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86)

5

* * *

호텔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이었다.

기계적으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장을 열어 본 태리는 정확히 딱 하룻밤 만에 터져 나갈 정도로 꽉꽉 채워진 옷장을 확인하고 할 말을 잃었다.

색깔별로 걸린 원피스와 그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로브와 망토.

마법사의 상징인 고깔모자부터 시작해서 알 수 없는 조류의 깃털 장식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모자들이 늘어선 유리함들…….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그것들을 수레와 옷걸이에 채워 넣은 두 명의 소녀, 릴리와 마치가 어서 입어 보라는 듯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어 그러니까, 정말 너무너무 고마……워?”

“별말씀을요!”

“최고다. 다들 능력자구나.”

요술봉이라도 휘두른 건가. 태리는 순수한 감탄으로 엄지를 치켜들었고 소녀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너무 좋아한 나머지 사방팔방으로 빛으로 빚어낸 꽃을 퍼트릴 정도로.

우와, 신기해.

열 살 남짓해 보이는 꼬마들이라도 확실히 마법사는 마법사다.

태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녀들이 선보이는 장난을 따라 해 보았고 곧잘 되었는지 방 안에는 은은한 향기가 났다.

드디어 방구석에서부터 입고 왔던 꼬질꼬질한 파자마 원피스를 벗어 던질 수 있는 시간이 왔다.

도를 넘은 애정으로 가득 차오른 옷장 앞에서 태리는 그나마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무난한 흰색 블라우스와 적당히 긴 치마를 빼냈다.

때마침 트롤리에 아침 식사를 올려 밀고 들어온 지배인 안시가 그것을 보곤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왜 다들 내가 옷 갈아입는 걸 구경하러 온 것 같은 기분이지?’

챙겨 주는 건 고맙지만 이게 이렇게까지 구경꾼이 북적거릴 정도로 대단한 이벤트였던가. 공주님 옷 갈아입히기 놀이 같은 거?

“저기, 미안한데 다들 잠깐만 뒤돌아 주지 않을래?”

어차피 나갈 생각들은 추호도 없는 것 같으니 시선 회피 정도만을 부탁했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건 손보다 빠른 스피드.

허물을 벗듯 걸치고 있던 것들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포근한 냄새가 나는 새 옷으로 탈바꿈했다.

돌아갈 때를 대비해 낡은 잠옷을 침대 밑에 잽싸게 발로 밀어 넣은 뒤, 처음부터 눈여겨보았던 회색빛의 트렌치코트를 조심스레 외출복으로 끄집어냈다.

“이것도 입어도 될까?”

“당연하죠, 공주님! 부족한 게 있으면 더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호텔 문짝을 떼어 팔아서라도 원하시는 건 다…….”

“아냐, 아냐! 부족한 건 없어, 정말로. 문짝은 그냥 놔둬.”

당장에라도 실행할 것 같은 의욕 넘치는 목소리들이라 태리는 코트 안으로 잽싸게 팔을 껴 넣고 단추를 잠근 뒤 벨트까지 꼭 조여 여몄다.

자신은 이걸로도 충분하며 얼마든지 단벌 신사로도 잘 살 수 있다는 진심 어린 각오를 보여 주기 위해.

거기에 고깔모자는 부담스러워서 짙은 색의 베레모를 푹 눌러썼다.

주변인들의 눈동자는 그 즉시 초롱초롱하게 변한다.

다가와서 쓰담쓰담해 보고 싶은데 억지로들 참고 있는 게 보여서 어색하게 팔을 벌리며 말했다.

“만지고 싶으면…… 와서 만져도 되는데.”

“어머.”

그 말에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안시였다.

음식을 덜어 세팅하고 있던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동한 건지 순식간에 다가와 감싸듯이 태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새끼 강아지를 품듯 가슴에 안고 뺨을 비볐다.

그걸 신호로 마치와 릴리도 연달아 양팔을 벌려 그녀를 폭, 폭 끌어안았다.

아니, 만지라는 소리가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하지만 여러 사람이 만든 감옥 속에서도 태리는 버둥거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전해지는 체온과 살뜰한 접촉만으로도 이들이 얼마나 공주를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 수 있어서.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코끝이 찡해지려 했다.

“저희는 공주님께서 돌아오셔서 너무 기뻐요.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래, 내가 기다리던 그 사람과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 몰랐어요. 떠나보낼 때 영영 헤어진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것도 그래, 원래대로라면 그렇지…….

조건 없이 무한으로 쏟아져 내리는 그리움과 애정 앞에 태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클로드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또한 그날의 생존자다. 자신을 위해, 아니 공주를 위해 저주의 한가운데에 남았던 사람들.

뱉지 못하는 말이 자꾸만 입 안에서 맴돌았다.

너무 좋은데.

난 정말 너무 고마운데.

내가 밉지 않니? 나 때문에…….

입술만 소리 없이 달싹이는 사이 안시가 몸을 떼곤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코트까지 걸치신 걸 보니 밖에 나가시려는 거죠? 어딜 가시려고요? 제가 같이 갈까요?”

“아니야, 안시는 바쁜 사람이잖아. 혼자서 할 수 있어. 아마, 음…… 할 수 있을 거야.”

“어머나, 기특하기도 하셔라.”

나이가 먹을 대로 먹은 말만 한 처자가 이런 걸로도 칭찬받을 수 있는 곳은 우주 천지에 여기뿐일 거다.

태리는 쑥스러워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뒤로 오늘의 목적지에 대해 상기해 보았다.

‘클로드가 약재상의 거리는 도시의 동쪽, 폐허에 있다고 했었지.’

폐허라면 가물가물하긴 해도 알기는 안다.

두 번인가 퀘스트를 따러 간 적이 있었는데 딱 볼일만 보고 나왔기 때문에 상세한 길까지는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좀 문제였지만.

게임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지역이 아니라면 굳이 탐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숲 안에서는 눈 감고도 어디든 다 찾아가는데.’

그녀가 달달 외우고 있는 지도는 검은숲 한정.

하지만 겸사겸사 지리도 익힐 겸 오늘은 도시에서 길을 좀 잃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은 약재상의 거리에 가 보려고 해.”

그 말에 잠깐이었지만 모두의 얼굴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 안 될까?”

“아니요. 그럴 리가요. 단지 이렇게 빨리 방문하실 마음이 생길 거라곤 생각을 못 했어서……. 공주님께서 가신다면 다들 좋아할 겁니다. 모두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안시의 얼굴이 정말로 기뻐 보였다.

“그렇다면 제가 사소한 선물을 드려야겠네요.”

그녀가 꽂고 있던 머리핀을 뽑아 가볍게 휘두른다. 그것이 쑥쑥 크기를 키우더니 곧 거대한 금속 지팡이가 되어 나타났다.

“우워오워오…….”

이런 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영화에서도 이렇게까지 생생한 효과를 살리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건 마법, 그것도 진짜 마법이니까.

태리는 처음으로 여기 온 게 어쩌면 잘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로 산다는 건 사실 끝내주는 일인 게 아닐까?

그만큼 완전히 뽕에 취해 버렸다.

곧 지팡이 끝에 모인 힘의 결정체가 머리 위의 베레모로 흡수되었다.

“어?”

그러자 삽시간에 거울 속에는 다른 사람이 서 있게 되었다.

외모는 변한 게 없지만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인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우와. 이게 뭐야.”

감탄을 연발하며 태리는 거울 앞에서 모자를 벗었다가 썼다를 반복하며 그때마다 변하는 머리와 눈 색을 뿅 간 얼굴로 구경했다.

그런 뒤 당신들은 미쳤다, 최고다, 대단하다며 아낌없는 찬사를 날렸다.

공주님의 과한 칭찬에 안시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후후, 저는 환술의 마녀니까요. 그대로 나가시면 누군가의 표적이 될지도 모르니 간단한 변장을 해 드렸습니다. 모자를 벗으면 원래대로 돌아온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완전, 완전!”

“여긴 어딜 가나 근본 없는 용사 지망생들로 넘쳐 나니 귀찮으실 거예요.”

“용사 지망생이라면.”

“예, 호텔 앞에서 감히 공주님을 모욕하며 시끄럽게 하는 그런 놈들이지요.”

몬스터 게이트가 열린 뒤 검은숲은 전 대륙의 명물이 되어 버렸다.

국적과 인종을 불문하고 무용 좀 떨친다고 하는 모험가들이 몰려왔고, 그들은 하나같이 세계를 구할 용사가 되길 꿈꾸며 저주를 해결하러 숲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순수한 정의와 의기로 찾아온 자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그렇네, 조심할게.”

“조심하지 않으셔도 돼요. 공주님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셔도 됩니다. 변장은 성사긴 일이 생길까 봐 걸어 드렸지만, 만약 힘을 쓰고 싶은 일이 생기신다면 그러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어어……?

“그리고 혹여 공주님께 더러운 주둥이를 놀리는 폭력배들을 만나시거든 기억해 두었다가 제게 꼭 말씀 부탁드려요.”

“왜?”

이번에는 신이 난 마치와 릴리가 대답을 가로챘다.

“혀를 뽑으려고요!”

“머릿속에 든 못된 벌레도 빼내고요!”

얘들아……?

너희 아까 분명히 내게 예쁜 꽃을 보여 주지 않았니?

* * *

나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호텔 문을 나서려는 태리에게 안시는 아무래도 혼자 보낼 수는 없겠다며 기어이 길잡이를 붙여 주었다.

정문 앞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일일 길잡이라는 그 사람이었다.

“돌아왔다더니 진짜였잖아?”

태리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빨간색 공단 드레스 차림의 여성이었다.

화려한 부채를 세워 입을 가린 그녀가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가느다란 눈웃음을 보였다.

저 얼굴 낯이 익은데…….

태리가 가물가물한 머릿속을 파헤치고 있는 사이 안시의 불호령이 떨어지며 상대의 이름을 똑똑히 짚었다.

“브리짓! 당장 내려오지 못하겠니? 공주님께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브리짓!

‘역병의사 브리짓?’

태리는 즉각 내적 비명을 질렀다.

브리짓. 브리지테 듀이. 희미했던 지식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신시가지의 어느 괴상한 찻집에서 각종 물약과 포션, 해독제 등을 팔았던 의사. 그 NPC의 머리 위에 ‘역병의사 브리지테’라는 글자가 늘 떠 있었다.

‘의사가 아니라 마법사였어?’

수상한 물약이나 파는 찻집 주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설정이었다.

그사이 억지로 끌어 내려진 브리짓이 샐쭉한 표정으로 태리의 앞에 섰다.

“공주님, 제 조카 브리지테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어릴 적 공주님의 배동이자 시녀였던 아이인데―”

“아, 됐어. 날 기억이나 하겠어?”

남의 말을 뚝 분지르며, 절대 모를 거라고 여유롭게 코웃음을 치는 걸 보며 태리는 이번에야말로 정신을 번쩍 차려야 할 순간이라는 걸 자각했다.

게임을 해 봤던 경험에 의하면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목을 가다듬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는 척’을 했다.

“오랜만이야.”

그 한 마디에 브리짓의 눈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뭐야. 진짜 날 기억하는 거야? 흐음, 공주님 친구로 들어온 시녀는 성에 수십 명이나 됐을 텐데?”

역시나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눈치다.

‘그렇다면 바로 치트키지.’

태리는 두 번째 관문에서 곧바로 쐐기를 박았다.

“찻집을 한다며? 놀랐어. 넌 어렸을 때부터 마법 물약 쪽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거든. 물론 꼭 그대로 직업을 정할 필요는 없지만.”

“……!”

쐐기를 박은 게 효과가 있었던지 빙글거리던 얼굴에서 장난기가 싹 가시더니 잠시 후 눈매가 서서히 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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