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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리는 이제 점점 더 앞을 가늠하기가 어려워졌다. 대체 게임의 뒷골목에 숨겨진 설정들이 얼마나 더 많이 묻혀 있는 건지.
그녀가 아는 클로드의 정보는 그가 제국에서 추앙받는 전쟁의 영웅이며, 황제의 친조카이자 공작이 끔찍이도 아끼는 늦둥이 아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아직 그의 젊은 어깨에는 아무것도 얹어지지 않았지만 곧 이자리스의 왕관마저도 얹히게 될 것이란 것까지.
그런데 여기선 그냥 성욕제거남인 것이다.
이게 무슨…….
“사내놈이 잘생겼으면 얼굴값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그 얼굴에 그 몸에 고자가 뭐야? 그건 재앙이지, 재앙.”
태리는 차마 내가 게임을 해 봐서 아는데 그런 얘긴 없었다, 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식으로 클로드의 편을 들었다.
“그거는…… 사실이 아닐 거야. 그런 성욕이 제거된……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증거도 없구.”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걔랑 자 봤어?”
하지만 도저히 필터링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브리짓의 입담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백 명이 백 번씩 찍어도 안 넘어오길래 혹시 이성 취향이 아닌 거냐고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물어도 봤어. 그랬더니 뭐, 자긴 그냥 여자에 관심이 없다나?”
이미 알 만큼 다 알아봤다면서 브리짓이 침을 튀기며 열변했다.
“술은 입에도 안 대서 자빠트리는 방법도 못 썼고 말이지.”
무서운 소릴 참 숨 쉬듯이 잘도 한다. 실행 미수에 그친 그것은 범죄이며 남성에게도 인권이란 게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싶었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보다 더 앞섰다.
“그러더니 그 후부터는 나만 보면 왱알왱알이래! 말 많고 끈질기다고. 재수 없는 놈이 혓바닥도 재앙이야.”
그런 놈은 평생 혼자 살다가 쓸쓸하게 늙어 죽어야 한다고 그녀가 살벌한 저주를 퍼부었다.
“그렇게 질이 나빠 보이진 않았는데…….”
하지만 태리는 여전히 클로드를 두둔해 주고 싶었다.
미연시도 아닌 전통 RPG 게임에서 주인공이 연애를 한다는 설정이 있을 턱이 없잖은가. 그럴 시간에 몬스터 한 마리라도 더 잡는 게 옳은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클로드만이 자신을 이곳에서 탈출시킬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니 이 이상한 추문만은 벗겨 주고 싶었다.
“숫기가 없어서 그럴 거야. 어제 잠깐 얘기해 봤는데 자기 입으로도 살갑지 못한 성격인 거 이해해 달라고 했거든.”
“하, 그걸 내가 왜 이해해야 하는데? 살갑지 못한 건 자기 사정이지. 나도 천성은 불친절한 사람인데 차 팔 때는 억지로 친절한 척한다고.”
“그래도 세상에는 나와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많으니까―”
“또라이도 성격으로 쳐줘야 돼?”
“다양성을―”
“예사 또라이가 아닌데 그걸 어떻게 다양성으로 퉁치는데?”
“너 정말 왱알왱알이 맞구나.”
얼마나 쌓인 화가 많았으면 브리짓은 심지어 발까지 구르며 분해했다.
남의 나라를 꿀꺽 삼키려고 온 주제에 콧대 높고 잘난 척하는 자식은 언제고 기회만 오면 쓱싹해 버려야 된다고.
“이대로 두면 여긴 그놈 세상이 돼. 내 고향 우리 땅을 그런 고자가 가져간다고. 내가 그 꼴을 볼 줄 알아? 걘 내 성공의 최대 걸림돌이야. 아, 물론 너도 똑같지만 넌 2등이야. 걔가 1등이야.”
그런 순위는 굳이 매겨 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 죽여도 두 번째로 죽여 준다니 고맙다.”
“언젠가 그놈이 살해당하거든 범인 찾아다닐 필요 없어. 내가 한 짓이라고 발가벗고 춤추면서 자수할 테니까.”
과장이 담기긴 했지만 클로드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마법사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태리는 당혹스러워졌다.
보통 주인공이라는 건 버프를 먹고 편애받는 포지션인데.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거야?’
주인공의 지지율이 이렇게까지 바닥이라니.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엔딩 보고 탈출하냐고.’
게임의 엔딩은 저주를 끝낸 클로드가 이자리스의 새 왕이 되는 것으로 완성이 된다.
하지만 현재 그의 지지율은 바닥을 뚫은 지하층. 거기에 지역감정도 깊고 선망도 없는 상황. 결말까지 가는 길이 첩첩산중으로 다가왔다.
“그럼 우리끼리라도 구시가지 재건 사업을 해 보면 어때?”
태리는 우선 급한 대로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을 해, 그를 물밑에서 보조해 보기로 했다.
“마냥 그쪽에 불평불만 늘어놓으면서 기다리는 것보단 그게 더 낫지 않을까 해서. 근본적으로 여긴 우리 땅이기도 하고.”
“무슨 수로?”
“성 안에 돈 될 만한 거 남지 않았어?”
폐성이라고 불리는 검은숲 안에 자리한 옛 왕성. 거기라면 대대로 보관해 온 막대한 보물 같은 게 있을 것이다.
상속인이 되어 봤자 현실에 가지고 가지도 못하는 돈, 기꺼이 뿌려 주자고 마음먹었다.
“폐성 안에? 뭐, 있기야 잔뜩 있겠지.”
“거기부터 탈탈 털어먹자.”
“근데 창고 열쇠가 없잖아.”
“열쇠?”
무슨 열쇠를 말하는 건지 물으니 브리짓은 ‘보물 창고 말이야, 몰라?’ 하고 반문해서 가슴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창고 관리인이었던 점성술사 부부가 있었잖아. 아내는 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지만 남편은 살아 나왔거든. 욕심이 아주 많은 작자였지. 열쇠는 그 남편이 가져갔어. 정확히는 어떤 카드지만.”
이후의 얘기는 듣지 않아도 술술 예상이 갔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갖고 튀었구나.”
“못 참지, 그런 건.”
“그걸 그냥 놔뒀어?”
“잡아서 뭐 해? 어차피 이젠 아무도 성에 못 들어가. 성이야말로 저주의 진원지였으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들의 소굴이 되었단 말씀. 열쇠 같은 거 있어 봤자 무용지물이야.”
즉, 쫓아가서 주머니를 뒤져 봤자 헛수고란 소리였다.
그럼에도 태리의 의견은 변하지 않았다.
“그 남편 지금 어디 있어?”
“왜?”
“돈 찾으러 간다니까.”
“어차피 성엔 못 들어간다니까 그러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성이 폐쇄되어 버린 건 브리짓이 설명한 그대로다.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허접한 실력으로는 못 가는 구역이고 연계 퀘스트를 계속 깨 나가야만 후반부에 입성의 방법과 지름길을 겨우 얻게 된다.
성 안에 있는 마지막 관문, 왕가의 서고에 최종 보스인 드래곤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건 오히려 호재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클로드를 데리고 갈 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어차피 보스를 잡아야만 끝나는 게임. 클로드를 함께 데리고 가 그가 드래곤을 일찍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면 보물도 얻고 빠른 엔딩도 맞이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마법사들에게도 좋고 주인공에게도 좋으며 태리 본인에게는 최상의 결과물인 모두가 행복한 완벽 플랜이었다.
“어딜 가야 그 남편 만날 수 있는지 알아, 몰라?”
“흐음, 알면? 이제 와서 그딴 도둑놈 찾아서 뭐 해?”
“잔당 처리는 원래 후계자의 몫이거든.”
“재밌네. 이제 와서 공주로서의 의무를 다하시겠다? 너무 뒷북치는 거 아냐?”
“뒷북이라도 찢어지게 치면 좋은 일 아닐까?”
브리짓의 지적한 ‘의무’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건 안시의 따뜻한 포옹과 마치와 릴리의 응원.
그리고 마을에 들어왔을 때 한달음에 달려와 눈물로 맞아 주었던 이들의 울먹거리는 얼굴이었다.
또한 너를 기억하고 있다는 말에 기뻐서 흔쾌히 마차에 태워 준 브리짓 너까지.
태리는 이들에게 공주다운 뭔가를 해 줄 자격이 없었다.
왜. 나는 공주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보물을 되찾아 주는 일 정도는. 그 정도의 책임감은.
“네 말대로 내가 이제 와서 공주랍시고 해 줄 수 있는 건 별것 없어. 고작해야 귀찮아서 놔둔 그런 잔당 처리뿐이고. 그런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난 나한텐 그런 짓을 해야 할 의무가 있고 넌 그런 보상이라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변변찮겠지만 이런 것으로라도 그들의 피로감과 지난 아픔에 위로가 된다면 보탬이 되고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말해. 어디 있어?”
브리짓은 입에 풀이 붙은 것처럼 한참을 말없이 쳐다보더니 꿍쳐 놓은 걸 뱉듯이 툭 말을 던졌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몰라.”
“그럼 됐고. 알아서 찾아볼 테니까.”
“아니, 잠깐만! 지금은, 이라고 했잖아, 지금은! 예전엔 어디 있었는지 알았단 소리지!”
“예전엔 어디 있었는데?”
“말해 주는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서로 하나씩 원하는 거 교환해.”
이건 또 무슨 조건부람.
태리는 일말의 고려도 없이 거절했다. 최신 정보도 아닌 단서라면 굳이 브리짓한테 들을 필요가 없었다.
“도움 못 된다는 말 돌려서 하네.”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한번 들어나 봐. 응?”
“좋아. 듣기만 해 볼게. 무슨 부탁인데?”
판을 깔아 주니 브리짓은 냅다 달려와서 왱알왱알 속사포로 떠들었다. ‘아까 얘기했던 거기, 신시가지에 와인 바 말이야∼’ 하면서.
“사실 거긴 단순한 와인 바가 아니라 지금 제일 잘나가는 사교장이거든. 한 가닥쯤은 하는 인간들이 빈번하게 드나들어서 발로란 귀족들에겐 완전 핫 플레이스란 말이야.”
“그런데?”
“거기 가서 깽판을 칠 계획인데 나랑 동행해 줘. 그게 내 조건이야.”
……뭐?
“다시 한번 말해 줄래?”
“거기 가서 귀족 놈들에게 똥물을 부어 주고 싶다고.”
“……미쳤니?”
부탁이라는 게 남의 영업장에서 행패를 부려서 영업 방해를 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한몫 거들어라?
가관도 보통 가관이아니었다.
“예사 또라이가 아닌 건 너 아니니.”
“별거 없어. 너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던 거 있잖아. 신분! 가서 그 신분으로 공주 짓 좀 해 줘. 나도 공주 후광 좀 입어 보자고. 공주가 공주 짓 하는 걸 지들이 어쩌겠어.”
나 참, 하다 하다 이젠 공주 후광 받아서 횡포 좀 부려 보자는 말을 다 듣게 된다.
친구라더니 그 친구가 요구하는 수준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공주 퇴물 된 지 오래됐거든?”
“아직 아냐. 아직은 네 신분발이 먹힌다고. 넌 그 싸가지들을 적절히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의 사람이야. 어차피 평판도 망했으니까 상관없잖아.”
지금 그걸 위로라고 왱알왱알대는 건가. 저 왱알이 입을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