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86)

9

“아아―” 

어휴, 무슨 소린가 했네. 목석같은 인간에게 별걸 다 기대할 뻔했다는 식으로 제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공주 만나 보셨댔죠? 제가 교대 근무만 없었어도 따라갔을 텐데……. 무슨 말을 하던가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느냐고. 클로드는 거칠고 강렬했던 테이블보의 감촉을 되새김질하며 턱을 매만졌다.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나?”

“예?”

“말해 봐. 내가 좋은 사람이냐.”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지. 하지만 제드는 진솔한 태도로 성심성의껏 답했다.

“대장은 그냥 훌륭한 사람이죠.”

“좋은 사람이냐고 물었잖아.”

“글쎄요.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아닌 것 같네요.”

“그래, 기분 나쁘지만 그게 맞는 소리지. 난 좋은 사람 아니야. 평소에도 그렇지만 여기선 더더욱 그럴 거고. 근데 공주는 나더러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더군.”

“에에?”

“그러니까 서로 도우면서 잘 지내 보자고.”

“제정신이랍니까?”

“정신이 나갔다고 우기기엔 참새처럼 또박또박 말을 잘하는 공주였어. 이름까지 친근하게 부르길래 순식간에 사는 곳도 따였고.”

“아니, 그걸 왜 당하고만 있었어요!”

당했나? 그래, 그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묻는 말에 꼬박꼬박 답변해 주고, 제 탓이긴 했지만 침울해 보이는 얼굴을 허겁지겁 달래 주었으며 시킨 대로 젖은 옷도 닦았다.

그러고 보니 은근히 상대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만만치 않다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날 꺼리지 않는 건 둘째치더라도 무서워한다는 느낌조차도 없었다. 낯선 남자에다가 적국의 총사령관인데 말이야.”

“무서워했을지 아닐지 어떻게 압니까? 괜히 의연한 척 했을지도요.”

“아니, 그녀는 확실히 자신이 있어 보였어.”

어떤 자신이냐면 상대를 이길 자신. 원한다면 눈앞에 있는 누구라도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

당시엔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런 공주의 태도에 내심 당황했었는지 모른다. 보통은 그가 가진 강건한 분위기에 눌리는 일이 태반이니까.

“이제까지 어디에서 뭘 하고 살았는지 알았으면 좋겠는데. 그 공주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필요해.”

알아볼 수 있는 건 다 알아 오라는 지시였는데, 제드는 그런 클로드의 반응이 과하다고 느꼈다.

“예민하게 굴 필요 있습니까? 지금 상태에서 공주가 뭘 할 수 있다고요. 그것보단 쓸데없이 난리를 피울 마법사들이나 단속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그냥 그 공주에게 동원 가능한 모든 인력을 집중시켜.”

그녀는 단순히 심상치 않음을 넘어 범상치가 않았다. 그리고 살면서 그런 기분이 들 때는 신중히 행동하는 게 좋았다.

“지금의 저희는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전력인데요.”

“우린 아직 마법사들과 제대로 싸워 본 적이 없다.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몰라.”

선천적으로 마력을 보유한 민족은 평범한 인간들로 가득 찬 제국에게는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암흑의 존재라느니, 악마의 하수인이라느니. 제국 내에서 그들의 악명이 끝 간 데 없이 높아진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누명을 씌우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뒤집어?’

마법사가 잡아먹으러 온다고 하면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할 수 있다고 했던 게 고작 몇 년 전인데, 이젠 발톱 부러진 야수가 되었으니 별거 아닐 거라니.

클로드는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 기사들이나 그의 욕심 많은 고모님을 생각하면 황당하다 못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남의 땅을 먹고 싶으면 상대를 깔보지 않는 적당한 염치 정돈 있어야지. 어떻게 이렇게들 쉽게 생각할까?

그의 직감이 예고하는데 마법사들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귀환한 공주, 그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고.

“어쨌거나 우리가 먼저 깃발을 꽂았잖습니까?”

“주인이 없었다면 말이 되지. 하지만 주인 돌아왔던데. 다들 어디 가서 죽은 게 분명하다고 했지만 멀쩡하게 살아 있었고. 알 수 없는 성격과 그보다 더 가늠하기 어려운 힘을 가지고 있지. 그냥 알아. 보면 안다고.”

그렇다면 이제 다음에 벌어질 일은 뻔하다.

정상적인 절차대로 공주는 당연히 자신의 재산을 돌려 달라고 할 것이다. 통치권도, 세수권도, 행정권도, 국방권도 전부 다. 원래 그녀의 것이고 그게 옳았다.

“말도 안 됩니다. 폐하로부터 섭정을 위임받은 건 대장이라고요.”

“정말 띨띨하구나, 제드. 제국의 황제라 해도 타국의 후계권에 간섭할 권한은 없다. 여긴 발로란이 아니라 이자리스니까.”

“아니, 좀!”

누가 지금 그걸 몰라서 그러나.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거고 땅따먹기에서 모든 일이 도덕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도덕과 기사도를 중시하는 고결한 발로란이라 할지라도.

“우리 대장 맞습니까? 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클로드는 대꾸하지 않고 창가에 기대서 칼이나 휘휘 돌리더니 자신의 황제를 생각하며 가소로운 웃음을 지었다.

“죽은 줄 알았던 공주가 돌아온 건 앞으로의 계획을 송두리째 박살 내는 변수지. 이건 다 폐하의 과욕이 부른 불행이다. 그렇게 넓은 영토를 누리시고도 여기까지 탐냈으니 벌을 받는 거지. 그런 걸 보면 역시 신은 공정하단 말이야.”

정말 이 인간은 무엄하다. 무엄하고 예의도 없다.

당장 사죄하라며 제드가 눈에 힘을 주고 노려봤지만 클로드는 그걸 지나가는 개보다도 더 하찮게 취급했다.

“지금부터 공주가 어디에 있는지, 뭘 하는지, 누구와 있는지 빠짐없이 내 귀에 들리도록 해라. 그만두라고 명령할 때까지.”

“아니, 지금 지고하신 황제 폐하를 욕보이고 그런 공주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왜, 난 그 공주가 제일 중요한데. 그거 말고 딴생각은 아예 안 해.”

그리고 그의 솔직하고 강직한 발언은 오해를 사기 충분해서, 부하의 눈을 바짝 선 세모꼴로 만들었다.

“솔직히 말씀해 주시죠.”

“뭘.”

“혹시요.”

“혹시 뭘.”

“첫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건 아, 아니죠?”

“뭐?”

“진짜 반하고 뭐 그래서 이러는 거 아니죠? 사람들 말이 공주가 예쁘긴 엄청 예쁘다고 그래서……. 그, 그렇게까지 예쁩니까? 딴생각도 못 하고 하루 종일 그 사람만 생각할 정도로?”

뭘 어떻게 연결하면 그런 결론이 나는 건데. 클로드는 기가 찬 한숨을 내뱉으며 면박을 주려 했다.

내가 언제 하루 종일 공주 생각만 했다고…… 어, 그러네?

그리고 그 잠깐의 지체가, 그 순간의 표정 전환이 제드를 오해의 늪으로 빨아들였다.

왜 대답을 못 하시죠? 왜죠?

그가 절망적으로, 하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되물었다.

“하아, 진짜 그 정도로 예뻤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대장, 전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아주 위험한 겁니다. 그건 독이 든 사랑입니다. 게다가 상대는 적국의 공주입니다. 이건 금지된 사랑이라고요!”

새빨간 사과일수록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노파처럼 제드는 한껏 흥분된 억양으로 내질렀다.

쾅쾅쾅!

클로드는 더 해명해 보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다급한 노크 소리가 끼어들면서 다른 놈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총독님! 전보 보고드립니다!”

전보의 색깔은 준긴급을 의미하는 노란색.

그리고 현재 클로드가 준긴급 사항에 올려놓은 것은 ‘이자리스의 공주’에 관한 일뿐이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성검을 책상에 던져두고 그가 손을 까닥였다.

발신지는 호텔 부근에서 순찰을 도는 경비대로, 아침 일찍 어떤 마차가 호텔에서 일찌감치 출발했다고 적혀 있었다.

“여기에 공주가 탄 게 확실한 건가.”

“정황상 그런 것 같습니다. 지배인이 직접 마차를 부르고 보내는 모습을 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높겠군.”

탐색전이라도 하고 시작할 줄 알았더니 공주는 24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바로 행동에 돌입했다. 이쪽은 아직 어떠한 대비책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나머지 글자들을 빠르게 눈으로 흡수하니 마차가 다리를 건너는 것까지는 확인을 했다고 적혀 있었다.

호텔에서 다리를 건넜다면…….

“여기로 오고 있다는 소리인데.”

여기에는 왜…….

“날 보러?”

무심결에 나온 생각이었지만 주소를 뜯긴 입장으로선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추론이었는데, 그걸 들어 버린 제드는 또 한 번 경악에 휩싸였다.

공주가 자길 찾아온다고 생각하고 싶을 정도라니. 저 정도면 완전히 뿅 간 거 아닌가!

다행히 급보를 들고 온 부관이 사실을 정정해 주었다.

“제 생각이지만 목적지는 아마도 와인 바나 찻집일 것 같습니다.”

“와인 바? 찻집?”

두 군데 모두 곧바로 스치는 장소가 있어서 클로드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둘 다 끔찍한 장소였다.

일단 와인 바.

제국식 살롱을 표방하는 그따위 사교 장소는 클로드에겐 할 일 없는 족속들이 단체로 모여 앉아서 우글거리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기 모인 한가한 녀석들은 틈만 나면 그에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같이 식사하자, 어디 놀러 가자 하며 성가시게 굴었다.

그럴 때마다 질색하며 간섭하지 말라고 일축했지만 인간들의 치댐이란 건 끝을 몰라서 그 앞으론 웬만해선 지나가지도 않는 중이었다.

그리고 찻집. 찻집은…….

“왜.”

“예?”

“왜냐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아, 그게요.”

“그냥 말해. 그냥 말해도 어차피 나 거기 둘 다 안 좋아하니까.”

“그게, 그 마차 주인이 누구일지 짐작이 가서 말입니다. 단장님께는 별로 달갑지 않은 사람인데…….”

지배인이 직접 챙겼다는 말에서 얻은 단서라며 부관이 눈치를 보다가 토설했다.

“그 왜, 있잖습니까. 왱알왱알거리는.”

“왱알왱…… 이런 망할.”

그래, 접점을 생각하면 무리한 조합은 아니긴 했다.

그런데 동행인이 그런 수준이면 좀 곤란하지.

좀 많이, 곤란하고말고.

벌떡 일어난 클로드는 그길로 곧장 외투를 챙겨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대장?! 밥은요! 검은요!”

주인에게 버려진 검과 음식을 보며 제드가 아이고, 아이고 하며 한탄했다.

“진짜 첫눈에 훅 갔네, 훅 갔어. 밥도 안 먹고 성검도 던지고 갔어!”

* * *

“여기 장사가 왜 잘 되는지 알 것 같은데.”

와인 바에 들어서자마자 태리가 한 말이었다.

신시가지 최고의 핫 플레이스란 이곳.

이제 막 점심을 넘어선 시점임에도 술집에는 식후주를 마시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자신을 한껏 가꾼 사람들이 사치스러운 조명 아래에서 잔을 들고 자유롭게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누구 약 올려? 빨리 따라오기나 해.”

눈빛으로 으르렁대던 브리짓은 구경에 여념 없는 태리의 팔꿈치를 잡고 바텐더가 칵테일을 섞고 있는 깊숙한 자리까지 파고들었다.

스쳐 지나갈 때 가끔 힐끗거리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베레모에 걸린 변장 마법 덕에 그녀가 공주일 거라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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