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는 이거 먹고 싶다. 블루레이디.”
태리는 당도가 제일 높다고 표시된 샴페인을 짚었다.
한 잔 정도는 사 주고 일을 시켜 먹을 줄 알았는데 웬걸 브리짓이 단칼에 쳐 내며 따끔하게 꾸짖었다.
“무슨 소리야? 제일 싼 거 시켜야지. 괜히 이놈들 배 불려 줄 일 있어? 우린 지금 이 집 장사 망치러 온 거야. 그걸 잊으면 안 된다고.”
“그래도 기왕이면 먹는 거는 맛있는 걸로―”
“벌써 네 역할을 잊은 거야? 넌 오늘 여기 날 지원해 주러 온 거야. 놀러 온 게 아니라!”
“아아, 알았어, 알았어.”
거참 깐깐하네.
모자만 벗으면 바로 정체와 신분을 발표하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한 잔은 여유롭게 때리고 시작하려고 했는데 주문은 가장 저렴한 것 두 잔으로 들어갔다.
맛없는 술이 나오길 기다리며 둘이서 조용히 전략을 짤 때였다.
가슴팍에 공작 깃털을 꽂은 귀부인이 치마를 살랑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태리에게는 처음 보는 얼굴이네, 하는 정도로 지나쳤고 브리짓에게는 눈인사와 함께 살뜰한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에요, 브리짓 양. 이곳엔 영영 발길을 끊은 줄 알았는데요.”
각설탕 껍질을 뽀시락대며 까던 브리짓은 ‘아, 뭐야 시부레’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접고는 그 말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귀부인은 구김살 없이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도망갔던 공주가 돌아왔다던데…… 혹시 만나 봤나요? 브리짓 양은 그래도 그쪽에 연줄이 있잖아요. 공주는 어떤 성격이에요? 어후, 난 좀 과격한 사람이면 어쩌나 걱정이 든달까요. 그 미치광이 마법사의 딸이라니까.”
어쩐지 말을 거하게 씹혔는데도 비위 좋게 안 떠난다 했더니 궁금한 게 있어서였던 듯했다.
브리짓이 여전히 무반응이자 부인은 좀 더 과장된 목소리 톤을 섞어 그녀를 구슬리려고 애썼다.
“내가 살짝 주워들었는데 브리짓 양이 어렸을 때 그 공주랑 성에서 같이 자란 사이라면서요. 어쩜, 그런 무책임한 사람의 시녀로 들어가선.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겠어요.”
흠, 이런 게 소위 말하는 멕인다는 건가?
심지어 지금은 그 공주 본인이 옆에 동석하기도 한 상황이니 일타쌍피로 들어간 공격이 아닐 수 없다.
“이봐요.”
껍질을 다 까 하얀 설탕 덩어리를 컵 안에 떨어트린 브리짓이 마침내 무거운 입을 뗐다.
“네, 브리짓 양.”
“왜 갑자기 친한 척이에요, 속 보이게.”
“네, 네……?”
“평소엔 내가 인사해도 무시했었잖아요. 이런 게 뭐 그런 건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러다가 죽어요. 내가 뭘 줄 줄 알고 막 삼킨대?”
그러면서 심드렁한 말투와는 달리 광선 레이저 빔이 나오는 눈빛을 마구잡이로 쏘아 대는데 부인은 놀라서 황급히 도망을 갔다.
지켜보던 태리는 당연히 그보다 더 놀라서 팔뚝을 찰싹 때렸다.
“넌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면 어떡해?”
“저 여자, 마녀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떠들고 다니던 인간이거든?”
“그건 그냥 마법사가 무서워서 그런 거 아니야?”
“알 게 뭐야? 갑자기 와서 들이대면 내가 옛날 일은 다 잊고 같이 호호거려 줄 줄 아나? 어디서 저런 근본도 없는 용기를 낸 건지 어이가 없다고. 용기로 머리를 찍어 버려야 돼, 아주.”
단단히 벼르고 온 브리짓은 거창하게도 선포했다. 오늘의 자신은 물면 반드시 짖을 거라고.
눈 깔고 조용히 벽에 붙어서 다닌 건 이제까지 충분히 했으니까 이만 진정성 있는 사람이 될 거라나 뭐라나.
“이제 너 있으니까 무서운 것도 없어.”
그 말에 태리는 기습적으로 감정이 살짝 동요할 뻔했다.
실상이야 마구 써먹을 방패막이가 생겼으니 이제 너 믿고 인생 좀 막살겠다는 뜻이었지만 왜인지 그것조차도 좀 짠하게 느껴져서.
태풍과도 같은 대란 속에서도 굳건히 버텨 낸 친구이고 힘든 시기는 이제 다 지나갔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보니 그녀는 아직도 무언가를 견뎌 내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일상 속에서도 여전히 상처투성이인 걸 보면.
“저 부인이 완전히 틀린 말만 하고 간 건 아니네.”
“뭐가?”
“힘들었을 거라는 말.”
“난 끝난 일에는 신경 안 써.”
“그래도 힘들었던 건 사실일 거 아니야. 수고했어. 진심이야.”
진짜 잘 커서 진화를 한 건 사실 내가 아니라 너 아니야? 씩씩하고 당당하고. 웃음기를 담아 말하자 브리짓이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조금 도와준 거 가지고 뭘 그렇게 멀리까지 나가?”
모두 까기 인형처럼 그녀는 여전히 태리에게도 송곳니를 드러냈다.
너 또한 내 미움을 받아야 할 입장이며 그런 너는 까도 내가 깐다고.
그 정당한 비난이 유쾌하기도 하고 또 때마침 나온 칵테일의 색깔이 예쁘기도 해서, 태리는 어떠한 전조도 없이 그 순간 모자를 벗어 내렸다.
눌려 있던 머리를 풀어 주듯 손가락을 집어넣고 살랑살랑 털자 검은 머리가 짙은 금발로 변하면서 조명에 부딪쳐 화려한 빛을 난사했다.
동시에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오렌지 빛 홍채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 이거 약간 마법 소녀 변신하는 느낌이라서 자꾸 하면 중독되겠는데.
코앞에서 제일 먼저 그 변화를 목격한 바텐더의 입이 벌어지며 첫 번째 경악이 터져 나왔다.
“허억, 소네티다……!”
그가 쏘아 올린 신호탄은 삽시간에 공중으로 퍼져 나갔다.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한순간에 얼음왕국처럼 얼어붙으며 숨소리 하나 들리는 법 없이 모든 동작이 경직된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에게 이자리스의 공주란 건 최고 악당과 비슷한 위치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태리는 이걸 어쩔까, 하다가 이 살얼음 같은 분위기를 굳이 풀어 주지는 않기로 결심했다.
저들에겐 마법사에 대한 통상적인 공포가 있고 그 심리를 적절히 이용해 먹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어떠한 말도 없이 홀짝대며 잔만 기울이고 있으려니, 아무것도 못 하고 눈동자만 굴리던 사람들은 한참 뒤에야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굳어 있는 몸들을 풀었다.
그리고 잠시 후엔 전보다 더 과장된 웃음과 호사스러운 몸가짐들을 보이며 애써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행동하려 애썼다.
효과가 직통으로 나타나자 브리짓이 희열에 찬 얼굴로 잘했다는 제스처를 보내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곤 재빠르게 속삭였다.
“또 온다. 이번엔 떼로 오고 있어. 혼자는 겁나나 보네.”
그런 용맹함과 비열함을 동시에 가진 이들이 과연 누구일까 했더니, 창가에서 책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던 한 신사 무리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혹시 이자리스의 왕녀님이 맞으십니까?”
각오했던 것에 비해 시작은 정중해서 태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응수했다.
그러자 곧바로 세상에, 오오, 신이시여 같은 사교계식 감탄사가 뒤따랐고 개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왕녀님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음.”
“이곳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 고맙네.”
짧고 굵은 하대. 거만함과 자연스러움을 넘나드는 말투.
순간적으로 남자가 멈칫하는 게 보였지만 태리는 빙그레 웃는 표정으로 ‘왜, 나 너한테 반말해도 되는 사람 아니니?’라는 확고한 위치를 고수했다.
이런 게 공주 짓이지 않을까 싶었다.
내 앞에서 ‘감히’라는 말이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것. 너희들의 어떠한 무례도 용납되지 않는 존재라는 걸 각인시켜 주는 것.
당황했던 남자 역시 ‘아, 그렇지. 왕녀니까.’ 하고 뒤늦게 깨닫는 것 같더니 손등 키스를 청하려다가 도로 물렸다.
“경애를 표하고 싶지만 엄연히 부군이 계실 테니 접촉이 꺼려지실 수도 있겠군요. 인사는 약식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부군이면 남편을 말하는 건가?
남편 같은 건 있지도 않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총독은 그런 말 없이 잘만 하던데.”
그거 원래 해서는 안 되는 거였나. 미안하지만 너희 세계의 예의범절에 대해선 내가 깜깜이라.
이번에는 순수하게 궁금한 걸 물어보듯이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사람들은 그냥 그 말 자체가 충격적이었는지 눈알이 사방에서 날아들며 파바박 박혔다.
“그 고…… 아니, 총독님이요? 하하, 아마도 총독께선 공주님이 미혼이신 걸 짐작하고 계셨나 보군요.”
글쎄, 어제의 클로드는 그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하고 행동한 걸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누구의 방식이 옳은 건지 긴가민가할 무렵 문득 남자의 얼굴에서 희미한 비웃음이 스치는 것이 목격됐다. 그걸 좋지 않은 신호로 인식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바로 주먹이 날아왔다.
“충분히 혼기가 차신 줄로 아는데 아직 혼처도 반려도 없으시다니……. 이해는 합니다만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뭘 이해해서 뭐가 안타깝다는 건지.
아무리 현대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다지만 남자의 공격은 지나치게 옛날 방식이었다.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여성을 상대하기 위해 고른 게 고작 그런 구닥다리라니.
적당한 나이가 되도록 ‘아직 결혼도 하지 못한 문제 있는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박아 두고 시작하고 싶은 모양인데 솔직히 같잖지도 않았다.
“말하는 게 꼭 내 돌아가신 할아버님의 할아버님 같군. 시야를 좀 열어 보게. 세상이 변했으니 많이 배워야 될 거야.”
하지만 놈은 더 깔보듯이 되물었다.
“교제 상대는 있으신 겁니까?”
“남자를 만나 봤냐고 묻는 거라면 적당히 만나 봤는데. 오래도 만나 봤고. 한 5년 정도…….”
“5년? 그런데도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신 겁니까?”
아, 진짜 그놈의 결혼 얘기 지겨워 죽겠다고 받아치려는 순간 그가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무리에게 중얼거리는 입 모양을 보았다.
딱 네 글자.
찝찝하게.
쟤가 지금 뭐라고 지껄인 거야? 밉다 밉다 하니까 온갖 미운 짓을 총망라하려는 건가?
저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여러 가지 보복을 떠올리는데,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브리짓이 번개처럼 튀어 올랐다.
“찝찝하긴 뭘 찝찝해? 한 사람을 오래 만나서 찝찝하면 하루마다 애인을 갈아 치우면 그건 괜찮나?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여자를 평가하려는 게 아주 졸렬하기 짝이 없네.”
“뭐라? 저런 정신 나간!”
물면 짖겠다는 각오 그대로 브리짓은 예의도, 격식도 모조리 벗어던지고 맹렬하게 돌진했다.
그러더니 감동적이게도 우리 공주님이라며 강하게 보호까지 하고 나섰다.
“닥쳐 애송아. 우리 공주님 모욕한 거 당장 머리 박고 사과해! 안 그러면 침이라도 뱉어서 악당이 정의 구현하는 모습을 보여 줄 테니까.”
브리짓의 시속 100km에 가까운 급발진에 경악했었던 태리는 그 한마디에 마음을 바꿔 진심으로 감탄했다.
얘는 이런 상황에서 그런 재밌는 얘길 하면 어쩌자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