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86)

6

어깨를 들썩이며 약간의 흥분마저도 보이던 브리짓은 부채를 접고 태리의 손목을 덥석 움켜잡더니 그대로 마차 안으로 끌고 올라갔다. 

“좋아, 같이 갈게. 근처 한 바퀴만 구경시켜 주면 되는 거지?”

“또 버릇없이!”

안시가 기겁한 얼굴로 나무랐지만 정작 당사자는 친군데 뭐 어때? 라는 태도였다.

“공주님은 약재상의 거리까지 가시는 길이다. 무사히 데려다드리고 올 때도 모시고 오도록 해.”

“으, 그런 꼬장꼬장한 노인네들 가득한 곳엔 뭐 하러 가?”

싫다느니, 확 납치해서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 버릴 거라느니 투정을 부리지만 안시의 엄격한 눈길에 기가 죽었다.

조카를 단단히 교육시킨 안시가 태리의 양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철이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아이는 아닙니다. 잘 모셔다드릴 테니 조심히 다녀오세요.”

“내가 너무 여러 사람한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아니요. 공주님께서 무엇을 하신대도 그건 절대로 폐가 아니에요.”

단호한 애정으로 입막음을 한 안시는 헤어지기 전 다시 한번 태리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자신감을 잃지도, 주눅이 들지도 말라면서.

태리는 한참을 머뭇대다가 조심스레 마주 안았다.

* * *

조금만 비켜 앉으면 될 텐데 바로 맞은편에 앉은 탓에 브리짓의 뾰족한 구두코가 계속해서 옷에 부딪힌다.

그냥 내가 옮기고 말지. 태리가 엉덩이를 옆으로 들썩였을 때였다.

마차의 움직임에 따라 까닥이던 구두가 갑자기 쭉 뻗어지더니 이동하려던 그녀의 다리를 가로막았다.

“예쁘게 잘 컸네, 공주님. 분위기도 차분해진 게 뭔가 확실히 강해진 게 느껴진달까? 어디서 진화라도 해서 돌아온 거야?”

다리를 가로막고 얼굴을 지척까지 들이민 브리짓이 입가를 찢으며 말했다.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 구경이라도 하듯이.

“이런 건 부담스럽거든.”

손으로 밀어 내니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팔짱을 끼는 태도나, 부채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는 소리가 마냥 곱지만은 않았다.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우리가 이렇게 좁은 공간에 마주 앉아서 간다니. 옛날의 난 네 시녀 중에서도 겨우 꼴찌에나 달라붙어 있었거든. 아, 공주님이 내 이름을 아시기나 할까? 하면서 네가 머리 빗는 모습을 구경했었는데.”

태리는 대강 입가만 올려서 화답했다. 옛날 일이야 모르겠고 지금 걸치고 있는 복장으로만 본다면 그런 묘사는 오히려 브리짓에게나 더 적합할 것 같았다.

“근데 약재상의 거리엔 왜 가? 뭘 사려고? 심심해서? 아니면…… 주인이 돌아왔으니까 ‘다시 모여라 깃발 아래로’ 하면서 불놀이라도 하게?”

얘 좀 봐라. 태리는 무표정으로 응시하다가 그녀에게 가장 치명적일 만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너 자꾸 그렇게 말 못되게 하면 너희 이모한테 다 이를 거야.”

“뭐? 이, 치사하게.”

엄포를 놓은 게 효과가 있었는지 브리짓이 입을 삐죽이며 이죽거렸다.

“웃겨, 진짜. 내가 뭐 아직도 네 수발이나 들던 배동인 줄 알아? 난 이제 이 지역의 유지라고. 함부로 대하면 너만 손해일걸.”

지역 유지? 그렇게 안 봤는데 얘가 여기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가?

그러고 보니 저 풍성한 드레스가 신경이 쓰이긴 했다. 마법사라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외양이었으니까.

보통 마법사들은 본인의 정체성과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스스로가 마법사임을 감추는 짓은 하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로브를 벗는 일 따위도 없다.

그런데 브리짓의 경우에는 마법사인지도 전혀 몰랐을뿐더러 누가 봐도 발로란식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저런 차림새는 발로란 귀족들이 모여 사는 신시가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옷이다.

‘이자리스 출신의 마법사가 발로란의 드레스를 입었다라.’

돌연변이 정도가 아니라 거의 변절자 수준인데. 하기야 그녀가 운영하는 수상한 찻집도 신시가지에 있기는 했지만…….

“넌 이쪽에 안 살지?”

여러 가지 가정 끝에 질문했는데 브리짓은 흔쾌히 긍정했다.

“그럼. 난 강 건너 신시가지에 살아. 거기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그러면서 부채 끝으로 창밖을 가리켰는데, 폭이 적당한 너비의 강 위에 사람들이 오가는 아치교가 보였다.

저기를 넘어가면 신시가지. 건물 양식도 발로란식이고 사는 사람들의 대다수도 발로란의 제국민들인. 어제 클로드가 적어 준 공관도 저곳에 있었다.

그러니 그곳에서 타국의 옷을 입고 지역 유지가 되었다는 친구의 말을 무엇으로 해석해야 할지. 태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마법사들은 그런 곳엔 발 들이지 않는 줄로 알았는데.”

“이게 또 무슨 구질구질한 노인네 같은 소리래?”

좁혀진 미간을 부채로 톡톡 쳐 주며 브리짓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상이 변했으면 사람도 변해야지. 구시가지는 부서진 후에 제대로 재건되지도 않았어. 더럽고 불편하고 위험하단 소리지. 그런 데서 고집 피우며 눌러산다고 예전의 영광이 돌아오니?”

폐허라는 단어에서 감이 안 오냐며 그녀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그런 고리타분한 관념을 가지고선 절대로 발로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들과 싸우려면 그들의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면서.

“난 적의 심장부에서 사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제일 현명한 거지. 거기서 사교계 퀸이 될 거라고.”

그렇다면 변절자가 아니라 모던걸 쪽이었던 건가. 태리는 마음속으로 조금 오해했던 것을 사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금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래.”

“정말로?”

“적과 싸우려면 적에 대해 잘 알긴 해야지. 승률이 올라가잖아.”

순순히 인정해 줄 줄은 몰랐던 건지 표정이 묘해진 브리짓은 다시금 강 건너를 바라보며 묻지도 않은 것들을 먼저 이야기했다.

“너 신시가지에 가 봤어?”

“응. 아, 아니. 아니, 아니. 안 가 봤어. 안 가 봤는데.”

“가 봐. 여기완 완전히 다른 세상이야. 깨끗하고 풍요롭고 즐거워. 발로란의 기사들이 저 강에 다리를 놓고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지. 덕분에 이곳은 보기 좋게 방치됐어.”

“수도에서 온 발로란의 귀족들이 그렇게나 많아?”

“그럼, 아주 잔뜩 몰려오고 있지. 이주해 오거나 관광을 오거나. 걔들는 우리의 불행을 오락으로 소비하고 싶어 하거든. 그러면서 은근히 뭉쳐서 세력을 만드는 게…… 뭐, 본격적으로 이 땅을 자기들 영토로 편입시키려는 의도 아니겠어?”

수상한 약이나 파는 의사인 줄 알았던 캐릭터는 의외로 정세에 관한 눈썰미가 빠삭했다.

의외의 면모인데. 태리는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그건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야?”

“주동자는 이오리아겠지.”

이오리아. 발로란의 황제이자 대륙을 호령하는 여제의 이름을 그녀는 서슴없이도 불렀다.

“하지만 결국 이득을 보게 되는 건 다른 놈일 거야. 시간이 지나고 모든 게 안정화되면 이곳의 새 주인은 그가 될 테니까.”

“클로드를 말하는 거지?”

“그래, 그 고자 새끼.”

고자……?

순간적으로 분노 게이지가 확 올라간 것 같다고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부터 브리짓은 인정사정없이 클로드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교활한 곰탱이 같은 자식! 우리가 그놈을 참아 주고 있는 건 당장은 군대의 보호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기 때문이지, 절대로 예뻐서가 아니야!”

“통치를 인정하진 않겠다는 거지?”

“통치? 통치? 야, 개소리 하지 말라고 해!”

버럭 성질을 낸 브리짓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클로드와 그의 기사단이 해 주는 일은 검은숲의 방어선을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일뿐이라고 했다.

영주라기보다는 국경 수비대 같은 일이었고 그녀는 그걸 ‘기사 따위가.’ 혹은 ‘기사 나부랭이가 그렇지 뭐.’라는 말로 폄하했다.

“그놈은 겉으론 난 성기사고 재물 같은 것엔 관심 없다고 내숭을 떨지만 말이야.”

“그건 아니지. 전 돈에 관심 없어요. 그런 말 하는 사람은 경계해야 돼. 그런 사람은 돈에 미친 사람이더라고.”

“좋아, 공주. 말이 통하는데.”

그동안 쌓인 화가 많았는지 브리짓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격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불만들을 털어놓았다.

가령 수도 귀족들이 얼마나 그녀를 촌뜨기라고 무시하는지, 그녀가 차린 찻집에는 파리만 날리는데 빌어먹을 건너편의 와인 바에는 얼마나 인간들이 밀려드는지.

또 클로드란 녀석이 얼마나 재수가 없는지에 대하여.

“내 찻집은 그런 멍청한 와인 바와는 달라. 거기서 난 집회도 열고 만찬도 갖고 기금도 모을 거라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저항의 장소가 될 거란 말이야. 그런데 망할 것들 때문에 장사가 안 되잖아!”

악귀처럼 희번덕해진 눈을 보니 어째서 한때 사교계의 퀸을 노렸던 여인이 미래에 역병의사의 길로 접어드는지 알 것도 같다.

‘음, 캐릭터가 이런 루트를 타면 흑화 되는 거구나.’

이런 식으로 불만이 누적되면 나쁜 길로 빠지기 쉽겠지.

태리가 그래그래, 하면서 다독이자 그녀는 자신의 신세가 얼마나 억울한지 모를 거라며 한탄했다.

“내 인생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어. 숲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을 때 애들은 도망가라고 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어. 난 말이야, 후방에 남아서 끝까지 사람들을 보조했다고! 내 힐링 포션의 성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으음,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약을 팔았어. 그 귀한 재능으로…….

“그러니 내 공적이 얼마나 높았겠어? 사태가 진정되고 났을 때 난 아주 하늘을 펄펄 날았다고.”

“축하한다.”

“그렇게 내 세상이 됐으면 잘 끝날 일이었는데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빌어먹을 자식의 군대가 여기에 들어왔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게 클로드란 소리잖아.”

“그래, 그 고자가!”

왜 아까부터 자꾸 고자, 고자 하는 건지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브리짓이 허망하게 끝난 자신의 삼일천하에 대해 불을 뿜고 있어서 끼어들 틈이 없었다.

“쫓아내려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어. 뇌물도 줘 봤고, 암살도 해 보려고 했고, 오죽하면 꼬셔 보려고 유혹도 해 봤어! 그런데 안 통해. 그 미친놈. 여자 만나지 말고 평생 혼자 살라고 해.”

표현과 억양이 보통 드센 게 아니다.

‘그렇게까지 철벽이었니?’라고 물어봤지만 브리짓은 그가 한 건 감히 철벽의 수준에도 이를 수 없다고 했다.

“그냥 말을 안 해. 상대를 아예 안 한다고.”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이유는 무슨 이유야. 그놈이 들이대는 여자들 투명 인간 취급하는 걸로 얼마나 유명한지 알아? 수도에선 성욕제거남이라고 불렸대. 하도 여자한테 관심이 없어서!”

성욕…… 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