우고 싶은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갑자기 찾아야 될 사람이 생겼거든요. 브리짓이 여기 같이 와 주면 그 사람 찾는 걸 도와준다고 해서.”
역시 그 더러운 여자의 농간이었나. 오길 잘했다. 클로드는 먹던 밥도 내던지고 와인 바로 쳐들어온 자신의 선택을 격하게 칭찬했다.
“찾는 자가 누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자리스 사람이에요. 예전에 성의 창고 관리인이었거든요. 직업은 점성술사라고 하더라고요.”
점술사? 이자리스인? 클로드는 즉시 머릿속을 파헤쳤다. 그에게 올라오는 수많은 보고 중에 그 두 개의 단어가 섞인 소문만을 골라내니 제법 쓸 만한 정보를 솎아 낼 수 있었다.
“일전에 장벽 근처에서 여행자들의 점을 봐 준다는 늙은 점술사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찾으신다는 사람이 어쩌면 그자일지도 모르겠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눈빛에 클로드는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그자의 점술이 맞은 적이 거의 없다고 하니까요.”
“그럼 돌팔이 아니에요?”
“돌팔이죠. 그런데도 손님을 끌어들이고 장사를 계속 했다는 건 그자가 점성술이 아닌 다른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다른 힘이라면 마법?”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발상은 못 해 봤네.”
신박한 접근이지만 주인공이니까 왠지 신뢰가 가는 제보다.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혜택이 보장된 인생을 사는 주인공이니 웬만한 점술사보다도 더 적중률이 높을지도.
장벽 근처의 돌팔이라, 태리는 짧은 힌트를 귓속에 저장해 두었다.
“그런 돌팔이는 왜 찾으십니까?”
“그 사람이 가져간 창고 열쇠가 필요하거든요. 동시에 단죄도 좀 해 주고요. 훔친 물건으로 배불리 먹고 사는 고약한 인간을 그냥 방생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잡아서 처벌을 하겠다는 건가. 클로드는 다시 마음이 찜찜해졌다.
물론 복수를 하겠다고 하면 그건 당연히 그녀의 일이긴 했다.
대게 복수는 대의와 관련 없는 사사로운 일이지만 누가 하냐에 따라 공정성을 띠기도 하니까. 죄인의 심판은 지도자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였고 정당성을 가진 공주가 본인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과정이 될 수도 있었다.
후……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런 거면 곤란한데.
불안감의 수위가 꿈틀거리는 찰나 그녀가 그 불안의 중심에 정확한 방점을 찍었다.
“열쇠를 받아서 꼭 안에 들어가야 돼요.”
“어디를? 숲에?”
“아니, 성에.”
머릿속에 핑 하고 실선이 지나갔다.
“폐성에, 말입니까?”
“네, 성의 창고라고 했잖아요.”
저주의 발원지이자 격전지였던 이자리스의 옛 왕성. 공주에겐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일지 모르지만 클로드에게는 살상력 높은 몬스터가 포진하고 있는 고도의 위험 지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
거길 들어간다고? 그 저주받은 폐성에 간다고?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클로드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누구도 예외 없이 폐성은 출입 금지입니다.”
안 그래도 그 근처에서 아른아른 느껴지는 스산한 기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참인데.
순찰을 나가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유독 폐성 주변에서만 심상찮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노련한 사냥꾼들이 길을 잃는다거나, 정갈하게 찍힌 어린애의 발자국을 발견했다거나, 혹은 믿을 수 없게도 엘프 같은 고대의 존재들이 출몰하기도 하고.
그런데 어딜 들어간다고 지금. 결연한 목소리가 빠르게 쏟아져 나왔다.
“성 주변에는 위험도 1급의 마수들이 대거 서식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뚫는 것도 무리고 운 좋게 입구로 통하는 틈을 파고든다 해도 결국은 길을 잃고 배회하게 됩니다. 그렇게 실종된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운 좋게 순찰대에 발견되어 마을로 복귀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 전에 몬스터를 만나 죽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 식으로 건져 오게 되는 시체가 한두 구가 아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폐성 주변으로는 접근해선 안 된다. 단호하게 말하는 그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가는 길목을 모두 폐쇄하고 제가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긴다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처벌을 내리고 있습니다. 기사단의 권한이 제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상당히 오만한 발언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조차도 각오하고 한 말이었다.
정색한 얼굴에 서늘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노라니 공주는 입술을 모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조용히 입을 뗐을 땐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호소력 짙어져 있었다.
“그래도 난 들어가고 싶어요.”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은 고집이었지만 그걸 듣고도 화가 나지 않았던 건 그녀가 단순히 떼를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억지를 부리거나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클로드는 이와 같은 목소리를 여러 번 접한 적이 있었다.
근엄한 사제들과 숭고한 의지를 다짐하는 기사들의 맹세에서.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총독을 곤란하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왜 예민하게 구는지도 알고 있고요. 한 나라를 한순간에 황폐화시킨 참화이니 당연히 모든 접근은 신중해야겠죠.”
“그렇게 잘 아시니 제가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폐성 출입은 안 됩니다.”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차단막부터 치는 클로드의 태도에 태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미래를 알고 있어도 사건의 진행을 촉진시키는 건 역시나 쉽지 않았다. 게임의 진행력을 가지고 있는 이 클로드를 동료로 꼬여 내야 하는 데 이게 제일 난관이었다.
‘아, 난 빨리 집에 돌아가야 된다고!’
이대로 가만히 흘러가는 대로 손 놓고 기다리면 결말까지는 아마 한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그녀는 본래의 세상에서 할 일도 많고 이뤄 놓은 것도 많은 몸이었다.
어떻게든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 머리를 잡고 끄응 하던 태리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힘을 실은 직구를 던졌다.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